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문학과 체육 사이

2017.09.29GQ

지금 스포츠는 만들어진 영웅보다 날 선 비평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의 위상은 어정쩡하다. 문화와 체육 사이, 또는 산업과 시장 사이의 애매한 영역에서 갈 곳 없는 모양새랄까.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말하기엔 설 익었고, 체육으로 가둬두기엔 향유하는 방식이 다양해졌다. 다른 분야와 이질적이라는 점에서 독립적인 산업으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그럴 만한 규모를 이루지 못했기에 사회 구성원의 일부만 개입하는 작은 시장에 더 가깝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이름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스포츠의 사회적 입지는 비평의 영역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고, 나름의 전문성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분야지만, 미디어에서 스포츠를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표피적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스포츠 관련 정책에 쏟아붓는 돈의 규모, 전 국민이 스포츠에 쏟는 관심을 고려하면 미디어가 스포츠를 대하는 태도는 좀 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변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 언론에서 스포츠 관련 보도는 국가대항전이나 스타 플레이어의 동향,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메이저 이벤트를 따라잡는 데 집중되어 있다.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와 성과주의에 천착한 이런 행태는, 스포츠의 범주가 과거에 비할 수 없이 확장된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채, 여전히 감동과 비난의 양극단을 오가는 데 몰두한다. 스포츠 비평의 수요가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다. 제아무리 소셜 개인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 하더라도, 비평은 규모가 큰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는 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비평의 부재는 스포츠 스타들에게 ‘영웅’이나 ‘괴물’의 라벨이 쉽게 붙는 경향과 무관치 않다. 스포츠 보도의 선정적 헤드라인의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지만, 적절한 비평이 드문 한국 미디어에서 영웅의 섣부른 대관식과 용감한 폐위는 좀 더 무책임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이를테면, 아직 이룬 것이 없는 10대 선수의 등장에 언론이 앞장 서서 환호하고 대중이 이에 화답하며 완성된 이승우 신화를 보자. 1998년생인 이승우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유망주였다. 여기에 FC바르셀로나 유스팀 입단이라는 ‘간판’이 붙자 미디어의 영웅 만들기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아직 프로 데뷔도 하지 않은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앞다퉈 보도되자, 어느 순간 가상의 이승우가 실제의 이승우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현실의 이승우는 아직 바르셀로나 유스팀에서 착실히 성장하고 있는, 뛰어나지만 검증은 덜 된 유망주지만, 팬들이 상정한 가상의 이승우는 마치 바르셀로나 1군 데뷔가 멀지 않은, 이미 완성된 스타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적절한 스포츠 비평은 이승우의 위치를 짚어주고, 실제 현장의 분위기가 어떤지 점검하는 취재 보도의 형태로 구현될 필요가 있다. 비평은 주로 오피니언의 형태로 이뤄지지만, 때로는 적절한 팩트 확인과 공정한 서술의 형태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지난 수년간 이승우 관련 보도는 이성적으로 사실 여부 판단이 가능한 루머나 추측성 정보가 무비판적으로 유통되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외신 보도를 그대로 기사화하거나 선수 측근이 일방적으로 전달한 내용을 팩트 확인 없이 경쟁적으로 보도 하면서 영웅 만들기가 진행됐다. 바르셀로나가 유스팀 선수에게 지급하는 연봉 수준이나 계약 내용, 현지 평가 등 정확한 취재를 통해 보도되지 않았다. 이런 행태가 비평의 견제를 받지 못하면서 이승우 관련 기사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제부터 시작이라 할 이승우의 프로 선수 커리어는 벌써부터 실패 논란에 휩싸였다.

얼마 전, 필자는 ‘이승우에게 보내는 고언’이라는 제목으로 이른바 ‘이승우 현상’에 앞장선 미디어를 에둘러 비판한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실명을 거론하거나 문제의 핵심을 언급하는 것이 낯선 국내 스포츠 보도 경향을 감안하면 부담스런 태도지만, 이후 이승우를 다루는 미디어의 태도가 좀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자평한다. 이승우가 타의에 의해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내용이 여럿 유통되는 것을 다수 언론이 묵과할 수 있었던 데는 비판적 보도의 부재가 큰 몫을 했다.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나 정치와 달리 여론에 의해 스타가 만들어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앞지른 기대와 이에 부응하는, 때로는 이를 주도하는 보도가 맞물려 가짜 영웅의 탄생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프로 데뷔 이전에 스타덤에 오른 어린 선수가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초연하게 일상에 집중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쯤이면 미디어에 비친 모습을 실제의 자신과 혼동한다고 해도 무리한 반응이 아니다. 선수 이승우는 여전히 놀라운 잠재력을 가진 뛰어난 유망주지만, 기대가 현실을 앞지른 상황은 뜻밖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다소 무책임한 언론의 ‘띄우기 경쟁’이 잦아든 최근 분위기는 유망한 선수에게 ‘영웅’의 자격을 덧씌운 뒤, 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손쉽게 폐기 처분하는 미디어의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반대의 경우는 김연아다. 대한민국에서 세계 챔피언이 배출될 거란 기대가 애시당초 불가능했던 종목 중 하나가 피겨스케이팅이고, 제대로 된 훈련 여건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김연아는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을 더해 압도적인 챔피언의 지위를 획득한 인물이다. 하지만 김연아의 기념비적 성과는 금메달이라는 가시적 지표로 상징될 뿐 그의 퍼포먼스가 갖는 난이도나 그가 해당 종목에서 일궈낸 업적의 위대함을 꼼꼼하게 평가하는 비평을 찾아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도리어 (교생 실습이나 CF 출연 등) 그의 과외 활동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여러 논란을 빚어내는 모습에서, 스포츠 보도가 진짜 영웅의 가치를 드러내기보다는 그의 위상에 흠집을 내거나 단순한 가십 위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연아가 그저 예쁘고 젊은 유명 스타로 소비되는 데 스포츠 비평의 부재는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2012년에 큰 논란을 빚었던 김연아의 교생 실습 에피소드가 스포츠 영웅의 관련 분야 교생 실습 자격이 아닌, ‘맥주 CF에 출연한 인물이 교생 실습에 나서도 되는가’라는 화두로 이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영웅이든 스타든,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기반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 자리에 올라선 이후의 사사로운 동향에 집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스포츠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스포츠는 굉장히 광범위하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의 시간과 비용이 각 개인이나 기업, 또는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거대하게 소비되고 있는 현실에서 삶에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로 평가절하되어서는 곤란하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서 스포츠가 (수치스럽게도) 비리의 도구로 사용된 것은, 역설적으로 스포츠가 더는 우리 사회에서 부수적인 용도에 그치는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스포츠 비평은 존재의 이유를 실감할 필요가 있다. 전문성이 존중되지 않는 풍토에 순응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는 것으론 아무런 변화도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스포츠는, 그리고 그 종사자들은 스스로 그 사회에서 자신들이 갖는 가치와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는 단순히 여가 선용을 위한 레저나 신체 단련이 목적인 체육을 넘어선 사회적 기여의 도구임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미디어가 스포츠를 마땅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분야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스포츠는 새로운 경지에서 더 다양한 번영의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에디터
    글 / 서형욱(스포츠 칼럼니스트, 대표)
    사진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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