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음사에서 빈 소원

한라산을 오르는 산록도로의 초입에서 나는 같은 소원을 빌었다.

제주 관음사
제주 관음사

그해 우리는 제주로 떠났다. 그녀는 나와 함께 일출을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일몰의 풍경이 아름다울 것이라 말했다. 늦은 밤 도착한 첫날과 고단했던 이튿날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시내에서 머문 세 번째 날을 보내고 나자 우리에게 일출이나 일몰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하루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날은 진종일 짙은 안개와 강한 비가 이어졌다. 일출을 볼 수 있는 섬의 동쪽이나 일몰을 볼 수 있는 섬의 서쪽으로 가는 길이 그리 멀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미뤄두었던 지난 여정이 후회스러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맞춰 일출의 명소인 성산과 일몰의 명소인 수월봉에 가보았다. 하지만 뿌옇게 날이 밝아졌다가 낙조 없이 어둠이 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로가 원한 풍경을 보지 못한 채 섬을 떠난 것이,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쓰였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서로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금 길게 통화를 했다. 여행을 복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제일 좋았던 여행지를 하나씩 꼽아보기로 했는데 우리의 대답은 같았다. 관음사觀音寺.

돌아보면 서울에서도 우리는 가끔 약속 장소를 절로 잡곤 했다. 종로의 조계사나 성북동의 길상사, 강남의 봉은사 등에서 자주 만났다. 소란스럽지 않게 행동하고 법당의 중앙문 대신 양쪽의 문을 이용하고 스님들의 수행 공간 근처로는 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예의만 지키면 절은 참 머물기 좋은 곳이다. 유명하다는 관광지들을 두고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관음사로 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관음사는 제주에서 한라산으로 오르는 산록도로의 초입에 있다. 제주공항에서 차를 타고 이십 분 가량이면 도착하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오름을 비롯한 제주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중산간 지역에 자리한다. 절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일주문을 지나자 곧은 삼나무와 시간의 흔적을 견딘 석불이 절의 두 번째 문에 해당하는 천왕문까지 일렬로도열해 있다. 석불의 수를 세어보니 한 줄에 54개씩 해서 모두 108개다. 같은 듯하지만 모두 조금씩 다른 표정의 석불들. 이것은 불가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숫자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우리가 감각하고 또 마음먹는 것으로 빚어내는 번뇌의 수가 바로 108개라고 한다. 108번 절을 해도, 108개의 알로  만든 염주를 굴려봐도, 108번 울리는 종소리를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번뇌들.

관음사로 들어서며 이런 것들을 그녀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하게 걷는 것이 더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삼나무에 대해서는 짧게 이야기를 꺼냈다. “오동나무나 소나무로 만든 관棺은 비교적 값이 나가. 나는 죽으면 삼나무 관에 들어가고 싶어. 어차피 타서 사라져 버리는 것인데, 뭐. 그래도 다행인 것 같아. 어느 깊은 숲에서 잘 자란 나무 한 그루와 또 함께 살던 사람들의 슬픔 속에 우리의 끝이 자리하니까.”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우리는 곧이어 작은 석굴로 들어갔다. 관음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인 고려시대에서 시작되지만 조선 숙종 때, 억불 정책으로 모두 불타 없어진다. 그러던 것이 1908년 해월당이라는 스님에 의해 다시창건된다. 우리가 들어간 작은 석굴은 해월당 스님이 6년여 간 수행을 한 곳이라 했다.

하지만 관음사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4.3항쟁의 격전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무차별적이고 잔인무도한 폭력은 당시 제주 인구 1/9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의 무고한 도민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어떤 마을들에서는 몰살에 가까운 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중략)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 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현기영, <순이삼촌> 중)

석굴을 지나자 작은 연못이 보이고 대웅전 등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1968년 이후 복원된 것이다. 우리를 보고 백구 두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절집의 개들답게 눈매가 선하다. 이후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해 절을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가장 먼저 해남 대흥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옮겨왔다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을 보러 대웅전으로 향했고 그녀는 언덕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미륵불로 향했다.

내가 절에 가서 비는 것은 한 가지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불상 앞에서 아무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 여기에는 욕망을 줄여 마음과 몸을 간소하게 살고 싶다는 뜻도 있지만 ‘아무것도 빌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큰 욕심도 있다.

대웅전에서 나온 나는 바로 옆 지장전을 둘러보았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저 멀리 있는 미륵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빌고 있는 듯했다. 어떤 내용의 기도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왠지 알 것만도 같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우리는 그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연의 끝을 보았다. 이별 후에는 그해 제주의 여정을 생각하며 시도 한 편 썼다.

“산간에 들어서야 안개는 빛과 나에게 품을 내어주었다 서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홍 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 오래전 큰 병이 돌았고 해안으로 가면 사람들이 사람들을 죽인 곳도 있다 마을로 드는 길에서도 당신은신록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사실 꽃 지고열매 맺힌 이 길을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수국水菊이 피어 있었고 다른 한 번은 눈이 내렸다 근처에 넓은 비자나무 숲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나의 무렵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당신의 걸음은 빠르기만 했다.” (‘오름’ 전문)

몇 년쯤 지나 다시 제주를 찾았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늦은 반성이라도 하듯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매일 일출과 일몰을 보았다. 다행히 매번 맑은 날이 이어졌다. 신기한 것은 가만히 보면 볼수록 일출과 일몰의 두 장면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첫인사의 안녕과 끝인사의 안녕이 그러하듯이. 일부러 꺼내 보이지 않아도 더없이 말갛던 그해 너의 얼굴과 굳이 숨기지 않고 마음껏 발개지던 그해 나의 얼굴이 서로 닮아 있었던 것처럼.

관음사에도 다시 찾아갔다. 더없이 소박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관음사는 조금 변한 모습이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으로 향하는 불상 아래에는 LED 조명이 놓여 있었고 절의 건물들은 주황색 기와를 새로 올리고 단청도 다시 칠한 듯했다. 그해 우리를 반겨주었던 두 마리의 백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곳 관음사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빌었던 말은 여전히 같은 것이었다.

“한국은 “전 국토가 박물관” 이라던 유홍준 교수의 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유치’와 ‘개발’ 플래카드 앞에서 과거는 남루할 뿐이고 ‘(문화유산)지정’ 표어가 나붙어도 실은 앞날을 계산하기 바쁜 시절. 번듯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맛집을 골라줄 순 없어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답사해 차라리 호주머니에 넣은 듯이 간직한 개별의 문화유산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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