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박미선 “여자들도 뭔가 보여주고 싶다”

2017.04.27GQ

박미선은 2013년 이렇게 말했다. “26년째 일을 하고 있는데, 요즘 예능은 남자들이 지들끼리 다 해먹는다. 그게 많이 속상했다. 여자들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도 이 말이 유효한 방송가에서 박미선은 쉬지 않는다.

포털 검색창에 ‘박미선’을 치면 연관검색어로 어떤 단어가 나올까? 남편의 이름인 이봉원, 절친한 연예계 동료인 이성미의 이름도 보이고, 박미선의 나이도 많이 궁금해하는 듯 하다. 하지만 최근 박미선의 연관검색어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엉뚱하게도 ‘피임약’이다. 함께 검색되는 또 다른 연관검색어인 EBS의 토크쇼 <까칠남녀> 속에서 한 발언 때문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예능보다는 교양에 가까운 이 쇼에서 박미선은 그 누구보다 능숙하게 방송에 익숙지 않은 패널들을 조율하며 방송을 이끌어가는 MC로 스튜디오의 중앙에 앉아 있다. <까칠남녀> 2회에서 남성용 경구피임약을 복용하지 않겠다는 한 출연자에게 박미선이 던진 한 마디는, 그의 진행 능력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는 촌철살인으로 회자되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딸은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납니다.” 단독 진행으로 예민할 수 있는 사안의 토론을 조율해야 하는 위치에 서자,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동시에 단호하게 할 말은 하는 박미선의 진행 방식이 한층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까칠남녀>를 통해 주목도가 조금 올라가기는 했지만, 사실 박미선은 30년 전 데뷔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시청자들의 시야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는 방송인이다. 포털 사이트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출연 프로그램만 52개에, KBS <개그콘서트>와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부터 SBS <순풍 산부인과> 같은 시트콤,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는 토크쇼들까지 장르도 다양하다. 라디오까지 포함하면 박미선이야말로 방송의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멀티 플레이어’의 원조 격이라고 할 만하다. 지상파만 존재하던 시절부터 소속 방송사에 덜 구애받으며 활동했고, 현재도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을 가리지 않고 출연 중이다. 스스로도 “잘 맞춰주는 것”을 장점으로 꼽을 만큼 모난 데가 없고 두루 호감을 얻을 법한 외모와 태도를 겸비한 덕에, 박미선에게는 대부분의 여성 예능인에게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반드시 찾아오는 경력 단절이 없었다. 박미선은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얻은뒤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며 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코미디언이자 희극 배우로, 진행자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갔다. 박미선의 공중파 수상경력은 5년 이상 끊긴 적이 없고, 본격적으로 예능 진행자로서 역량을 발휘한 10여 년 전부터는 2~3년 단위로 꾸준히 연말 시상식에서 쇼 버라이어티 부문 진행자로 여성이 받는 최고상을 수상해왔다. 그중 2013년 KBS 연예대상 최우수상 수상 소감은 복기할 만하다. “26년째 일을 하고 있는데, 요즘 예능은 남자들이 지들끼리 다 해먹는다. 그게 많이 속상했다. 여자들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남자들이 다 해먹는’ 예능 바닥은 부침이 거의 없는 커리어의 소유자인 박미선에게조차 가혹했다. 2년 전 가을, K BS2 <해피투게더> 시즌 3는 박미선과 김신영의 하차 소식을 전해왔다. 하차 소식이 통보되던 당시 구체적인 상황이 전해지지 않은 대신, 박미선이 “내가 왜?” 라고 물으며 무척 당황했다는 소식만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도대체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시 제작진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박미선과 김신영을 제외한 일부 출연자가 하차를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 역시 시청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비슷한 역할을 분담하고 있던 두 사람 중 왜 조세호만 남고 김신영은 떠나야 했는지, 왜 하필이면 ‘해고 통보’의 대상이 여성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이 ‘왜’에 대해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 채 박미선이 전현무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박미선은 이미 다른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었고, <해피투게더>를 하차한 이후에도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으며 자신의 진행 역량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불시의 하차 이후, 박미선이 아닌 여성 예능인들의 자리는 더욱 적어졌다. 7년 8개월 동안 함께해온 박미선이 하차한 후, 유재석,
박명수, 전현무 3인 MC에 고정 패널로 조세호와 엄현경으로 전체 출연진을 구성한 <해피투게더>는 그나마 구색으로라도 여성 출연진을 넣은 모양새다.

