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두려움 그 자체를 에너지로 삼아요”

여름의 한가운데, 이정재는 쏟아지는 햇빛과 물그림자 그리고 흰 시트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턱시도 셔츠는 톰 포드, 목걸이는 자신의 것
턱시도 셔츠는 톰 포드, 목걸이는 자신의 것.

<도둑들> 이후로 계속 바쁘게 달리고 있어요. <신세계>, <관상>, <암살>, <인천상륙작전>…. <신과 함께>는 지난 3월 촬영을 마쳤고 곧 <대립군>이 개봉하죠. 시간을 잘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목표에 맞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할애하려고 노력해요. <대립군>은 더울 때부터 추울 때까지 밥차도 못 올라가는 산등성이에서 고생을 많이 했죠. 하하.

<대립군>은 공교롭게도 최근 정세와 맞닿은 지점이 많은 영화던데요. 무능한 왕은 나라를 버리고, 국민들은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어린 왕을 만나죠. 조선시대 이야긴데 공감되는 점이 많아요. 영화를 찍을 무렵엔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 정도였는데 지금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더 많아졌죠. 2016년과 2017년의 시대성이 많이 반영된 이야기예요. 이정재가 이렇게 현시대를 반영하는 영화를 해본 적은 없었잖아요. 그런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싶어요.

시의성은 확실히 있네요. 그렇죠. 한참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촬영했는데, 콜 타임이 새벽 4시라 저녁 8시엔 자야 했거든요. 국정농단이니 탄핵이니 봐야 할 뉴스가 너무 많은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려니 죽을 맛이었어요. 하하.

대선 투표는 잘했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대립군>은 좋은 군주에 대해 말하는 영화죠. 이정재가 생각하는 좋은 군주상은 어떤 것인가요? 가져야 할 덕목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겠죠.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사회 속 수많은 계층, 수많은 연령대, 다양한 국민 구석구석에 관심을 갖고, 세밀하게 눈높이를 맞춰줄 수 있는 능력이에요. 국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면 좋겠죠. 예나 지금이나 이런 군주가 좋은 군주라고 생각해요.

여태까지와는 다른 역할에 도전했죠. 천민 출신으로 거칠고 야성적인 인물, 대립군의 수장 토우를 맡았어요. 25년간 연기를 하면서 제 안에 있는 감성, 연기, 많은 걸 이미 보여드렸잖아요.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욕심이 아직도 있어요. <대립군>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토우라는 인물은 선이 굵은 배우가 맡으면 더 잘 어울리겠다 싶기도 했지만, 내 나름대로 이 새로운 인물을 소화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지닌 배우 이정재가 맡아온 역할 중 가장 이질적인 역할이 아니었나 싶어요. 체화해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음, 사실 전 이렇게 되묻고 싶어지네요. 저도 일반 시민일 뿐인데, 그게 왜 어려웠을 것 같나요? 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티셔츠, 팬츠, 선글라스는 모두 톰 포드, 로브 재킷은 하이더아크만.
티셔츠, 팬츠, 선글라스는 모두 톰 포드, 로브 재킷은 하이더아크만.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네요. 한 지인이 “너는 가장 약자인 직업군을 가지고 있다, 밥집에서 반찬 한번 더 얻어먹는 것 말곤 좋은 게 뭐가 있냐”고 하더라고요. 배우도 을이에요.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이죠.

25년간 배우 ‘이정재’로 살아왔는데도,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특권의식 같은 게 없군요. 전혀요.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선입견이죠. 물론, 그렇게 보는 시선들도 이해는 해요. 하지만 정말 다를 건 없어요. 공개된 장소에 잘 나가지 못하는 정도죠.

배우로서의 이정재와 생활인, 자연인으로서의 이정재 사이에도 갭이 없나요? 거의 없어요. 물론 조심해서 사는 건 없지 않아 있겠죠. 내 주관대로만 살다 보면 오해나 구설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면 주위 분들이 피곤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전 늘 나 자신으로 산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제 일말의 편견을 버리고, 다시 토우로 돌아가볼까요. 어떻게 그 캐릭터를 이해하고 체화해냈나요? 정서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비하인드 스토리를 생각해봤어요. 토우는 어디서 왔을까. 아마 국가에서 국경을 지키라고 강제 이주를 시켰을 것이고, 남부 지방에서 올라왔을 것 같고, 부모님과 여동생 같은 딸린 식솔이 있었을 테지만 가난한 집으론 아무도 시집을 안 오니 결혼은 못했을 거고, 타지인이라 변변한 일자리도 못 얻었을 테고, 거처도 없고…. 그런 상상들을 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생각했군요. 그래야 캐릭터를 깊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 캐릭터의 전사를 많이 생각하는 편이에요. <암살>의 염석진, <도둑들>의 뽀빠이, <신세계>의 이자성도 많은 전사를 상상했죠.

