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의 홍상수에 대한 찬반론

홍상수의 새 영화 <그 후>에는 누가 봐도 ‘그 사건 이후’의 삶이 들어가 있다. 홍상수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교묘히 합리화하려는 감독인가, 아니면 사적인 삶을 예술에 성찰적으로 반영해 진화하고 있는 감독인가? 여기, 두 남자가 같은 지점을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홍상수에 반대한다

홍상수의 신작 <그 후>에서 ‘그 후’는 무엇을 뜻할까. 여러 해석을 할 수 있지만, 대뜸 떠오르는 건 세상에 화제를 일으킨 ‘스캔들 그 후’다. <그 후>에는 기시감을 일으키는 장면이 넘쳐난다. 가령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과 직원 창숙(김새벽)의 외도란 큰 소재가 그렇다.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진 여배우 이야기인 전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의 공통점인데, <그 후>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그 후’ 그러니까 속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외도하는 여자의 이야기라면, <그 후>는 외도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전자는 여자가 책을 받으며 끝났다면 후자는 남자가 여자에게 책을 주며 끝난다. 남자가 주는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동명 소설 <그 후>다. 이 소설의 제재는 외도이고 남자가 모든 걸 버리고 여자와 결합하며 막을 내린다. 짓궂게 들리겠지만 두 작품을 홍상수 필모그래피에서 ‘외도 2부작’으로 묶을 수도 있겠다. 자신의 작품 활동에 틈입한 사적 사건을 역시 영화로 정리하고 ‘그 후’를 맞겠다는 의지는 아닐까.

두 영화에 관해선 영화와 관계없는 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되는 한편 영화와 관계있는 것이 너무도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 대중은 홍상수와 김민희의 외도를 도덕적으로 심판하며 영화에 침을 뱉고, 평단은 모사 수준으로 재현된 스캔들에 관해 대동 단결하듯 함구했다. 사생활과 창작활동은 별개이니까, 영화 외적인 사건을 비난하는 세상으로부터 영화를 지켜내기 위해 내린 결단일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문제엔 세 층위의 윤리가 있다. ‘배우자를 등지는 외도는 잘못’이란 사적 윤리가 하나고, ‘남의 사적 윤리를 공적으로 비난하는 건 잘못’이란 보편 윤리와 ‘작가의 사생활로 작품을 평가하지 말라’는 비평/관객 윤리다. 셋은 각각 타당하고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홍상수가 자신의 사적 사건을 노골적으로 영화에 끌고 오기 전까진 그랬다. 이 상황에서 비평 윤리를 기계적으로 받들면, 엄연한 영화의 구성물을 못 본 체 하는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의 엑스트라가 되어야 한다. <그 후>에 걸린 윤리적 쟁점은, 영화를 통해 외도를 미화하는 뻔뻔함이 아니라, 자신의 것만이 아닌 사적 사건을 함부로 재현하는 작가의 태도다.

<그 후>에는 의사와 무관하게 반복해서 불려 오는 존재가 있다. 홍상수의 아내(로 연상되는 인물이)다. 봉완의 아내는 외도라는 구도에서 홍상수 아내를 연상케 하는 자리에 있고, 그가 아름(김민희)을 찾아가 따지는 장면은 널리 알려진 스캔들의 한 상황을 거의 재연한다. 재밌는 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외도에 빠진 당사자였던 김민희가 <그 후>에선 외도의 주변인이란 점이다. 봉완의 아내는 아름을 남편의 파트너로 오인한 채 다짜고짜 뺨을 때리고, 두 사람을 “악마들”이라 저주하며 홍상수 특유의 인물 풍자의 대상으로 포섭당한다. 이 모든 모습이 동의되지 않은 채, 동의될 수 없을 방식으로 세상에 전시된다. 그러는 사이 김민희는 콘텍스트의 중력이 소거된 제3자의 자리에서, “사장님 아내가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데요!”라고 콘텍스트가 스며든 메시지를 외친다.

<그 후>는 확실히 장인의 영화다. 약호 없이 빗발치는 플래시백과 흑백 화면의 무시간성은 인과 관계적 인식의 틀에 다공을 뚫고, 현실의 사건과 관계와 이름은 영화 속에 어긋나게 붙여지고 뒤섞이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희롱한다. 홍상수는 널리 알려진 사적 사건을 작품세계에 통합하는 야심을 실현했고, 작가의 자기 반영이 작품을 시시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시연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 후>의 아름다움에 도취하려면, 거기 불려 온 ‘한 사람’을 영화의 구성 요소로 즐기는 한편, 그 사람의 실재함을 외면하고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 이건 사적 사건을 처리하는 공모자로 관객을 끌어들이며 ‘그 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상황은 더 이상 예술과 분리된 감독의 사생활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비평가 세르주 다네는 “우리 자리가 있지 않는 곳에 자리 잡아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재현의 윤리에 관한 격언을 남겼다. 영화는 현실을 다른 현실로 구성해 보여주고, 무언가의 형상을 스크린에 빚어내는 재현의 연금술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그의 현실을 대신해 보여줄 자격과 권한이 없는 타자를 분별하고 침묵하는 일이 엄중한 것이다. <그 후>에서는 무언가가 질 나쁜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곧 이 영화의 나쁜 점이다. 윤광은(영화비평객)

