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장광효의 30년

1987년 시작한 카루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장광효는 아직도 일을 덜한 것 같다고 말한다.

며칠 뒤면 또 서울 컬렉션이네요. 지금 한창 바쁘시죠? 괜찮아요. 컬렉션이야 이미 몇백 번이나 해서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걸요. 옷은 벌써 몇 주 전에 다 만들고 스타일링까지 끝내놨어요. 맘에 안 드는 데가 좀 있어서 방금 몇 가지를 바꾸고 왔지만요.

올해로 카루소를 론칭하신 지 30년이 됐어요. 아무리 익숙하셔도 이번 컬렉션만큼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까지 한 작업들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감회도 새롭고요. 그래서 지난 30년의 궤적을 쭉 되짚어봤어요. 그걸 포괄하는 옷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또 한편으론 굉장히 동시대적인 옷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다 초창기에 만든 니트를 발견했어요. 그 옷에 로봇과 민화의 닭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프린트가 있는데, 그걸 조금만 다듬으면 지금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게 이번 컬렉션의 메인 테마가 됐죠.

디자이너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중학교 때였나?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 보고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 속 의상이 너무 근사해서요.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가슴이 벅차 오르더라고요. 그때 처음 디자이너가 되리라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그 길로 동대문 구제시장에 가서 옷을 샀어요. 땅에 질질 끌리는 미군 바지였는데, 그걸 또 염색해서 한참을 입고 다녔죠. 그 바지를 입고 신세계백화점도 가고, 경복궁도 가고 그랬어요.

파리 컬렉션에 진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이기도 하잖아요. 그때 얘기도 해주세요. 1994년이었어요. 파리 사람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모를 때였죠. 카루소는 요지 야마모토, 꼼 데 가르송에 이어 파리 컬렉션에 진출한 세 번째 동양 남성복 브랜드였어요. 그때 제 옆방에서 이세이 미야케도 첫 파리 쇼를 했고요. 파리 컬렉션은 총 여섯 번 참여했어요. 귀족 저택을 빌려 따로 컬렉션을 한 것까지 포함하면 일곱 번이네요.

힘든 일도 많으셨겠죠? 파리 컬렉션을 한 번 치르는 데 2억~3억원 정도가 들었어요.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 큰돈이죠. 그리고 돌아오면 짐을 다 풀기도 전에 세무 조사부터 받았어요. 사치 조장 업체라고 해서 세금도 몇 억씩 냈고요. 그래도 디자이너로서의 욕심이 있어서 계속 파리 컬렉션을 했어요. 사실 그때는 경기도 좋고, 돈을 굉장히 잘 벌었어요. 백화점 매장이 40개 정도 있었는데, 갤러리아 백화점에서만 매달 3억원 정도 매출을 찍었으니까요. 지하
식품 매장을 제외하고 백화점에서 매출 1등을 하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갑자기 사업을 다 정리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카루소가 부도가 났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은 아니에요. 파리와 서울에서 매 시즌 컬렉션을 하고 지방에서도 따로 쇼를 하는 데다 매장까지 너무 많이 벌려놔서 관리가 힘들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고, 차분하게 디자인을 할 에너지도 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한꺼번에 싹 정리해버렸어요. 그게 IMF 터지기 딱 세 달 전 일이에요. 굉장히 잘한 일이었죠. 운도 좋았어요.

카루소에서 처음 만든 옷이 뭐였는지 기억하세요? 그럼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과 비슷한 검정 수트였어요. 어깨에 과장된 패드를 넣은 커다란 싱글 브레스티드 재킷과 배기 팬츠였죠. 물론 느낌은 살짝 다르지만요. 동대문에 가서 그런 패드를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이런 재킷을 누가 입냐며 한 소리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막 보란 듯이 입고 다녔어요. 연예인들에게도 많이 입혔고요.

지금까지 만드신 옷 중에서 유독 각별한 것도 있겠죠? 몇 년 전에 TV를 보는데 조용필 씨의 옛날 영상이 나왔어요. 반갑더라고요. 그때 조용필 씨 의상은 거의 제가 다 만들었거든요. 그 옷이 지금도 종종 생각나요. 칼라가 엄청 크고 둥근 셔츠와 검은색 재킷이었는데, 다시 봐도 너무 예뻤어요. 내가 만들어놓고도 깜짝 놀랄 만큼요. 작업실에서 그 옷을 만들던 생각도 나고요. TV를 보다가 너무 흥분해서 부엌에 있던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여보! 저거 내가 만든 옷이야” 하고요.

