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비평은 가능할까?

사진 비평은 가능할까? 기어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을 건드리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비평일 수 있을까?

대학원을 수료하고 하릴없이 놀던 시절, 우연히 스승의 강의 계획서를 본 적이 있다. 예술대학 저학년 대상의 비평 과목이었다. ‘산에 가서 제일 예쁜 벌레를 한 마리씩 잡아온 후 내 앞에서 그 벌레를 만져야 한다’는 과제가 적혀 있었다. 비평 시간에 웬 곤충채집? 게다가 벌레면 벌레지 ‘예쁜 벌레’는 또 뭔가. 나비와 풍뎅이, 무당벌레와 장수말벌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비교하라는 말인가. 벌레 잡다가 애꿎은 학생들이 물리기라도 하면 또 어쩔 건가. 비평 배우겠다고 온 예술 학도들이 단체로 산에 올라가서 벌레 잡고 있을 생각을 하면서 좀 웃었다.

스승은 남과 달라지겠다는 강렬한 욕망과 미친 실행력을 지닌 드문 비평가였다. 강의 역시 탁월해서 수업에 늘 학생들이 붐볐다. 나를 비롯한 타교 대학원생들과 심지어 유학을 다녀온 대학원 강사까지, 그의 학부 강의를 청강하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경기도의 그 예술대학 강의실로 찾아갔다. 몇 년이 지나고, 스승은 사진 비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을 ‘기계 비평가’라고 부르며 컨테이너선이나 항공기, 인공위성 같은 것들을 진지하게 비평하는 그의 속내를 나는 지금도 알 듯 모를 듯하다. 어쨌거나 나는 그가 떠난 사진 비평의 골짜기에 우두커니 남았다. 지금도 가끔 그 강의 계획서를 떠올린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비평과 작업의 관계를 건드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사진을 볼 때마다 비평의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과연 이 사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을 체계적인 언어로 구조화할 수 있을까? 벌레를 손아귀에 넣는다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10개의 작업을 봤을 때 글을 쓸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 건 한두 개에 지나지 않는다. 글과 사진은 전혀 다른 존재다. 사진은 언어가 아니다. 기호로 분절되어 있지도 않고,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담기도 어렵다. 영화나 문학처럼 촘촘하게 직조한 서사나 인물도 없다. 사진의 상당 부분은 순간의 우연으로 생성된다. 사진은 반짝이는 표면 아래 말없이 얼어붙은 헐벗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나는 눈앞에 있는 사진을 모두 이해했다는 듯이 행동하는 이를 좀처럼 믿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진을 해석하는 몇 가지 전통적인 방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대와 90년대에는 문학 비평의 방법론을 사진 비평에 적용하려는 이가 많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정신 분석학 등이었다. 이런 담론을 조립해 사진의 의미를 검출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의 한쪽으로 사진을 넣으면 다른 한쪽으로 그럴듯한 글이 출력됐다. 롤랑 바르트가 국기에 경례하고 있는 흑인 병사의 사진이 사실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했듯이, 이 장치들은 우리를 둘러싼 사진들에 어떤 권력과 이데올로기, 미학이 작동하고 있는지 안내한다.

심지어 어떤 영리한 작가들은 이 장치들의 패턴을 거꾸로 이용한다. 대형 작품을 전시장에서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프레임 구석에 보이지 않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주로 활용하되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가미할 것!” 담론의 장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글쓰기는 물론이거니와 작업도 지루하다. 그런 영리한 작업은 대개 온순하고 밋밋하며, 그에 따라 비평도 퍼석퍼석해진다. 사진에 붙어 있는 코드와 의미를 모두 해석해낸 후에도 사진은 마치 해골처럼 남아 우리를 바라본다. 예를 들어 흑인 병사의 번들거리는 피부, 유난히 밝은 눈동자의 흰자위, 프레임 밖으로 위태롭게 잘려나간 손바닥 같은 것들이 주는 기묘한 불안감을 남겨둔 채 사진을 ‘이해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사진은 비평적 가치 판단이 불가능한 매체일까? 비평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 과업이나 미학적 전선은 존재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 동시대인은 매일매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최초의 영장류다. 작년 기준으로 페이스북 한 곳에만 매일 30억 장의 사진이 올라온다. 매초 3만 5천 장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스냅챗, 블로그, 심지어 공개하지 않고 버리는 사진의 수는 얼마나 될까? 현대 사회는 뜨겁게 붐비는 사진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지털 네트워크와 스마트폰 카메라로 인해 인간이 사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 이미지를 지각하고 송출하는 방식이 근본적인 전환을 맞았다. 그것은 비평이 답해야 하는 미학적, 정치적 질문의 수와 무게가 나날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야생 동물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지 않듯이, 사진은 비평 없이도 천연덕스럽게 잘 살아갈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것은 사진 비평 자체다. 한국의 사진 비평은 생산에 충분히 공헌하고 있는가? 사진을 충분히 두려워하는가?