토우와 반대로, 최근 맡은 캐릭터들을 보면 수양대군, 염석진, 뽀빠이처럼 악역이 많아요. 냉혹하거나 위태롭거나 어딘가 약간은 뒤틀려 있는 인물이 많았죠. 냉혹해 보이지만 욕망만큼은 뜨거운 인물들이죠. 이유 있는 악역들이었어요. 전 이런 캐릭터들이 좋아요. 특히 <암살>의 염석진은 저도 최동훈 감독님도 애착이 큰 인물이죠. 대개 영화 속에선 일제강점기의 독립군만 다루지만, 한편으론 목숨을 구걸하면서 살았던 조선인도 있었을 거잖아요. 저는 염석진이 멋있거나 영웅이거나 좋은 인물은 아니라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그 역시 우리 모습의 일부인데, 우리는 늘 이런 인물들은 외면하죠. 하지만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런 모습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할 필요가 있어요. 이유 있는 악역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동의해요. 단순히 우직하고 정의로운 주인공보다 그 옆에 있는 살짝 꼬여 있고 비틀려 있는 친구가 더 눈이 가죠. <태양은 없다>의 홍기처럼요. 그런 캐릭터들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훨씬 넓으니까 오히려 연기하기 좋죠.

수트, 셔츠, 베스트, 슈즈는 모두 구찌.
수트, 셔츠, 베스트, 슈즈는 모두 구찌.

널찍한 스위트룸에서 사진을 찍을 새로운 장소를 찾고 있을 때, 이정재는 좁은 세면대 위에 앉았다. “여기면 충분하겠는데요?” 맞았다. 거울과 거울을 마주 보는 이정재면 충분했다.

이번 영화에선 “절벽을 등지고 싸우는 자는 이길 수 없다”라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이정재에게도 그런 절벽 같은 두려움이 있나요? 있죠, 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작품을 선택할 때부터 오는 두려움이네요. 이 영화를 할까, 말까. 내가 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같은 고민과 두려움들이 같이 따라요. 개봉을 앞둔 상황에선 관객들이 우리 영화를 어떻게 봐 주실까, 하는 두려움. 사실 배우들에겐 그런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있어요.

그다음에 떠오르는 두려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은퇴 시기를 알 수 없는 데 대한 두려움이랄까. 배우에겐 “당신 해고야”라는 통보를 안 해주잖아요? 나중에야 느껴요. “아, 나 작년에 잘린 거였구나.” 이렇게 말이죠. 알려만 줘도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겠구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면서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데 이 일은 그럴 수가 없죠. 뒤늦게 해고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렵네요. 하하.

그런 두려움을 등지고 매번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를 계속해나가는 원동력이 있나요? 두려움 그 자체를 에너지로 삼아요. 대중의 사랑과 두려움은 하나로 맞닿아 있으니까요. 제 성격이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시도하는 성향이기도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팬들. 뻔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팬들의 응원이 정말 큰 힘이 돼요. 저를 믿고 역할을 맡겨주신 제작자와 감독님들에 대한 책임감도 스스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고요.

그간 송강호, 최민식, 황정민 등 주로 선배들과 호흡을 맞춰왔는데 이번엔 스물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후배 여진구와 호흡을 맞췄어요. 여진구 씨는 지금 말씀한 그 선배님들 계보 선상에 있는 배우인 것 같아요. 일을 사랑하는 훌륭한 배우죠. 젊은 나이면 호기심도 많고 그 호기심 때문에 시간을 다른 데 쓸 법도 한데 일하는 데만 푹 빠져 있어요. 대단하죠. 하하. 나이 차가 많이 난다고 해도 동료 배우이기 때문에 호흡을 맞추는 데 여태까지와 별 차이는 없었고요. 그리고 전 후배라 해도 상대 배우의 연기를 존중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조언도 하지 않는 편이에요. 꼰대가 되긴 싫거든요.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죠.