요즘 눈이 가는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있나요? 베트멍 좋아해요. 실제로 입고 다니기도 하고요. 이런 말하면 다 웃어요. 나이 먹은 사람이 그런 거 입고 다니면 좀 이상하게 보이나 봐요. 사실 처음엔 싫었어요. 그런 옷은 이미 1980년대에 다 했는데, 왜 또 유행이 되나 싶었죠. 근데 입어보니까 좀 이해가 되더라고요. 베트멍의 디자인 세계와 요즘의 패션, 젊은 세대와 뭔가를 공유한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역시 디자이너는 옷을 많이 입고 경험해봐야 해요.

술도 별로 안 드시고, 담배도 안 태우시죠? 의식적으로 자기 관리를 하시는 건가요? 담배는 배운 적도 없고, 술은 밥 먹으면서 와인 한두 잔 마시는 정도가 다예요. 좋아는 하는데 많이는 못 마시거든요. 잠은 꼭 12시 전에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요. 세 끼를 제때 챙겨 먹고, 과식도 안 하죠. 의식적으로 관리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오랫동안 쌓인 좋은 습관일 뿐이에요. 근데 지나고 보니 그게 굉장히 큰 재산이더라고요. 습관이 사람을 만드니까요.

참 의외예요. 디자이너들은 예민하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경향이 있잖아요. 물론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어요. 그런 게 없으면 디자이너가 되기 힘들죠. 하지만 좋은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욕구와 충동을 잘 조절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에요. 아니면 삶을 관조한다고 해야 할까요? 스트레스를 받아도 금세 마음을 비우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버려요.

그래도 길티 플레저는 있으시겠죠? 하지 말아야지 생각은 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것들요. 한때 의자나 고가구, 그림, 불화 같은 걸 엄청 모았어요. 맘에 드는 걸 발견하면 무조건 사들여서 집에 둘 데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15년 전 이사를 할 때 이삿짐 센터 창고에 불이 났어요. 그때 수집품들이 홀랑 타버렸죠. 무척 허망하더라고요.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다시는 물건을 사 모으지 않으리라 다짐도 했어요. 근데 그게 생각처럼 되겠어요?
지금 집에도 가구와 그림이 가득해요. 그래서 차라리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어떻게 보면 술집에 가서 허튼돈을 쓰거나 도박으로 날리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잖아요. 그리고 전 그런 물건을 가까이서 보고 만지며 영감을 받는 경우도 굉장히 많아요.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모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잖아요. 사람의 인생을 초년, 중년, 말년으로 구분한다면, 전 이제 말년에 들어섰어요. 나이도 환갑을 넘겼고, 일도 30년 넘게 했어요. 요즘은 다들 제게 30년 동안 카루소를 만든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요. 그러면 거기에 마땅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죠. 3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에겐 일생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게 다 엊그제 일 같아요. 세월을 잊고 살았나 봐요. 마음은 20대에 머물러 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60대가 됐어요. 돌이켜보면 일을 하나도 안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실제론 또 너무 많은 일을 했죠. 이력서를 쓰면 자질구레한 걸 빼고도 수십 페이지는 될 거예요. 그걸 다 적고 싶지 않아요. 과거가 너무 많은 게 싫거든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끝은 오잖아요. 솔직히 은퇴를 생각해보신 적도  있으시겠죠? 앙드레김 선생님은 일흔여덟, 옥동 박항치 선생님은 일흔일곱에 돌아가셨어요. 만약 저도 팔순 전에 죽게 된다면 내일 당장 일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못해본 걸 찾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생각해보면 전 자기 관리도 잘했고, 나이에 비해 정말 건강해요. 게다가 어머니가 아흔여섯까지 사셨는데, 전 어머니를 참 닮았고요. 앞으로 의술이 더 발전할 테니 조금 욕심을
내보면 1백 살까지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그렇다면 저는 좀 더 일하고 싶어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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