갖가지 해석이 가능한 생 로랑의 블랙

안토니 바카렐로의 2017 가을 겨울 생 로랑 컬렉션은 블랙에 대한 갖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작가가 있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지 않는 작가, 존 치버와 메이비스 갤런트가 대표 인물이다. 반대로 이미 쓴 글을 되풀이해서 읽는 작가도 있다. 패션계를 볼 때, (확인한 내용은 아니지만) 자신이 만든 옷을 뒤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짐작되는 인물은 에디 슬리먼이다. 그에게는 의지대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박진감이나 기백하고는 다른 종류다. 그보다는 훨씬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을 쓰고 싶다. 그가 떠나고 생 로랑을 맡게 된 안토니 바카렐로는 신화 속 시시포스의 돌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유서 깊은 하우스에 들어왔다. 첫 컬렉션은 솔직히 좀 모호했다. 바카렐로 특유의 섹시함과 날카로움을 기대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새로운 주인이 들어온 생 로랑 컬렉션은 한동안 흥미로운 창문이 없는 건물 같았다.

에디 슬리먼과 구별되는 그만의 아주 잘하는 것들을 어서 와르르 꺼내놓기를 기대하면서 2017 가을 겨울 생 로랑 컬렉션을 봤다. 쇼는 2018년에 이브 생 로랑 하우스가 될, 한참 공사 중인 파리 시내 한 건물 부지에서 차가운 겨울비와 함께 시작했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이번 컬렉션을 “나는 무슈 생 로랑의 옷에 대한 파괴적 접근 방법, 심술궂으면서 어두운 로맨티시즘을 존경한다. 이런 유산에 과격한 상상을 더해 이번 컬렉션을 완성했다”는 짧은 말로 설명했다.

심장이 튀어나갈 듯 굉장한 진폭의 음악과 함께 반짝이는 가죽 재킷을 입은 첫 번째 모델이 등장했다. 그간 남자와 여자를 나눠 진행하던 방식을 버리고 이제 생 로랑 컬렉션은 남자 옷과 여자 옷을 섞어 계절별로 딱 한 번만 한다. 블랙을 기본으로 시가 브라운과 그레이, 아주 소량의 화이트를 쓴 컬렉션은 에비에이터 룩과 이브닝 룩, 두 가지로 구성됐다.

남자 옷은 블루종과 니트, 코트, 수트처럼 평범한 아이템 위주여서 당장 입고 외출해도 될 만큼 일상적이고 간단했다. 다만 팬츠의 허릿단 처리, 니트와 티셔츠를 겹쳐 입은 방식, 티셔츠 네크라인의 기울기 같은 작은 요소들을 세심하게 계산한 덕분에 단조롭거나 지루하진 않았다. 특히 양털 칼라를 덧댄 짧은 가죽 블루종은 무척 세련되고 유용해 보였다. 빗줄기가 빛처럼 쏟아지는 밤에 온통 머리가 젖은 모델들이 피날레를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돌아갔다.스팽글이 별처럼 붙은 블랙 드레스와 레지스탕스처럼 차갑고 단호한 가죽 재킷, 골반에 예쁘게 맞는 회색 팬츠가 다시 생각났다. 파괴적인 접근과 심술궂으면서 어두운 로맨티시즘은 어떤 순간에 등장했을까? 어쩌면 모델 뺨의 번개 무늬 흉터 장식을 보느라 놓쳤을 지 모른다. 그보다 기억에 남는 건 숯 같고 밤 같고 흑경 같은 검은색이었다.

세상의 모든 블랙. 벼락치듯 강렬한 충격은 없어도, 안토니오 바카렐로의 이번 컬렉션은 길을 벗어난 느낌은 아니었다. 디자이너의 비참함과 영광은 트럼프 카드처럼 얇은 차이에서 결정된다. 바카렐로가 자신이 쓴 얘기를 자꾸만 다시 읽으면서 처음 것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경우가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 생각한 게 대체로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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