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연인도 아닌 설리

설리는 더 자유롭고 더 열렬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것이다.

설리는 하고 싶은 걸 한다. 노브라 차림으로 회색 저지 트레이닝복을 입고 풀밭을 뛰어다니고, 쥐 파먹은 것 같은 앞머리를 하고 배시시 웃으며, 클럽에서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거나 입에 휘핑크림을 한가득 짜 넣기도 하고, 남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볶음밥을 플레이팅하는 남다른 재주까지 선보인다. 아이돌 그룹 에프엑스에서 탈퇴한 이래 소위 ‘기행’이나 ‘충격’, ‘파격’, ‘아슬아슬’ 등 자극적 수사로 무수히 구설에 오른 그는 최근 최자와 약 2년 7개월간의 연애를 마감했다. 열네 살 연상의 이 남성과의 연애는 줄곧 설리의 ‘방황’의 시작과 의미심장한 인과관계를 지니는 양 병치되어왔다. 그렇다면 그가 ‘탈선’하기 전, 아이돌 시절에는 어땠나. 방싯방싯 해맑게 웃는 얼굴과 분홍빛으로 물들인 무릎을 지닌 그는 복숭아 같은 만인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이제 누구의 연인도 아닌 설리는, 여전히 활발하게 SNS라는 창구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상냥하고 무해한 일군의 국민 여동생들 사이에서 그의 존재가 얼마나 눈에 띄는 것이었고, 그의 행동이 어떤 페미니스트적 퍼포먼스로 해석되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담론이 생산되어왔다. 일각에서는 설리가 ‘관종’(관심종자의 줄임말)에 불과하며 페미니스트들이 그저 ‘제멋대로 하고 싶은 걸 할 뿐인 여자애’에게 꿈보다 해몽식 각주를 붙일 뿐이라 냉소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어떤 시선에도 포섭되지 않고 ‘제멋대로 하고 싶은 걸 하는 여자’는 그 자체로 얼마나 희귀하고 소중한 존재인가. 우선, 여성의 노브라 차림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그의 공은 상당하다. 대관절 여성의 유두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중으로 가려지지 않은 것만으로 사람들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설리는 한동안 드레스든 트레이닝복이든 노브라 차림을 고수했고,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일부 남성들은 노브라의 목적이 섹스어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나, 여성은 단지 자유롭고 편한 거동을 위해 노브라를 선택할 수 있다. 참으로 새삼스럽게도, 시선 이전에 주체가 우선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대개 여성의 차림이 아니라 그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다.

설리가 ‘관종’이라는 말을 논박할 생각은 없다. ‘관종’이면 또 어떠한가. 관심종자란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포장하거나 의도적으로 연출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란 뜻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좀 다르게 생각한다. 설리가 SNS에 전시하는 모습은 동그랗게 뜬 눈과 한껏 끌어올려 경직된 입매, 45도 각도의 턱, 얄궂은 하트 모양의 손가락, 가지런하게 모은 다리 같은 프레임에서 벗어난 예쁨이다. 설리는 자신이 어떤 각도에서 어떤 얼굴로 찍히더라도 다 기껍고 예쁜 듯하다. 거기에 인위적인 포장은 없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예뻐 보일지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 이의 예쁨이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리고 그것이 자못 천연덕스럽고 뻔뻔하여 더욱 미덥다. “내가 쌍둥이였다면 둘이 사랑에 빠졌겠지?” 그렇다. 설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소비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향해있다. 그의 자존감과 인정투쟁의 회로는 비뚤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노골적일 만큼 정직하다. 이렇게 타인의 관심이 아닌 자신이 보는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관심종자’라면, 나는 충분히 지지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토록 무구할 정도로 단순하고, 맹렬할 정도로 투명한 설리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남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음’과 ‘개의치 않음’이다. “이래야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이러면 남자들이 싫어해”, “이래 가지고 어떻게 시집갈래?” 같은 세간의 구질구질한 말을 아랑곳 않고 튕겨낼 때, 그 태도는 매우 유효해진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를 둘러싼 담론을 활발하게 생성해낸 지점도 바로 여기다. 설리는 SNS에서 유행한 해시태그인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의 결정체 같은 여자였으니까. “내가 좋다는데 뭐?”라고 하기라도 하듯, 설리는 노브라 차림에 아무리 악플이 달려도 아랑곳 않고 또 다른 노브라 차림의 사진을 올렸다. 박수라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설리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 직면한 사건이 그 연장에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설리는 사진가 로타와의 작업으로 뭇매를 맞았다. 설리의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면, 로타가 찍은 사진은 분명 이질감이 든다. 설리가 평소에 올리는 ‘셀카’는 생동감 넘치며 타자의 욕망이 틈입할 여지 없이 그 자체로 자족적인 사진들이다. 그러나 로타의 사진은 남성중심적인 시선이 개입되고, 여성의 몸은 그 욕망 앞에 무기력하게 놓여있는 것으로 대상화된다. 무해한 표정과 수동적인 포즈, 유아적인 복장과 소품, 현실이 아닌 2D에 가깝게 색을 뺀 파스텔톤 색감으로 대변되는 로타의 작업은 로리타 혐의를 피해갈 여지가 없다. 여성을 무해한 소녀 판타지 속에 가두는 로리타적 미감은 유해할 뿐 아니라 후지고, 일말의 의식도 없이 그런 사진을 찍는 예술가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사진가와 피사체 여성에 대해서는 그 비판의 층위가 달라야 하지만, 찍히는 대상 역시 그런 콘텐츠를 생산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설리는 로타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 작업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원해서 존슨즈베이비오일 티셔츠를 입었고 스스로 멍한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시키는 대로 한 것보다야 낫다. 단지 주체적으로 수동적인 이미지를 자처한 역설이 발생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것이 지지의 글인 까닭은, 페미니즘이 시대의 담론이 되고 과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여전히 설리가 이 시대의 한 아이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그리고 내면의 적과 정교하고 치밀하게 투쟁해야 하는 일이다. 돌아보고 단절하고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나 역시 내 안의 편견과 ‘빻음’에 대해 새삼 깨닫거나,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남성중심적인 시각으로 내면화된 욕망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함정에 빠지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로타와의 작업이 설리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방법으로 향유해보는 하나의 실험이었다면, 시행착오로 그치길 바란다. 기존의 여성 아이돌에게 부과되는 규범에서 탈주한 그가 이번엔 미디어의 남성주의적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한 주체로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길 바라는, 나의 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