홍상수에 찬성한다

대체 홍상수에게 김민희란 무엇일까. 홍상수의 신작 <그 후>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도대체 김민희가 무엇이길래 홍상수로 하여금 이전엔 쓰지 않았던 영화적 요소 혹은 태도들을 적잖이 끌어들이게 한 것일까. 혹은 김민희가 무엇이길래 홍상수로 하여금 거의 발칙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영화와 현실 간의 경계를 걷게 한 걸까. 어쩌면 이야말로 지금 변화하고 있는 홍상수 세계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질문을 떠올리고서 다른 결론을 향하는 이들이 있다.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반응; 하나는 홍상수가 비윤리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홍상수의 세계가 황폐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홍상수가 비윤리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주장의 저변에는 홍상수가 김민희와 자신의 외도를 극적 요소로서 노골적으로 극 안에 끌어들이며 그 자신의 가족들을 괴롭게 했다는 판단이 깔려있을 것이다. 더 이상 ‘인간’ 홍상수와 ‘예술가’ 홍상수를 완전히 별개로 나눠서 보기 힘들다는 것도 긍정하나, 이것이 영화의 재현 윤리에 접촉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엔 수긍하기 힘들다. 이는 잔혹함과 천박함을 헷갈린 사고로 보인다. ‘홍상수의 가족들이 영화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가 ‘홍상수의 영화는 비윤리적이다’라는 주장의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홍상수가 영화에서 (실제와는 다르게?) 그 자신의 가족들을 악마적으로 묘사하고 그들을 부정하는 결론을 향했다면 모르겠으나, 김민희와 자신의 관계를 영화에 투영한 것만으로도 그의 창작이 영화의 재현 윤리에 어긋난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크다. 아니면 외도를 한 작가에겐 외도를 작품의 소재로 다루면 안 된다는 ‘윤리적 규칙’이 작동하는 것인가? 소재의 선택 자체를 비난하는 파시즘적 태도는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도 해선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홍상수는 영화로 자기변호를 하고 있는가? 혹자는 <그 후>에 폭력을 행사하는 부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을 두고 홍상수가 부인을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외도를 정당화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현실의 스캔들과 영화의 요소들을 일대일로 겹쳐보며 그 중 겹쳐진 부분에만 집착하는 미련한 시각에 불과하다. 이 방식대로라면 중국집에서 창숙(김새벽)이 봉완(권해효)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장면이나, 봉완의 외도가 들통나는 바람에 아름(김민희)이 그의 부인에게 억울하게 얻어맞는 장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오히려 홍상수는 <그 후>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의 일부를 끌어들이며 그에 대한 자아비판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앞에서 말했듯 ‘인간’ 홍상수와 ‘예술가’ 홍상수를 완전히 별개로 나눠 본다는 것은 작금엔 어려운 일이지만, 그가 자신의 외도 경험에 가까이 선 작품을 만드는 것이 곧 비윤리적인 창작이라는 주장은 스스로가 ‘외도’라는 키워드만으로 홍상수를 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세계가 황폐해지고 있다는 주장은 어떤가? 아마 이런 감상은 어떤 곤란함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신경 쓰지 않고 매번 자신의 외양과 방향을 선회하는 작가 앞에서, 매번 그 변화의 궤적을 파악하고 정리하려 애쓰느라 우리가 겪게 되는 그 곤란함. <그 후>는 변화무쌍한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작업의 궤도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곤란함을 선사하는 작품이고, 아마 이것이 일부 관객들로 하여금 홍상수가 황폐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홍상수는 지금 김민희라는 전혀 새로운 ‘태도’와 함께 전혀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한 번만 사용되었던, 대화 도중의 과격한 줌-패닝은 더 격렬하게, 빈번하게 운용되었고,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불신하고 거부하던 그의 세계에 강력한 믿음, 그것도 종교적 믿음을 지닌 ‘이상한’ 인물 아름이 출범했으며, “곱게 죽”기를 희망했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영희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음을 믿”는 아름이 되었고, 주인공은 갑자기 바뀌어버린다. <그 후>에는 새로운 요소를 넘어서 새로운 태도라고 할 수밖에 없는 변인들이 종잡을 수 없이 나타나지만 시간의 배열 속에서 우리를 이야기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끄는 ‘자유로운’ 추동력은 여전하며 ‘믿음’에 관한 대화들은 세계의 표면과 관계하는 홍상수의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스스로가 주인공이 아님을 믿”는다던 아름이 하룻밤의 소란을 거치고 비로소 주인공이 되어, 택시 안에서 ‘우연한’ 눈보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믿음을 되뇔 때, 관객은 아름과 함께 고립무원의 자유를 음미하며 약동할 힘을 얻는다.

<그 후>는 고정된 진리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하던 홍상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변화의 양상에 스스로를 내맡기며, 기억이라는 함정의 존재에서조차 자유로워지기를 추구한 결과다. 그의 세계가 황폐해지고 있다는 평들과는 달리, 홍상수는 김민희와 함께 지금 자신의 한계를 하여튼, 혹은 기꺼이 긍정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대체 홍상수에게 김민희란 무엇일까. <그 후>에 대한 말은, 더 나아가 이 이후 홍상수의 작업에 대한 말은 여기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윤아랑(트위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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