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살면서 가장 놀란 점

도쿄는 자동차가 적다. 도쿄에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있다.

10년 전쯤 일이다. 도쿄에 교환학생으로 머물던 시절 부모님이 짧은 일정으로 놀러 왔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키치조지에 내려 집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두 가지 사실에 크게 놀라워했는데, 하나는 저녁밥을 먹은 꼬치집에서 그들에겐 ‘쓰끼다시’ 같은 공짜 반찬에 다 값을 매긴다는 사실이었고, 또 하나는 시내나 주택가 어디서든 불법 주차된 차가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자의 경우 예상했던 바지만 후자의 경우는 자동차 생활자가 아니었던 나로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관찰력에 탄복하며 확실히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이 차이는 지난해 4월, 이번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될 도쿄 이주를 한 뒤부터 나에게도 무척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지난 1년 반 세 번 서울을 방문하는 동안, 서울의 무엇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에 대해 살 때는 못 느꼈던 목록이 몇 개 늘었다. 화장지를 흘려보낼 수 없는 약한 변기 수압 때문에 남이 쓴 휴지를 그대로 노출하는 휴지통에 몰카 우려까지 있는 공중화장실이 1위를 차지할 뻔했다. 하지만 근소한 차이로 시내를 터질 듯 메우고 있는 차, 차, 차가 먼저였다. 골목 곳곳에 아슬아슬하게 주차된 차량을 포함해 차가 정말 많았다. 시내버스를 타면 속수무책으로 길에 갇힌다는 게 즉각적인 괴로움이었지만 버스에서 내린 뒤 걸을 때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역에서 n분’ 거리라도 찻길, 특히 6차선 이상 광폭 도로와 마주칠 일이 잘 없는 도쿄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간선도로가 보행권역과 잘 만나지 않는 도쿄에 비해 서울에서는 늘 자동차를 우선해 디자인된 길의 가장자리를 걷는 듯하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장소인 도쿄대학에서는 ‘생협’에 배달 오는 트럭과 자동차 동아리의 차를 제외하면 자동차를 볼 일이 거의 없다. 손바닥만 한 부지 위에 연구실과 강의동이 다 들어 있는 캠퍼스는 전적으로 보행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상에 보행자 천국을 조성하기 위해 지하에 주차장을 밀어 넣은 연세대 백양로의 재창조 프로젝트는 학교에 그 정도 주차장이 필요하다는 사실부터가 놀랍기만 하다.

전 세계 주요 대도시의 등록 자동차대수를 비교해보면 서울은 301만 대로 베이징(544만 대)보다는 적지만 런던과 뉴욕을 앞지르며 도쿄는 198만 대로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적다. 이를 한 가구당 보유 대수로 환산하면 서울은 가구당 0.85대로 런던(0.86, 2011년 기준)보다 약간 낮을 뿐 역시 최고 수준이다. 한편 도쿄는 2010년 기준 0.45대로 서울의 절반, 다른 세계 대도시에 비해서도 그 숫자가 낮다. 물론 ‘전국’ 자동차 보유 대수를 보면 일본이 한국을 앞선다. 고도성장기의 급격한 모터리제이션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덮쳤고, 한국이 2014년에야 넘긴 전국 보유 대수 2000만 대를 일본은 이미 1972년에 넘겼다. 수치가 적을수록 자동차 양이 많음을 나타내는 자동차 1대당 인구수도 일본이 1.7, 한국이 2.56명이다.(2014년) 평소 통근과 통학에 이용하는 교통수단을 묻는 질문에서 도쿄와 전국의 자동차 선택 비율은 각각 3.4퍼센트, 33.4퍼센트로 크게 차이가 나는데(2009년) 이는 흔히 우리가 “야, 지방에선 차 없으면 못 움직여”라고 말하는 것(실제로 그러한 것)과 동일한 사정을 표현한다.

