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삶, 너와집과 굴피집

아직 불을 떼고 바람을 따라 연기가 흘러가는 강원도 산촌 서민의 옛집.

강원도 너와집

‘가옥’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펼쳐지는 풍경이 있다. 나는 그 난데없는 장면이 반복 재생되는 것에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풍경이 완전히 재현되기 전까지 생각을 멈추고 이미지의 줄기를 따라가곤 한다. 가랑비가 안경의 렌즈를 흐려 앞이 멀어지던 날, 강원도 평창의 어느 국도변에서 만난 장면이었다. 짙은 산과 키 큰 옥수수 밭에 옴폭 묻힌 낡고 오래된 집에선 검고 푸른 빛이 났다. 얇고 납작한 청석 조각을 물고기 비늘처럼 맞물려 얹은 지붕 때문이었는데, 겉이 검은 돌은 비 사이로 떨어지는 볕을 받을 때마다 성운처럼 깊고 푸른빛을 일으켰다.

지붕에 이 색을, 이 무게를 올린 집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고추를 곱게도 펴 말리던 주인은 그 자리 위에 급히 일어선 흔적까지 남기고 길을 나선 듯했다. 나는 빈집의 섬돌에 걸터앉아 살림살이로 그를 상상했다. 요강을 부엌 앞에 두고 써야 하는 약하고 작은 움직임이라든가, 노란 농약통마저 반들대도록 닦는 부지런한 손이라든가, 두꺼운 청석을 빨래판으로 삼은 소박함 같은 것들로. 그 마음이 지붕에는 미치지 못한 이유도 생각했다. 한국의 지붕에서 짚, 억새, 굴피, 너와가 끌려 내려오는 긴 세월동안, 작게는 이 지역에서 그 많던 청석 얹은 돌너와 지붕들이 사라지는 시간 동안 그는 왜 이 청석을 거두지 못했을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주제를 고민하는 끝에 이 집의 잔상이 걸린 것은 만나지 못한 그와 듣지 못한 답 때문만은 아니었다. 돌 너와집은 ‘한국의 문화유산’이라는 말이 기대하거나 암시하는 층위 바깥에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두 어절을 조금 더 넓고도 가깝게 사용하고 싶었다. 나는 오래된 집을 좋아하고, 집에서 사람의 온기만큼 결정적인 건축 요소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오래된 집’이 갖는 특별한 무언가를 종종 가늠하곤 한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쓰던 안경이나 지팡이는 현실적인 가치로 따지면 아무것도 아닐테지만, 할아버지를 더할 나위 없이 실제로 느끼는 실체다. 긴 세월 영속되는 가족들을 받아 내는 집도 마찬가지다. 그곳엔 우리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했던 삶의 실체들이 고스란하다. 그것을 자기에게 다가온 만큼만, 자기만의 방식대로 느껴가는 것은 유의미한 경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과 문화와 전통을 받아들이는 내 고유한 회로의 바탕이 될 테니까.

생각이 그렇게 흘러가자 나는 길을 나설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한 번 만난 삼척의 그 옛집 두 채를 다시 찾기 위해. 경기도 포천에 살던 경주 이씨 선조가 약 380년 전 병자호란 당시 피난 와서 지은 너와집(대이리 너와집), 그리고 그 집의 식구가 분가해서 지은 굴피집(대이리 굴피집). 후손들이 대를 이어 지금껏 살고 있는 오래된 집이자, 강원도 산촌의 서민 옛집 형태를 전시용이 아닌 살림집으로 만날 수 있는 드문 집이기도 하다. 나는 이 걸음을 통해서 ‘살아 있는 민속 관람’에 머물렀던 첫 번째 걸음을 지울 수 있었다.

