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음식 비평과 음식점 비평은 다른가?

2017.09.28GQ

밥 먹는 일은 감상과 소비가 뒤섞이는 일상의 영역이다. 비평에서만큼은 그 두 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한 가지를 확실히 하고 싶다. 일반적인(상업적인) 음식의 비평 대상은 미술 작품처럼 이미 완성된 상태가 고정되어서, 즉 언제라도 같은 상태로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관찰하고 느껴보면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그리고 만들고 먹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평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오늘 먹은 냉면 한 그릇의 맛이 한 달 뒤 같은 음식점에서 먹은 냉면의 맛과 정확히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 음식 비평은 어느 범위에서 해야 할까? 당일 먹은 그 시점에서의 음식에 대한 감상이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려면 그 음식을 직접 조리한 사람에 대한 이해와 그 음식점이 추구하는 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취향과 평가를 구분하고 평가에 이 취향이 반영되는 것을 자제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비평은 그날 먹은 한 그릇에 국한 되겠지만, 그렇다고 한 번 먹어봤을 뿐인데 항상 그랬다는 듯 적는 오류를 범하는 건 피해야 한다. 조리법에 대한 이해 없이 써내려간 감상기도 비평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혹은 기분 망치며) 먹은 식사에 대한 감상을 진지한 문체로 적고 난 뒤 비평인 척하는 글은 가려 읽을 필요가 있다.

최근 음식 비평의 영역에서 자주 관찰되는 오류가 하나 있다. 요리에 대해 조금만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어서 굳이 떠벌리지는 않는 일반적 수준의 지식을 과시하듯 인용하는 음식 비평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고기를 지져 내부의 수분을 가둔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것으로 오래전 판명되었는데, 매스컴에서 한두 조리사가 “센 불로 지져 육즙을 가두고” 같은 표현을 했다고 이를 매도하는 비평을 쏟아내는 식이다. 새로운 관점과 시각을 제시하지 않은 채 실수를 과장해 꼬집는 것을 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혹은 “피자는 전용 화덕에 매우 센 불로 최소한의 토핑을 올려 구워야 한다. 그렇지 않은 피자는 모두 얼치기다” 같은 글도 그다지 평론으로서 가치가 없다. 그 요리를 설계한 사람과 음식점의 상황을 보지 않고 자신이 설정한 편협한 기준에 맞춰 평하는 글은 단순 감상기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글이 가치를 지니려면 제대로 공부해서 현장의 조리 전문 인력들에게 도움을 줄 만한 수준으로 하는 게 맞다. 음식점에 대해 비평하는 사람이 요리사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면, 최소한 조리법과 식재료에 대한 이해는 그 수준 가까이에 다다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음식 비평과 음식점 비평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날 먹은 한 끼 식사의 맛으로 해당 음식점에 대한 가치를 미루어 짐작하거나, 단순히 음식점의 취지가 좋다고 음식의 평가를 후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음식 비평이 많아질수록, 음식 비평과 음식점 비평을 일부러라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가 먹은 음식에 대한 비평이 당일 볼 배합에 실패한 마무리 투수에 대한 비평이라고 치자. 음식점에 대한 비평은 전체적인 경기 운영과 경기장 관리에 대한 비평인 셈이다. 음식 비평과 마찬가지로 특정 음식점에 대한 비평은 전반적인 운영 방침과 서비스 철학을 전제한 상태로 이뤄져야 한다. 이 부분을 파악한 뒤 일정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방문하여 느낀 퍼포먼스의 질을 평가한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한꺼번에 비평할 수 있으나 혼돈해서는 안 된다. 즉, 그날 먹은 한 끼 식사의 맛으로 해당 음식점에 대한 가치를 미루어 짐작하거나, 단순히 음식점의 취지가 좋다고 음식의 평가를 후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두 가지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 좀 극단적이지만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볼까? 스타벅스에 가서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거나 디저트를 예쁘게 장식해서 서비스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음식점 평가다. 스타벅스의 운영 방침과 서비스 철학을 완전히 오해했기 때문이다. 디저트 전문 풀 서비스 카페(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으면 서버가 주문을 받아 서비스하는)에서야 직원들의 서비스 속도와 서비스 시스템에 대해 평할 수 있다. 스타벅스에서는 더 다양한 맛의 샌드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거나 가격을 더 받더라도 속 재료를 더 실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수준이 의미 있는 의견일 테다.

음식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 접하는 일상의 분야다. 사람마다 취향이 확고하고 의견이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식사를 하는 일은 감상의 영역에서 단순 소비의 영역까지 모두 포함하는 꽤 방대한 분야다. 감상의 영역에 있는 음식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치열한 비평도 필요하다. 한정된 소수의 다이너를 위해 준비하는, 인당 수십만 원짜리 갈라 디너나 와인 메이커스 페어링 디너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준비와 기획에 공을 들여 완성도 있게 준비해서 며칠간 하는 콘서트와, 하루에도 여러 번 장소를 옮겨 다니며 참가자들의 흥을 돋우려 열린 행사장에서의 공연을 같은 잣대로 볼 수는 없듯이 단순 소비를 위해 조리하고 서비스한 ‘상품’을 판매하는 음식점에서 거창한 감상기를 남기는 것을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의 상품을 준비하는 음식점의 입장에선 자신이 할 수 있는 100퍼센트의 품질에 도달하기 위해 가끔씩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서 태워버리는 게 아니라 꾸준히 80~90퍼센트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것까지 감안한다면 과연 우리가 평소에 찾는 음식점에서의 식사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된다. 메뉴에 대한 것이든 음식점의 전반적인 서비스에 대한 것이든 감상기가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감상기와 비평은 다르다. 무슨 구석이든 비판할 구석을 찾아내 불평하는 글은 하루 수백 그릇의 음식을 만들고 서비스하며 영업 관리까지 해야 하는 ‘상점’에 대한 평가로는 적절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본다. 음식점 비평은 그래서 더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 충분한 실력과 소양을 갖춘 비평가가 집중해서 감상한 뒤 인정할 만한 평을 남겼을 때 유효하다. 동의하지는 않아도 인정은 할 수 있어야 비평이니까.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에디터
    글 / 김욱성(청강산업문화대학교 푸드스쿨 조리 전공 교수)
    사진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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