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성당에 담긴 시간

가장 화려한 명동에 있지만 가장 가난한 마음일 때도 주저 없이 갈 수 있는 곳.

서울 명동성당

서울이 고향이 아니기에 명동성당은 스무 살이 넘어서야 자주 찾은 곳이다. 퍽퍽한 서울살이가 힘겨울 때도, 명동을 헤매다 다리가 아플 때도 명동성당은 내게 위로와 쉼을 주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명동성당은 외형도 주변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어쩌면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모습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월의 어느 날, 나는 명동성당에 앉아 그 공간에 담긴 몇 개의 시간을 들춰보았다.

1998년은 명동성당이 완공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몇 달 전 몰아닥친 IMF로 인해 5개의 부실 은행이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여동생과 제부는 퇴출 은행 중 하나인 대동은행의 사내 커플이라 부부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을 상황이었다. 7월의 명동성당, 명동 길에서 이어지는 들머리부터 본당과 꼬스트홀 사이의 너른 광장에까지 5개의 퇴출 은행 노조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검게 그을린 사람들 사이에서 동생네를 찾아 빵과 음료수를 건네고 돌아오는 길, 성당 계단을 내려오다 한번 멈춰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높은 첨탑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가 멀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댈 곳은 그곳뿐이었다.

퇴출 대상 은행 노조가 명동성당에 천막을 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명동성당은 1960년대 제3공화정이 들어선 이후 오랫동안 인권의 상징이었다. 1970년대 유신헌법 철폐와 1980년대 개헌 요구 등의 굵직한 정치사 외에도 명동성당은 인권의 보루였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였다. 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 진압으로 내몰린 시위대가 성당으로 모여들면서 성당은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 현장이 됐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차장이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서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 나서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단호하고도 완고한 말에 의지해 시민과 학생들의 6월 민주항쟁은 계속될 수 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맞은 6월, 그 말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이젠 너무 세련된 공간으로 변해버려 아쉬운 들머리에 접어드니 둥근 황동 표지석이 눈에 띈다. “이곳은 민주화 운동의 피난처이자 둥지다”라고 적혀 있는 이 표지석은 서울시가 2016년 서울 38개소에 마련한 ‘인권현장 표지석’이다. 반갑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여 가만히 손을 대보니 6월의 햇살에 뜨거워진 표지석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30년 전 6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아직 그렇게 뜨거운 곳이다.

2009년 2월 16일 저녁, 우리 부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몇 달 후 닥쳐올 엄청난 상실과 슬픔을 미리 감지라도 한 것처럼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서늘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했다느니 변하지 않았다느니 추기경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여전히 내겐 큰 어른이었다. 사회가 똑바로 서지 않을 때 호되게 꾸짖어주거 나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분이 떠나셨다는 소식에 두려움이 앞섰다. 명동성당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정호승의 시를 기억했다.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중략)/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부\ 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소주를 들이 켜고 눈 위에 라면 박스를 깔고 웅크린/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내려오지 않는다./비둘기처럼」(‘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중)

그 기도하는 손이 그리워질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셨던 걸까? 추기경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추운 저녁이었는데도 성당으로 올라가는 입구부터 인파가 꽤 많았다. 계단 좌우에는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과 글귀가 전시돼있어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하나씩 살피며 성당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본당의 오른편에 있는 꼬스트홀에서 미사와 위령기도가 이어졌다. 기도를 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죽음은 삶 속에 있는 것인데도 마치 다른 곳에서 생겨난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201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꼭 150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가을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간의 종말>이 완성되어 명동성당 본당에서 특별 상영이 있었다. 영화는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가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1830년대로 돌아간다.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곧 인간이 가진 시간의 종말을 의미했다. ‘선생복종(善生福終, 참되게 살다 복되게 마무리한다)’ 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으로 향한 샤스탕 신부를 비롯한 피에르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지 3년 만인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이후 1866년, 아홉 명의 사제와 8천여 명의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당시 새남터에서 시간의 종말을 맞이한 이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그곳에 묻혔다.

마침내 1887년 한불 수교 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양국인이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2년 대한민국 최초의 고딕 양식 성당이자 최초의 벽돌 건축 교회인 명동성당이 착공되어 1898년 완공된다. “한국 순교자들은 43년간 거기에 묻혀 있었고 프랑스 신부들은 33년간 왜고개에 묻혀 있었어요. 건물은 1892년부터 지었으니까 그때부터 거기 흙을 쓰기 시작한 거죠. 한30년 넘게 묻혀있었던 분들이 다 탈골이 됐다면 그분들의 살과 피는 그 땅속에 다 스며들었을텐데 그 흙으로 벽돌을 구웠다는 거죠.”(고찬근 신부)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곳인데 바로 그곳에서 명동성당에 사용할 벽돌을 만들어 구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당 어디엔가 순교했던 이들의 DNA가 남아 있지 않을까? 지금도 본당의 지하 성당에는 1839년 순교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샤스탕, 모방 신부의 유해 일부와 병인박해,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본당을 마주 보고 왼편으로 돌아가면 반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입구가 고해소 겸 지하 묘지다. 살다 보면 미움도 생기고 원망이나 서운함이 쌓여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럴 때 나는 혼자 지하 묘지를 찾는다. 순교자들의 유해 앞에 앉아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죄를 고한 후, 조금 가벼워진 나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

2017년, 이제 명동성당은 하루 종일이라도 시간을 보낼 수는 곳이 되었다. 지하 아케이드는 ‘1898 복합 문화 공간’이란 이름으로 2014년 9월 개장해 유명 카페와 서점, 갤러리, 빵집,식당이 들어서 있다. 널찍한 홀이 있어 착한 도시 농부들의 마켓이나 나눔 장터가 열리기도 한다. 소박했던 옛 모습을 좋아했던 나에겐 아직도 남의 집에 와 있는 듯 조금 불편하고 낯설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명동성당은 그런 곳이 되리라. 세련되면서도 역사가 남아 있는 곳, 가장 화려한 명동에 있지만 가장 가난한 마음일 때도 주저 없이 갈 수 있는 곳. 가끔씩 도시 농부들의 마켓이 열리고 무료 음악회와 전시가 있는 곳. 새로운 이들은 새로운 시간을 그 공간 안에 쌓을 것이다. 그래서 또 의미를 더하고 더하며 시간은 지속될 것이다. 아케이드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유리 지붕 아래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면 유리벽에 정호승의 ‘명동성당’이란 시가 써있다.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돌멩이도 촛불이 되는 곳/촛불이 다시 빵이 되는 곳」 이곳은 본래 그런 곳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성당 맞은편 계단 끝에 서서 푸르게 반짝이는 6월의 소나무를 바라본다. 우리는 이시간에 놓여 있다.

“한국은 “전 국토가 박물관” 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유치’와 ‘개발’ 플래카드 앞에서 과거는 남루할 뿐이고 ‘(문화유산)지정’ 표어가 나붙어도 실은 앞날을 계산하기 바쁜 시절. 번듯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맛집을 골라줄 순 없어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답사해 차라리 호주머니에 넣은 듯이 간직한 개별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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