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에 대해 논하는 2편의 영화

<언노운 걸>이 말하는 이웃의 윤리, <세일즈맨>이 실패한 징벌의 윤리에 대하여.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떤 것이 윤리적인 것인가. 영화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원론적인 고민에 빠지게 하는 두 편의 영화가 지난 5월 개봉했다.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은 그들이 늘 매진해온 공동체와 개인, 부조리한 시스템 속 소외된 인물군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형식상의 변화가 있다. <로제타>의 여공, <더 차일드>의 미성년 부모, <내일을 위한 시간>의 부당해고자… 늘 계급의 하위층, 소외된 개인의 시선에서 시스템의 부조리를 그려왔던 전작들과는 달리, <언노운 걸>에서는 의사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가 추적해나가는 대상이 소외된 인물이다. 안에서 밖을 봤던 전작과는 달리,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방식이랄까.

요컨대 의사 제니는 당사자가 아닌 목격자인 것이다. 그는 진료시간이 끝난 후 병원 벨을 누르는 한 소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소녀는 다음날 사망한 채 발견된다. 깊은 죄책감을 느낀 제니는 이름 없이 죽어버린 소녀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하고, 그의 죽음에 일조한, 방관한 이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제도권 밖으로 추락해버린 소녀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것은 신원불명 무연고자로 지워져버린 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일이며, 가해자와 방관자에게 죄를 묻는 과정이다. 후자는 전자만큼 중요한 일이다. 연고도 모르는 매춘부 소녀의 죽음엔 누구도 관심이 없고, 묻지 않는다면 없던 일이 되고 말 것이므로. 제니의 탐문은 소녀의 죽음에 가담한, 방관한 이들에게 죄책감을 환기시키고, 죄를 마주보게 한다. 그러니 <언노운 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목격한 자, 이웃한 자, 이웃의 윤리다. 이것은 비극이 도처에 있고 이름 모를 이웃의 죽음에 무관심해진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윤리이기도 하다. 제니는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아야 했다. 지금의 우리가 가라앉은 지 3년이 지난 세월호를 뭍 위로 끄집어내고, 죄다 해체해서라도 희생자들의 유골을 찾아내야만 하듯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절대 잃어서는 안 될 인간됨이듯이.

 

반면,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세일즈맨>이 윤리를 대하는 태도에는 의구심이 든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수작이었던 까닭은, 피해와 가해의 입장을 계급적, 정치적, 종교적 층위에서 교묘하고 촘촘하게 뒤섞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완전한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린 가정부를 떠밀어 유산하게 만들었다는 명제에는 얼마나 복잡한 가치판단들이 개입하는가. 그런데 <세일즈맨>은 경우가 다르다. 아내를 성폭행한 범죄자가 알고 보니 한 가정의 가장이고 중병을 앓고 있는 노인이더라는 명제에 어떤 가치가 충돌하는가? <세일즈맨>은 명백히 잘잘못이 가려지는 상황에 윤리적 딜레마라는 전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놓고서는, 복잡해서 헷갈려 죽겠다는 듯 군다. 죄는 죄고, 동정심은 별개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적 복수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유산과 사고와 거짓말 같은 복잡한 도미노도, 돌고 도는 알고리즘도 없다. ‘네 혹은 아니오’의 명료한 상황에서 피해자 여성은 왜 가해자 남성이 불쌍한 처지라는 것만으로 죄를 용서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야 하는가. 피해자가 가해자의 개인적인 처지를 동정해 죄를 지우는 것이 윤리적인 것인가? 이 모든 걸 세련된 영화적 기법과 수사로 뒤섞어 윤리에 대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는 과연 윤리적인 것인가?

<언노운 걸>은 올해 봄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였다. 반면 <세일즈맨>은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잘못된 방식으로 복제하며 실패했다. <언노운 걸>을 보고 나오는 길에 우리가 되찾아야만 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세월호의 미수습자들의 이름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19세 청년을,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희생자를 복기하면서 이들 죽음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있는 것인지, 사라져간 생명들의 존엄성을 올바르게 회복하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제니가 마지막 순간에 희생자의 언니와 나누던 포옹을 생각했다. 윤리적인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건, 잘 만든 영화 한 편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