이 전국 대비 수치는 자동차 사회화가 덜한 도쿄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건 대도시에선 자가용 비율이 적지만, 전국 단위로 보면 오히려 일본이 한국을 앞선다는 점에서 ‘도쿄’ 대 ‘서울’의 차이는 더 뚜렷하다. 또한 앞서 도쿄의 가구당 자동차 보유 대수가 2010년 기준 0.45대라는 수치를 다시 가져와 보면 이는 10년 전인 2000년 조사 당시 0.61대에 비해서도 큰 폭으로 낮아진 숫자라 시계열적 비교를 통한 추론, 즉 이 도시가 어떤 방향으로 체질을 바꿔가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변화와 나란히 놓고 보고 싶은 것이 버블 붕괴 이후 도쿄의 지가 하락과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도심 회귀 현상이다. 1965년부터 1995년까지 계속 감소하던 도쿄 23구(특별구)의 인구가 증가세로 전환되더니 2010년 과거 대비 최고치를 기록했다. 도심의 인구는 늘었고 자동차는 훨씬 준 것이다. 도쿄에 살면서 느낀 실감을 섞어 이런 가설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외에 마이 홈을 ‘구입’하고 자동차를 ‘소유’하여 갖는 라이프스타일은 줄어들고 있으며 인프라가 몰려 있는 도심에서 방을 ‘임대’하고 차를 갖지 않는 몸이 가벼운 라이프스타일이 늘어나고 있다고. 여기에 국내 인구 감소와 연동한 적극적인 유입 정책으로 인한 해외 이주민의 증가, 1인 가구나 공유 주택이 늘고 있다는 것도 이 저성장 시대 도시 체질 변화 사이클의 어디쯤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사는 걸 ‘포기 ’한다는 관점은 얼마나 자동차 중심적인가. 오히려 왜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소유해야 하나, 그동안 왜 소유해 왔나, 라고 질문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작년 여름 한국의 한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20~3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성업 중인 일본의 중고 렌터카 대여 업체를 취재하며, 청년들이 차를 사지 않고 빌려 쓰는 문화를 편의점 밥이나 셔터 내린 가게가 즐비한 거리 등과 함께 ‘잃어버린 20년’의 맥락 속에서 쓸쓸하게 다뤘다. 이 뉘앙스가 지시하는 대로, 도쿄에서 자가용을 소유하는 것은 굉장히 값비싼 일이다. 보험료, 톨게이트 비용, 자동차세, 자동차 검사 비용, 범칙금 등이 한국에 비해 무척 비싸지만 도쿄에 특정해 말하면 결국 주차비 때문이다. 차고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승용차를 구입할 수 있는데 자기 땅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결국 차 댈 곳도 매달 돈을 내서 마련해야 한다. 전세 제도가 없는 도쿄에서 매월 또 다른 임대료가 평균 57만원 선(서울 27만원)이라는 것은 아주 높고 단단한 월급이 없으면 시도도 못 할 일이다. 이것이 승용차 대수를 근본부터 제한하면서 서두에 말한 부모님의 첫인상에 부합하는, 차가 제멋대로 삐져나오지 않은 깨끗한 거리를 만든다. 그런데 굴리기 비싸서 문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차를 사지 않는 청년들’을 이상異常 상태로 문제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동차를 사는 걸 ‘포기’한다는 관점은 얼마나 자동차 중심적인가. 오히려 왜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소유해야 하나, 그동안 왜 소유해 왔나, 라고 질문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뭘 되찾으려는지 모를 ‘잃어버린 20년’이란 작명도 늘 당황스러운데, 애초에 바라지도 않은 삶의 모델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3포 세대라는 이름처럼 말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는 <모빌리티>에서 자동차 시스템이 다른 교통 시스템과는 현저히 다른 20세기를 지배한 ‘하나의 완전한 문화’이자 삶의 방식이었다고 지적한다. 그의 광범위한 고찰 가운데 멋대로 세 가지를 핵심으로 추려봤다. 첫 번째는 자동차 시스템이 진보라는 유토피아적 이념과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논리와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5퍼센트가 “운전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는 자유를 준다”라는 말에 동의했다고 하는데 이는 시간표에 ‘구속’되는 공공 철도 시스템과 대비를 이룬다. 두 번째는 이러한 특정 이념이 자연화된 것처럼 자동차 시스템이 자연화되었다는 것이다. 찰스 테일러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말하듯이 현대사회의 전가의 보도인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전무후무한 물질적 풍요 속에서 발명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동차/자동차 도로의 존재와 발달은 보편타당한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한 번 지배적인 시스템이 되고 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자동차/자동차 문화는 당연한 것이 되고, 더 나아가 “성인의 기호, 시민권의 표시, 사회적 교류와 네트워크의 토대”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세 번째다. 어리는 “바퀴가 없는 인간은 시민 사회에서 전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자동차모빌리티화된 사회의 새로운 불평등 문제를 겨냥한다.

난폭하게 요약하면 20세기 자동차 시스템은 특히 개인의 자유 이념과 결합해 복합적으로 선택되고 만들어진 ‘당연함’이다. 그 이념과 산업과 제도와 경관 등등을 서로 키우며 시스템을 공고히 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자동차 모빌리티를 파악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설사 그 관점을 따른다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쩌자는 것도 아니다. 서울은 훨씬 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친환경 교통과 보행권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머지않아 하늘이 파란 날이 좀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이 글의 출발은 ‘한국을 떠난다면 이상적인 도시’로서의 도쿄였는데, 어딜 들어가도 치른 돈만큼 성실한 식사 경험이나 경관을 중시하는 건축물, 건물 구석구석 세심한 손길 등 여전히 나와 다른 방문자들을 감탄 시키는 것 말고, 오히려 이 도시의 불편함이나 제약(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출발해보고 싶었다. 짚어 말하자면 근 세 에도의 공간 논리로부터 탈피해 이 도시 자체를 형성시킨 틀이자 도시 자체의 거대한 제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도시 철도망이다. 이 노선을 따라 형성된 주택가에서 걸어 나와 철도의 시간표와 환승 체계에 묶여 수많은 타인과 거대한 통근 통학 물결의 일부가 되는 것은 도쿄에서의 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개인 자유의 억압 혹은 하향 조정을 내면화하는 일 같다. 도쿄에서의 삶은 지켜야 할 규칙과 코드화와 관례 투성이인데, 도시철도는 그것의 상징이자 도시 구성원으로서 모두 평등하게 실제 의식을 치르는 장소랄까. 이렇게 자율도가 낮은 공공 교통 시스템이 견고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21세기 저성장 시대, 축소하는 시대에 자동차 개념의 빠른 변모도 가능했다. 이 강제 덕택에 그렇게 자유롭지 않아도 될 자유도 있다.

몸이 그렇듯 고향도 주어진다. 하지만 살아가고 싶은 도시는 선택할 수 있다. 이름을 바꾸듯 결단이 필요한 일만은 아니다. 부쩍 가까워진 세계 속에서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다만 살 수 없더라도 그곳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스스로 가늠해 나가다 보면, 지금 이곳에서는 불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만난다. 이달, < GQ >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인 도시에 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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