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스토리 작가, 이호준

셰프, 음식 칼럼니스트, 먹방 크리에이터, 푸드 디렉터의 시대, 음식 스토리 작가의 가치란.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은 이야기가 많다. 준비 기간 2년, 연재 기간 13년, 회당 조회 수 40만 건, 단행본 30권, 관련 단행본 10권, 누적 판매 부수 400만 부, 한편 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의 원작.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그래서 때로는 ‘국민 만화’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는 <식객>.
그런데 이 만화의 탄생 과정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이 과정에 이호준 음식 스토리 작가가 있다. 영화 <히든 피겨스> 속 세 여인처럼,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이호준 작가를 지지한다.

대학을 졸업한 이호준은 백수였다. 모 게임 회사 공모전에 당선돼 취업을 약속 받았지만 IMF의 여파로 회사가 사라졌다. 백수의 눈에 띈 것은 당시 인기를 끈 일본 만화 <미스터 초밥왕>. 한국에서도 어쩌면 음식 만화가 통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부도난 나라에서 취업은 난망했다. 백수 이호준은 친구 사무실에 얹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1년 동안 김치를 소재로 한 스토리 작업을 했다. 스토리를 완성한 이호준은 이를 만화로 구현시켜줄 사람은 허영만 화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친척의 소개로 <타짜>의 출판사 대표를 만났다. 하필이면 그때 허영만 화백이 출판사를 찾았다. 살다 보면 더러 이런 거짓말 같은 운명과 조우하는 순간이 있다. 이호준의 스토리를 본 허영만 화백은 일주일을 고민한 끝에 만화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대신 김치가 아닌 우리음식 전반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허영만 화백은 사비를 털어 이호준에게 월 30만원의 취재비를 지원했다. 전국 팔도를 구석구석 누비는 <식객>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년의 준비 과정을 거친 <식객>은 2002년 9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했다. 초기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계몽적이었다. 이호준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그는 열 번째 에피소드인 ‘고구마’ 편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연재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스토리로 승부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와 헤어진 사형수. 사형수의 스토리를 알게 된 주인공 성찬은 사식으로 삶은 고구마를 넣어준다. 고구마를 먹으며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린 사형수는 간절한 눈물을 흘린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행여나 저승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엄마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울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독자들은 환호했고 이호준은 안도했다. 음식 이야기도 결국은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에피소드를 기점으로 일본의 음식 만화는 대결을, 한국의 음식 만화는 감동을 지향한다는 구도가 형성됐다. 한국적인 음식 만화 스토리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고구마’ 편과 더불어 내가 꼽는 식객의 또 하나의 명장면은 ‘콩국수’ 편의 마지막 컷. 여름날 오후. 마을의 정자나무 아래 앉은 할머니와 손자. 그리고 손자에게 콩국수 한 가닥을 먹이는 할머니의 미소 띤 얼굴. 음식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의미를 지님을 아는 이호준이기에 찾아낸 진경이 분명했다. 이후 허영만 화백과 이호준은 <식객> 30권,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8권, <커피 한잔 할까요> 8권 등 17년 동안 무려 마흔여섯 권의 작품을 완성한다.

맛 칼럼니스트인 나와 음식 만화 스토리 작가인 이호준은 언제 어떻게든 만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2013년 <식객> 연재 막바지에 만난 우리는 지금까지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호준 덕분에 나는 식객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어묵’ 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4년 독자 입장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꿈을 이룬 셈이다. 71년생 동갑내기인 우리 둘은 이후로도 의기투합.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 등을 다니며 함께 취재를 하고 있다.

음식이라는 같은 소재를 탐구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둘의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우선 칼럼니스트는 홀로 작업하지만 이호준은 만화가라는 파트너가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싶은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끝이지만 이호준은 만화가의 눈이 되어줘야 한다. 허영만 화백 역시 이호준 못지않게 현장을 누비지만 그림을 그려야 하는 처지라서 이호준만큼 현장을 누빌수는 없다. 스토리로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현장감은 사진으로 전달해야 한다. 따라서 좋은 스토리 못지않게 중요한 게 만화에 필요한 장면을 잡아내는 선구안이다. 이는 만화가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서로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 하나만 하더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수십 컷의 사진이 필요하다. 이러다 보면 에피소드 당 수천 컷을 찍는 경우도 허다하다.

맛 칼럼니스트인 나는 취재를 통해 정보만 얻으면 충분하지만 이호준은 스토리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음식과 식재료에 관한 정보나 연구 성과가 충분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레퍼런스의 부족은 결국 주제에 맞는 이야
기로 채울 수밖에 없다. <식객> 취재 초기부터 이를 스스로 터득한 이호준은 모든 소재를 현장에서 찾는다. 그래서 이호준의 진가는 취재 현장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스토리 작가로서 그가 가진 첫 번째 능력은 지구력과 순발력이다. 그는 결코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취재원의 스케줄에 따라, 혹은 취재원이 준비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인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몸이 반응하는 순간이 오면 그 찰나를 귀신같이 낚아챈다.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두 번째 능력은 적응력이다. 어부를 만나면 어부가 되고, 전라도 사람을 만나면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할머니를 만나면 기꺼이 손주 역할을 한다. 취재원과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혀야 더 많은 소재를 얻을 수 있음을 그는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심지어 택시 한 번을 타도 기사에게 어지간한 정보를 다 뽑아낼 정도로 천연덕스럽다.

이런 이호준의 더듬이는 일상에서도 쉬는 법이 없다. 만나는 사람의 직업, 희로애락, 대화 등 어떤 상황에서 건 이야기의 소재를 찾는다. 그 모든 상황을 기억하거나 메모를 해두고 결국엔 완성된 스토리로 옹골차게 녹여낸다. 그 능력 하나만큼은 질투 날 정도로 탁월하다.

<중앙일보>에 2년 동안 연재한 <커피 한잔 할까요>를 끝으로 만화가 허영만과 스토리 작가 이호준의 17년에 걸친 작업은 끝이 났다. 때로는 사제지간으로, 때로는 동지로서 지난 세월을 함께 걸어왔다. 허영만 화백을 부르는
“선생님”이라는 이호준의 호칭에는 존경이, “호준아”라고 부르는 허영만 화백의 호칭에는 신뢰가 담겨 있다. 비록 각자의 길을 걷더라도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다. 새로운 만화가를 파트너로 맞이한 이호준은 올 11월 연재를 앞두고 사전 조사가 한창이다. 이미 그의 책장에는 수십여 권의 관련 서적이 쌓여 있다. 우리나라 음식전문 스토리 작가의 길을 개척한 그의 다음 작품은 술과 술안주 그리고 해장 음식이라고 한다. 술과 음식을 즐기는 인간의 내밀한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빚어낼지 벌써부터 궁금해 환장할 지경이다. 이호준은 지금껏 기다림에 실망으로 답한 적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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