“흙 빚어 구운 게 기와면, 낭구(나무) 쪼개 맨든 건 너와지. 나락 농사짓는 사람들이야 짚으로 지붕 해다 이었다지만 산골에 뭐가 있겠어. 낭구뿐이니 낭구가 지붕에 올라간 거지.” 지붕은 지역의 삶을 이는 것일까, 집의 머리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일까. 이종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산에서 시작했다. 대이리 너와집에 살다 분가해서 지금은 그 앞집에 거주하는 할아버지. 한 가문의 후손들이 새 정착지에서 하나처럼 모여 살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는 이제 마을에 몇 남지 않은 ‘어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어른을 떠나보낸 대이리 너와집의 식구들을 대신해 그 지붕에 얽힌 삶을 전해줄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따라 너와집을 살폈다. 진흙 하나 이기지 않은 지붕 위엔 꼭꼭 포갠 너와가 올라앉았고, 그 위로 눌림돌과 통나무를 올려 지붕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읽을 수 있는 형태나 규칙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나의 눈은 대체 무엇을 더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곧은 흙벽, 그 위의 나무 지붕, 그리고 그 너머의 너울대는 산세 모두가 그저 순리 같기만 해서, 나는 이렇게 세상의 큰 흐름 속에 있다는 것만 막연히 확인할 뿐이었다.

이 집은 무엇일까. 산과 사람은 본래 하나로 살았다는 듯 자기의 자리를 세울 줄 아는 집이건만, 왜 옛집이란 영역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까. 기와집을 적자로 두는 한국 전통 건축은 기와집 속에 한옥을 가뒀고, 서자로 밀려난 초가는 ‘민속’ 혹은 민속마을이라는 ‘관광’의 영역에서 살았던 것 같다. 서민 옛집의 대명사가 된 초가로부터 한 번 더 밀려난 것이 너와집이라 하면 맞을까. 너와는 열외의 집단인 화전민의 지붕이었기 때문에. 보편의 과거가 될 수 없는 민속은 변두리에서 사라지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이종대 할아버지에겐, 마을 바깥의 시선과 구분에 불과한 듯했다. 그에게 집을 물으니 돌아오는 것은 나무 얘기뿐이었다. 지붕을 해 얹는 일은 산촌 남자의 ‘생활의 전제’였고, 그건 나무를 겪고 또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그는 너와 재료를 말하면서 빨리 썩는 소나무가 상수리나무에 미칠 수 없다 했고, 톱으로 자른 나무는 나뭇결이 일어난 사이로 물이 스미기 때문에 너와는 반드시 도끼로쳐서 일구는 것이라 했으며, 오래도록 고생스레 자란 나무는 너와가 잘 일어나지 않으니 빨리 성장한 나무만을 찾아다닌다고도 했다.

너와의 수명은 5년이어서, 그들에겐 ‘산에서 나무를 쪼개고 말려 지게호 70~80번 져 날라야 하는 봄’이 5년에 한 번씩 왔다고 했다. ‘너와집 하나를 지으려면 산 하나를 깎아 먹어야 한다’는 말과 나란한 봄이기도 했다. 그는 손이 많이 가는 굴피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굴참낭구 껍질을 뱃긴 기라. 처서쯤 돼서 낭구에 물올랐을 때 뱃겨야지, 그때 아님 안 뱃겨져. 그걸 뒤잡아서 지붕에 올리면 빗물 떨쟈도 또르르 구르지. 근데 어린 낭구 껍질은 얇아 못써. 20년, 30년은 된 놈만 쓰지. 같은 낭구 껍질이라도 젤 첨 뱃긴 건 개고와(가벼워). 두 번째, 세 번째 껍질부터는 무겁지만. 등짐 지기엔 첨 뱃긴 게 나아도 그놈은 까딱하면 깨지니까 잘써야 하겠지.”

“그마이(그만큼) 껍질을 뱃겨도 안 죽는 낭구가 굴참낭구라”를 두어 번 반복하며 말을 맺은 할아버지. 그는 그 후렴 같은 말을 읊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몸의 껍질을 내어주고 새 살을 채워가는 3년간 굴참나무가 생각하던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너와와 굴피 채취가 이제 법으로 금지된 지금, 나무를 잊고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산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머릿속에 지붕과 나무와 산이 그렇게 지나간 뒤에야, 나는 너와집 안으로 들어설 용기를 냈다. 창문이 없는 집은 여름 낮에도 어두웠고, 굴뚝 역할을 하는 천장의 까치구멍만이 희미 한 빛을 들여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방치된 살림살이의 쇠락한 기운은 선연했다. 널브러진 식기와 손 가는 대로 쌓은 종이박스, 그리고 먼지 덮인 낡은 플라스틱 용기들.

