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롤 모델이 없는 90년대생

2017.06.16GQ

앞만 보고 달려갈 곳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강혁 , 2013

이강혁 <공덕동>, 2013

나는 1990년에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 서울 근교의 한 재봉 공장에 다녔고 아빠는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큰 가구 회사의 하청 업체에 다녔다. 신혼살림은 경기도 부천의 한 신축 빌라에 꾸렸다. 지하의 방 한 칸과 부엌이 겨우 딸린 집이었지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나를 낳았고, 아빠는 생계를 잇기 위해 매일같이 경기도 부천에서 일산으로 출퇴근을 했다. 나무를 만지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제법 돈을 벌었다. 엄
마는 그 돈을 아껴 내게 동화책 전집과 장난감을 사주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였다. 우리는 주말과 휴일이면 친구네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쳤다. 한국 정부가 IMF로부터 자금 지원을 위한 양해 각서를 체결하기 1년 전인 1996년, 나는 일곱 살이었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외환 위기는 우리 가정에 먼저 도착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망한 것이다. 어떻게든 다른 일을 알아 봐야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빠가 배운 것이라곤 오로지 나무를 만지는 일뿐이었다. 전국 장애인 기능공 대회에서 여러 번상을 휩쓴 아빠였지만 IMF 사태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아빠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주변의 친구들이 호떡을 굽고 파는 일이 돈이 된다고 했다. 혼자서는 무리였기에 엄마도 장사에 나섰다. 나는 아직 일곱 살이었고,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엄마는 내게 “이제부터 어린이집에 혼자서 가야 한다”고 했다. 동생과 함께 가야 하니 이 길을 똑똑히 기억하라고도 했다. 나는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조그만 골목길을 지나 차도를 여러 번 건너는 무서운 길이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어린이집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나면 엄마와 아빠는 밤늦게 우리를 데리러 왔다. 엄마의 품에서는 늘 밀가루 냄새가 났다. 한 곳에서 호떡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을 대전의 할머니에게 맡겼다. 나는 할머니 댁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엄마와 아빠는 전국을 돌며 호떡을 팔고 풀빵을 구웠다.

초등학교에서는 덧셈과 뺄셈, 곱셈과 나눗셈을 배웠다. 구구단을 외는 것까지는 얼추 따라갈 수 있었지만 나눗셈은 막막했다. 친구들은 곧잘 하는 것만 같았다. 집에서 전과를 보고 숙제를 하다 울음이 터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음성언어가 아닌 수화언어를 사용하는 엄마, 아빠도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답답하고 서러웠다. 나는 그렇게 종종 이를 악물고 울었다. 학교에서는 “대한민국은 곧 통일을 이룰 국가”라고 가르쳤다. 내가 처음으로 인지한 대통령은 김대중이었다. TV에서는 종종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흘러나왔고,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이었다. 선생님은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고 이제는 누구든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청각장애를 가진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길거리에서 빵을 굽고 파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엄마, 아빠를 불쌍히 여겼다. 부모는 그렇게 ‘착하고 열심히 사는 장애인’으로 살아남기를 택했다. 나는 그런 부모 아래서 ‘착한 장애인의 자녀’가 되어야 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살고 싶다’보다는 1등을 해야 하고, 상을 받아야 하고, 저 친구보다 내가 더 우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와는 달리 내 행동 하나하나가 점수로 매겨졌다. 가령 한문 숙제를 해가지 않으면 수행 평가 점수에서 1점이 깎이는 식이었다. 어느 날은 한 친구의 한문 공책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그 공책은 화장실에서 찢긴 채로 발견되었고, 정황상 누가 공책을 훔쳐 숙제를 한 페이지를 찢어 자신의 공책에 붙인 후 버린 것이었다. 공책을 도둑맞은 학생은 서럽게 울었고, 범인은 끝내 자백하지 않았다. 끔찍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1점을 위해 친구의 공책을 훔치고 찢고 외면했다. 학교는 그것이 신자유주의 승자 독식 사회의 병폐라고 진단하지 않았다. 단지 한 학생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가르칠 뿐이었다. 미숙했던 나는 아, 그런가 보다, 하고 그 일을 무심히 지나쳤다. 오버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공부를 곧잘 했고, 매일 1등을 했고, 전교 회장이었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SKY도 갈 수 있고,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도 있고, 돈도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도 할 수 있고, 자아 실현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말했고, 나는 굳게 믿었다.

그런데 크면 클수록 그건 모두 남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 그건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난 고등학교에 시험을 보고 입학했는데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이 모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살거나 어학 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음악 선생님은 주어진 곡을 편곡하여 연주하는 것이 기말 과제라고 했다. 난감했다. 편곡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었다. 친구들은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악기들을 가져왔다. 난감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곡을 편곡해 리코더를 불었다. 창피했다.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다. 스무살이 되자, 열일곱 살에 느꼈던 박탈감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꿈같은 대학에 입학하려고 하자, 엄청난 등록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었다.

높은 서울 생활 물가는 자꾸만 나의 가계부를 들여다보게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서울에서 내 몸 하나 누일 방의 월세와 학교 식당 중심의 식단, 몇 차례의 문화생활을 하려면 한 달에 최소 1백만 원은 필요했다. 어떻게든 생활비를 줄여보려고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최저 시급은 달랑 몇백 원씩 올랐고 서울 물가는 자꾸만 치솟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전셋집을 구하고 넉넉한 용돈을 받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다. 20대가 되었으니 하루빨리 독립을 해야 할 것도 같은데 당장 학교는 다녀야했고, 하고 싶은 작업은 산더미였다. 그런데 주변에서 모두 취업 준비를 하니 나도 왠지 영어 점수는 하나 따놓아야 할 것만 같았다. 언론 고시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압박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매일 아침 만원 버스에 몸을 실을 자신은 없었다. 매일같이 야근한다는 방송국 조연출 생활 역시 그랬다. ‘OOO 신입 사원 연봉’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돈을 부러워했지만 그 일을 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장 먼저 하기로 했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 먹고살 만큼만 벌고 적게 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여행이 세상의 가장 큰 학교이자 배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일같이 여행에 모든 돈을 쏟아 붓는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공무원이
되라고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돈이 없으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종종 기성세대들은 이런저런 세대론을 들먹이며 너희들은 왜 나라가 엉망진창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며 20대 개새끼론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미안하지만 나/우리는 당신들처럼 거리에 나가 화염병을 던지고 짱돌을 던질 수 없다. 일단 그런 시대는 지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또한 윗세대들로부터 그런 것들을 배운 적도 없다. 마땅한 롤모델도 없었고 닮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무한경쟁체제에 단련된 우리들은 연대의 경험이 없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좌초되고 탈락된다는 것만을 배웠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헬조선’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이 사회가 진정 어딘가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는 것,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말해내는 것이다. 나/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밀어내는 데 써왔다. 경쟁의 시간들이 청춘을 갉아먹었고, 아름다운 시간들은 그렇게 추악하게 지나갔다. 나는 나의 남은 청춘을 그렇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밀어내며 성공하기보단 사랑하며 같이 살아낼 것이고,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해도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아름답게 살 것이다. 여전히 나에게 롤모델은 없고, 닮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갈 곳이 없어서, 어쩌면 정말로 다행이다.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에디터
    글 / 이길보라(1990년생, 영화 감독)
    포토그래퍼
    이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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