친구이기도 한 배우 정우성과 매니지먼트 아티스트 컴퍼니를 만들어 운영 중이죠? 네. 아주, 매우, 굉장히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같은 배우니까 서로의 고충이나 상황, 마음을 너무 잘 알죠. 회사라기보단 동아리 같아요. 별일이 없어도 나와서 자장면 시켜 먹고, 김밥 나눠 먹고, 수다 떨고 그러죠.

배우를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매니지먼트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지려는 의도도 있죠. 하하. 아무리 친해도 바쁘면 일 년에 한두 번 모이기도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지금 회사를 하다 보니 김의성 선배, 배성우 선배, 고아라 씨, 이솜 씨, 다들 자주 보고 이야기와 고민들을 공유하면서 최선의 답을 함께 찾아갈 수 있으니까 정말 즐거워요.

이번엔 영화 제작에 처음 도전하죠? 정지우 감독님의 <남산>이란 스파이물이에요. 소재에 꽂혔고, 기획도 재미있었죠. 아주 멋진 영화가 나올 것 같아서 제작과 출연을 겸하게 됐어요.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 버전의 각색고도 썼어요.

니트와 셔츠, 청바지는 모두 구찌, 로퍼는 루부탱.
니트와 셔츠, 청바지는 모두 구찌, 로퍼는 루부탱.

각색까지요? 전에도 글을 쓴 적 있나요? 전에도 시놉시스는 여러 번 썼는데 시나리오는 처음이에요. 감독님이 정해지기 전, 원작과는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만들어봐도 재미있겠다 싶어 직접 써봤죠. 이제 감독이 정해졌으니, 원작과 제 버전과 정지우 감독님 버전의 각색고를 놓고 다시 흔들어보려 해요.

이전에 구상한 시놉시스는 어떤 이야기인지 심히 궁금해지네요. 음… 인터뷰에선 처음 말하는 것 같은데, 하나 얘기해볼게요. 스무 페이지 정도의 트리트먼트였는데 시기를 놓쳐서 엎은 작품이 하나 있어요. 시리아를 배경으로, 북한 외교관 출신의 무기상 남자와 의료 자원봉사를 간 남한 여자의 이야기예요. 5년도 더 된 얘긴데, 당시엔 시리아가 북한하고만 수교를 맺고 있었어요. 내전 상황에 남자와 여자가 휘말리고, 둘 사이에선 사랑이 싹터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남자가 여자를 구하며 희생하죠. 원래 겁 많고 소극적이었던 여자가 남자의 희생을 겪고 변화한다는 이야기예요.

전쟁 영화 같지만, 로맨스군요. 네, 멜로예요.

흥미롭네요.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요? 영화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사를 편집하는 감각이 있어요. 뉴스나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면 다른 이야기가 섞였을 때 어떤 화학작용이 생길지 생각해보게 되죠. 그렇게 신 몇 개가 연관성을 갖게 되고 그 사이에 또 다른 신이 들어가면 트리트먼트까지 나와요. 투자 배급사까지 붙은 상황이었는데, 시리아 상황이 좋지 않게 돼서 엎어졌어요. 그때 들어갔어야 하는데.

제작자로서 혹은 작가로서 계속 활동할 계획인가요? 저는 배우, 제작자, 작가처럼 영역을 구분 짓는 것에 회의적이에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크게 봐야죠. 연출자가 연기를 할 수도 있고, 각본만 쓸 수도 있고, 동료 영화를 프로듀싱할 수도 있는 거죠. 배우도 마찬가지예요. 저처럼 각색과 제작을 겸할 수도 있고, 하정우 씨처럼 연출을 할 수도 있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상황에 맞춰서 포지션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에도 더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티셔츠와 선글라스는 모두 톰 포드, 로브 재킷은 하이더아크만
티셔츠와 선글라스는 모두 톰 포드, 로브 재킷은 하이더아크만.

연기뿐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애정이 깊네요. 십 대 때부터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을 사랑한 소년이었으니까요. 영화는 보는 것도 연기하는 것도 만드는 것도 즐겁죠.

<신세계>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들이 있었죠. 그렇다면 이정재의 제3의 전성기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 아유, 모르겠어요. 그런 날이 올까요? 언제 해고당할지도 모르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배우는 비정규직이에요.

그래서 이제 제작자로서의 활동도…. 애니메이션 시놉시스도 하나 있긴 해요. 우선 <남산>이 잘 되어야겠죠? 제작자도 비정규직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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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피처 에디터] 영화와 시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