지적 장애가 있는 이연학 할머니가 자신을 닮아 아픈 두 아들과 사는 집이라 했다. 질서와 의지가 무너진 그 공간을 살피는 것은 생활이 힘에 부치는 할머니의 속을 파헤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곳을 곧이 오래 뜯어보지 못했다. 길을 잃은 눈이 서까래와 대들보며 벽까지 뒤덮은 그을음을 훑어가는 동안, 이웃집의 김인옥 할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화목 때니까는 도색한 것처럼 천장에 그을음이 반들반들하잖아. 그러니 고 위로 눈비가 와도 묻어나질 않아서 지붕이 그리 오래갔어. 무엇이건 다 소용이 있는 법이지.”

그을음은 산촌의 삶이 흘러가고 있는 흔적이었다. 대이리 굴피집에 사는 김길여 할머니는 고콜 얘기부터 서둘렀다. 산간지방의 방 한 귀퉁이에 원통형으로 묻은 일종의 벽난로다. “여기다 솔가지 더덕더덕 때면 밝기도 엄청 밝고, 또 요 안에 있는 흙이 달아가지고 따숩기도 엄청 따숴. 불 때면 기둥 따라 연기가 쭉 올라가서 부엌으로 나가지.”

환선굴 초입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그는 매순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 불이다. 모든 것을 꺼뜨려 가는 듯한 대이리 너와집과는 달리, 대이리 굴피집 부엌에선 매일같이 몇백 명의 끼니를 일구고 있었다. 음식이건 감정이건, 혹은 근력이건 무언가가 왕성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공간은 달랐다.

바쁘게 음식을 장만하던 그는 굴피집 한 구석의 화티도 보여줬다. “잉걸불 많이 나오면 화티에다 묻었어. 재를 우에다 퍼부어놓으면 불이 3~4일씩 살아 있어. 옛날엔 집집마다 그 불씨를 절대 꺼뜨리는 법이 없었다고. 그 불로 담날 또 밥하고 구들 때고….” 춥고 험한 산간지방의 옛집에 불, 온기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외양간을 방, 부엌과 나란히 한 지붕 아래 들여 가축의 온기를 나누려 했을까. 두 칸짜리 작은 집엔 대가족 열댓 명의 입김과 소 너댓 마리의 숨이 섞였을 테고, 누우면 너와 틈으로 언뜻언뜻 뵈는 하늘에서 함박 눈이 쏟아질 때도 그들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떨지 않았을 테다.

나는 그가 담아주는 산채비빔밥 한 그릇을 받고 그 집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곳에 새겨진 오래된 날들을 되짚어 오른다. 작은 방문 탓에 농을 넣을 수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벽에 못을 한 개 더 박던 그날, 어머니에겐 어떤 마음이 지나갔을까. 좁은 방과 많은 식구로 고심하다 외양간에 벽을 쌓고 장판을 깔아 결국 그 위로 아이를 뉘던 밤, 아버지의 새벽은 또 어떻게 졌을까. 씨앗 하나 배기지 않는 땅에 불을 놓아 북실북실 올라오는 고사리를 처음으로 캐던 날의 부엌은, 그리고 고콜의 환한 불아래에서 아이들은 한문을 쓰고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할머니는 삼베를 삼던 겨울의 방은 누구의 가슴에 무엇으로 살아 있을까. 지나고서야 문득 조금씩 밝아지는 어제, 그것이 있어 기울지 않는 300년 된 집 위로 마르지 않는바람이 분다.

“한국은 “전 국토가 박물관” 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유치’와 ‘개발’ 플래카드 앞에서 과거는 남루할 뿐이고 ‘(문화유산)지정’ 표어가 나붙어도 실은 앞날을 계산하기 바쁜 시절. 번듯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맛집을 골라줄 순 없어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답사해 차라리 호주머니에 넣은 듯이 간직한 개별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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