그 외 지상파 예능 대부분은 먹방이든 스튜디오 예능이든 리얼 버라이어티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MC 전체를 남자로만 구성하고 있다. MBC <세바퀴>에서 박미선은 양희은과 이경실을 비롯한 절친한 동료이자 지인들과 함께 방송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패널 구성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박미선의 주무대 역시 종합편성채널로 옮겨졌다. ‘떼토크’라고 불리는 스튜디오 단체 토크쇼가 주력 프로그램인 종편 채널의 특성에 맞추어 박미선의 역할도 변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박미선이 탁월한 진행자라는 것은 맞지만, 그 박미선마저도 살아남아 계속 진행자의 역할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여성의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에서조차 여성 출연자들의 역할이 엄마와 아내로 국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박미선의 기존 이미지가 ‘떼토크’ MC 역할과 상충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또한 박미선이 계속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과연 박미선과 비슷한 이미지를 갖지 않은 여성 예능인에게도 박미선과 같은 기회가 지속적으로 주어질까? ‘똑소리 나지만 너무 똑똑하지는 않고, 모난 데 없고 적당히 수더분하며, 평균 대중의 삶과 가장 비슷하거나 비슷할 것으로 여겨지는 삶을 사는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박미선은 계속 커리어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을까? 의도치 않았겠지만 박미선은 결국 이 ‘남자 중심의 예능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성 방송인은 최대한 모범생에 가까워야만 한다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박미선의 진행 능력이 코미디언 출신과 아나운서 출신으로 양분된 현재의 방송 진행자들 가운데 어느 쪽과 견주어봐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탁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진행 실력에 ‘타의 모범이 되며 별다른 약점이 없는’ 이미지가 더해져야 예능인이자 진행자인 박미선이 완성된다. 이 이미지를 만드는 데 박미선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수반되었음은 물론이다. 50을 넘긴 박미선의 몸매는 군살 하나 없이 정돈되어 있고, 얼굴도 마찬가지다. 그냥 박미선이 방송인으로서 자기 관리를 잘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 진행자에게, 아니 훨씬 더 연령대를 낮추더라도 남성 코미디언과 진행자들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연 박미선, 곧 중년 여성 예능인에게 적용되는 외모적 기준과 동일 조건의 남성들에게 허락되는 기분이 동일한가?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박미선의 존재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내 살아남아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 그리고 현재도 일하고 있는 여성 예능인의 가치, 또 하나는 박미선 실력과 이미지 양쪽 면에서 그가 갖춘 수준에 도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여성 예능인들의 잔인한 현실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다.

그런 의미에서 <까칠남녀>는 박미선 방송 인생의 기점이 될 법하다. 수많은 여성 예능인이 패널의 위치에 머무르고 그나마 역할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독 진행을 맡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박미선은 전문가 패널들을 조율하면서 토론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끌어가야 하는 역할을 누구보다 잘해내고 있다. <까칠남녀>는 또한 박미선이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진행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바꿀 수 없었거나 변화하기 쉽지 않았던 부분들을 새롭게 배워갈 장이기도 하다. 박미선은 MBC <우리 결혼했어요>를 진행하면서 여성 인물들을 항상 사랑을 갈구하는 위치에 놓는 식으로 성별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거나, 전통적 성 역할에 얽매인 코멘트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내이며 엄마, 며느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평균의 인물, 평균의 가정, 평균의 성별 특징만을 기준으로 삼아 발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확히 의견을 말하거나 대립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둥글게’ 지나가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를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미선이 명절 특집 때마다 ‘여러분’이라며 끌어안는 코미디언 후배들과 관련한 이슈가 그렇다. 현재 한국 코미디가 외면받고 있는 것이 과연 시청자가 코미디언들의 노력을 충분히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여성과 소수자 혐오, 새롭지 않은 레퍼토리, 1차원적인 풍자가 원인은 아닐까? 박미선이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행동은 일종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이는 동시에 안일함에 대한 동조일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의 박미선에게 필요한 고민은 이미 자신이 해왔던 일, 예를 들어 여성 동료와 후배들을 독려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방송 구조와 그걸 넘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까칠남녀>는 정확한 타이밍에 박미선을 찾아온 셈이 됐다.

그렇기에 자신이 젠더 문제에 대해 “몰랐던 것이 많다”고 인정하고 “얘기를 들으며 공부하겠다”는 박미선을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누군가는 박미선과 같은 방식이 아니어도 박미선이 걸은 길을 갈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박미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부침을 겪었지만 여전히 여성 예능인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영자도, 결혼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채로 메인 스트림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송은이도, 적극적으로 ‘가모장’이 되어 가부장제와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예능계에 균열을 낸 김숙도, 남자 방송인들이 욕망이 많다며 놀리자 스스로 ‘욕망 아줌마’ 캐릭터를 자기 안으로 들여와 방송과 사업에 모두 적용하고 있는 방송인 박지윤도, <해피투게더>를 박미선과 함께 떠나야 했지만 라디오에서, 또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개성 있고 재치 있는 진행자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김신영도, 작가와 감독의 역할을 하고 유튜브에 채널을 만들기도 하며 뉴미디어 시대에 각자의 방식으로 적응 중인 안영미와 강유미도, 함께 토크쇼 <까칠남녀>에 출연하는 서유리도, 수많은 여성 방송인, 진행자, 코미디언도 박미선이 지나왔고 앞으로 갈 길을 가야 한다. 누군가 이미 앞서 간 길을 걷는 건, 처음처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에디터
    글 / 윤이나(대중문화 평론가)
    일러스트레이터
    이승훈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