지금의 사진 비평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몸을 가진 사진이 예전과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 찍으려는 욕망과 찍히려는 욕망은 어떻게 흘러다니며 몸을 섞는지, 새로운 매체 환경을 기반으로 어떤 기묘한 사진 작업이 생성하고 소멸하는지를 다룬다. 사진은 태생적으로 혼종적인 매체다.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 지식, 기술과 함께 사용된다.

사진을 현대 미술의 천덕꾸러기나 하위 범주로 간주하는 이들은 왜 사진 비평가들이 당대의 기준과 취향에는 턱없이 부족한 잡다한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사진 비평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제도적 기반은 주로 현대 미술이지만, 사실 사진 비평이 검토 대상으로 삼는 사진의 영역은 훨씬 광활하다. 즉, 스냅 사진, 패션 사진, 아마추어 사진, 산업 사진, 과학 사진, 광고 사진에 이른다. 이런 것을 미술관에 가지고 들어가 현대 미술의 맥락을 교란하는 일을 즐기지만, 그것이 비평의 목적은 아니다. 사진 비평은 대부분 사진과 사진을 둘러싼 의미의 장을 이해하길 바란다. 그러므로 사진 비평은 여러 담론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진의 역사와 이론에 무게를 두며, 사진이 사용되는 사회적 맥락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진 생태계는 비평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매체의 문제다. 지금 비평가가 글을 쓰고 고료를 받는 지면은 작가의 전시 도록 서문에 지나지 않는다. 스승의 표현을 빌리면 그런 곳에 놓인 비평은 마치 “우동 위의 고명처럼” 작동한다. 고명이 우동을 공격하지 못하듯이, 비평 역시 작업을 공격하지 못한다. 그저 함께 뒤섞여 목구멍과 위장을 통과할 뿐이다.

신문이나 잡지, 미술 매체 등이 일부 지면을 할애한다. 고마운 일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낯선 독자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들 매체에서 쓸 수 있는 글의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다. 독자들이 사진의 용어와 개념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글쓰기는 위축된다.

한편으로 이는 실제 사진 이미지의 기술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비평가로 진입하기 더욱 수월한 구조이기도 하다. 심지어 사진 작업을 단지 자신의 철학이나 이론을 펼쳐 보여주기 위한 소재로 사용하는 글을 비평이라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비평은 작업의 내적 구조와 기술적 토대가 이미지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특히 사진의 중요한 특징은 어떤 매체보다도 기술적 진입 장벽이 낮아서 생산자가 되기 쉽다는 점이다. 소비의 양식보다 생산의 양식에 공헌하고 싶어 하는 것은 비평의 오래된 꿈이기도 하다.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평은 생산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비평의 위기로 인해 사진계가 이 모양이라는 식으로 한탄하는 습관이 내게는 없다. 야생 동물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지 않듯이, 사진은 비평 없이도 천연덕스럽게 잘 살아갈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것은 사진 비평 자체다. 한국의 사진 비평은 생산에 충분히 공헌 하고 있는가? 사진을 충분히 두려워하는가? 요동하는 지형에서 동시대 작업자가 그려내는 풍경을 충분히 집요하게 응시하는가? 나쁜 비평은 담론이라는 무기만 믿고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좋은 비평은 기괴하고 탁월한 작업을 통째로 들어서 전혀 다른 의미의 세계로 가져간다. 그런 비평을 만난 작업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스승의 벌레 잡는 수업은, 사실 작품이 벌레처럼 사람과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작품은 잘 잡히지도 않을 것이고, 세게 움켜쥐면 죽어버리거나 손을 물거나 독침을 쏠 것이다.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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