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어디로 가는가

왜 아무도 <옥자>가 별로라고 말하지 않을까?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그리고 봉준호는 어디로 가고 있나.

봉준호는 어디로 가는가.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이 복도형 아파트를 빙글빙글 돌고, <살인의 추억>의 두만이 논밭을 엎치락뒤치락하고, <괴물>의 강두가 한강 둔치를 구르고, <마더>의 엄마가 관광버스 안에서 넋 나간 춤을 출 때, 그의 영화 속 모든 순간들은 동시대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좌표에 정확하게 발을 딛고 있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경찰들이 시위 진압에 동원되는 통에 살인자를 잡을 인력이 없었고, DNA를 대조할 기술이 없어 미국의 통지서 한 장에 의존했으며, <괴물>에서는 미군의 독극물 방류로 괴물이 탄생했다. 전작들에 비해 <마더>가 덜 정치적인 영화였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죄로 몸을 팔아 쌀을 사는 소녀와 농약을 마셔 지적장애인이 된 청년은 창녀와 바보라는 오인된 호명 속에 비극을 낳는다.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세계 속 가난은 구제될 수 없는 원죄인 셈이다. 봉준호 감독의 장르성과 지역정치학적 맥락 사이의 충돌과 긴장은 기묘하면서도 번뜩이는 통찰을 빚어냈고,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환대 받았다. 멀고 먼 나라의 죠스도 킹콩도 아닌 ‘서울,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다’라는 기막힌 장르영화가 천만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 봉준호 감독이 할리우드의 호출을 받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리우드로 간 그는 지역성을 제거하고 허공에서 시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먼 미래의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인간들을 싣고 달리는 설국열차에서 말이다. 우화적인 이 이야기는 여러 층위에서 알레고리를 동원해 정치적인 관점을 부여한 전작들과는 달리 계급사회를 시각화한 매우 직접적인 메타포를 사용했고, 전복과 반란, 무정부주의로 치닫는다. 이 SF영화는 직설적이고 단순했지만, 꼬리칸부터 최상위칸까지 질주하고 기차를 전복시켜버리는 봉준호의 야심과 패기만큼은 미더운 작품이었다. 할리우드 대형 자본으로 이 정도 사이즈의 장르영화를 만들어낸 데 대한 쾌감도 물론 있었다. <설국열차>에서 다소 미진하게 느껴진 작가적 개성에 대한 아쉬움과 기대감은 오롯이 차기작 <옥자>에 쏠렸다. 와인스타인 컴퍼니와는 달리 배급사의 외압도, 편집권 행사도 없다는 새로운 플랫폼, 넷플릭스 제작이기에 그 기대는 더 커졌다.

개봉까지도 부침과 드라마가 있었다. 대형 극장 체인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와 동시 개봉하기를 거부했다. <옥자>는 멀티플렉스가 아닌 극장과 독립예술영화전용관 등 약 100개 스크린을 확보했고, 그 안에서도 유의미한 관객 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이는 다양성 영화 사이에서의 또 다른 독과점이라는 문제도 낳았으나 중소 극장의 재발견에 기여하며 한국영화산업 생태계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공장형 사육과 비인도적 도축에 대한 문제의식도 대두시켰다. 봉준호라는 우리가 사랑해온 감독이 해외 대형 자본으로 만들어내 새로운 플랫폼에서 선보인, 주제조차 선량한 이 영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들이 안팎으로 쏟아졌다.

그렇다면 외적인 맥락을 제거한 영화 <옥자>는 어떤가? 주제부터 봉준호의 인장은 뚜렷한데, 정작 장르와 지역정치학적 통찰과의 기묘한 공생, 오작동된 블랙유머… 그의 장기들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지역성이라는 좌표를 제거하고 허공에서 시작하는 공상적인 SF인 <설국열차>가 나았다. <옥자> 속 한국은 도무지 한국 같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은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항의 구조로 환원됐으며, 그 속에서 일차원적이고 과장된 캐릭터들이 라이브 쇼를 진행하듯 극을 끌어나갔다. 이전까지 봉준호 영화 속 연출자의 시각은 언제나 좌표 값을 매길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고 날카로웠으나, <옥자>에서는 이상한 혼종으로 뒤섞인 모습이었다. 한국은 미국에서 보는 신비롭고 환경 친화적인 동양의 한 나라였고, 미국은 제 3세계에서 보는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였는데, 연출자의 시선은 어느 쪽을 향하는지 알 수 없게끔 그 모두를 대상화하고 있었다.

편의적으로 대상화된 건 지역성뿐 아니다. 옥자는 지능이 높고 인간과의 교감 능력이 뛰어나며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동물이기에, 우리는 당연하게도 옥자를 고기가 아닌 친구로 보게 된다. 사실상 의인화에 가까운 모습이다. 동물은 꼭 인간과 교감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개체여야만 생명권을 존중 받을 수 있는 걸까? 인간적인 개체의 생명권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것 또한 인간의 오만은 아닐까? 하나 이상의 특성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도 대상화되긴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보조자, 악당, 뜬금없이 비정규직에 대한 애환을 풀고 지나가는 캐릭터까지 납작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연기를 시작하자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움직이다 역할이 끝나면 퇴장했다. 물론, 어느 하나도 진짜 같지는 않았다.

동시대 한국이라는 시대성과 지역성이라는 중력을 잃어버린 한국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는 단순한 동화처럼 쉽게 흘러갔다. <옥자>는 착한 영화, 대중적인 영화라는 말만으로 피해갈 수 없는 나이브한 영화다. 공장형 사육과 도축의 끔찍함, 자연과 인간의 공생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건 환영할 일이나, 나는 영화로 직설적인 메시지를 전달 받기보단 먼저 영화를 보는 즐거움부터 누리고 싶다. 봉준호 감독은 내년 상반기 송강호와 함께 하는 한국영화 <기생충>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옥자>에 대한 많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봉준호 감독에게 또 다른 기대를 걸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의 전작들에 대한 추억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