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슬기로운 크리스탈

2017.11.29GQ

배우 정수정이라고 부르든 가수 크리스탈이라고 부르든 어느 쪽도 어색하지 않은, 그냥 여자.

스웨이드 톱과 팬츠, 모두 토즈.

인터뷰 첫 인사를 이렇게 하는 날이 다 있네요. 생일 축하해요. 그러게요, 하하. 감사합니다.

생일에도 일했네요. 생일이라고 특별한 거 없어요. 오히려 아까 매니저 오빠한테, 생일날 촬영하니까 샴페인도 따고, 선물도 받고 좋다 그랬는걸요. 헤헤.

자기 생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그 사람을 보여주기도 하죠. 한 번도 엄청난 파티를 한 적은 없어요. 만날 사람도 없고 파티도 안 하고 조금 외롭긴 하네, 이러면서 지나갔어요. 중학생 때 데뷔했으니까 뭐 크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요.

오늘도요? 밤 12시 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사람들한테 축하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근데 사실 몇 개 되지도 않았어요. 하하. 오늘은 화보 끝나고 팬미팅이 있으니까 조금 다르죠. 팬미팅 끝나면 집에 가서 엄마랑 밥 먹고 술 한잔 할 거예요.

스웨이드 톱과 팬츠, 더블 티 반둘리에라 백, 화이트 프린지 샌들, 모두 토즈.

어머니와 각별한 것 같아요. 가족이랑 정말 친해요. 제 자유 시간 대부분을 언니, 엄마랑 보내요.

생일이 즐거운 날이긴 한가요? 뭐, 똑같은, 평범한 날.

나이가 드는 건 어때요? 제가 벌써 만 스물세 살이에요!

그거 생일날 누구나 하는 대사인 거 알죠? 맞아요. 하하. 스물네 살인데 만 스물세 살이라고 하죠. 늙어가네, 하는데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생일에 선물 받는 건 어때요? <하백의 신부>의 무라는 팬들에게 받은 선물은 다 버리던데. 아니, 무라는 사람들한테 나 이거 받았어, 하는 게 창피해서 그런 거예요. 착해요! 무라.

양가죽 셔츠와 팬츠, 고미노 백, 모두 토즈.

독립적인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 없는 선물에서 정말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한다거나 호의를 부담스러워하는 게 있죠. 저한테 선물을 주는 사람들은, 제가 다시 줄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기브 앤 테이크’랑은 다른데, 제가 이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예전에 선물을 준 사람들이 저한테 다시 선물을 주는 것 같아요.

‘기브 앤 테이크’라는 게 그 말뜻이 아닌 건 알겠어요. 교환과는 다르다는 걸 아는데, 수정 씨가 보여주는 연기와 무대와 노래에도 비슷한 게 있어요. 잘한다는 것과는 좀 다른, 정확하게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제 성격 같아요. 흐리멍덩하게 일하는 걸 안 좋아해요. 확실했으면 좋겠어요. 늘 만족을 못 하고 걱정부터 해요. 어떡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주위에서는 그 정도면 된다고 해도 저는 못 참겠어요. 그렇다고 엄청 뛰어나게 잘하는 게 아닌데도 그래요.

그러니까 잘한다는 것과는 다른 거죠. 무슨 일가를 이루겠다는 식의 야심이라기보다 지금 최상의 결과를 내야 한다는 의식이랄까. 책임감이죠.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거니까, 해야 하는 거니까.

유튜브에 에프엑스 노래 중 ‘라차타’를 제외한 모든 타이틀곡의 첫 부분을 크리스탈이 불렀다는 증거 영상이 있어요. 혹시 알고 있어요? 그 중요한 첫 소절을 줄곧 불러왔다는 것? 네, 하하. 데모 나오면 대충 보여요. 누가 어느 파트를 할지.

양가죽 후디 톱과 플리츠 스커트, 모두 토즈. 귀고리는 미우미우.

그게 어느 정도 맞고요? 맞을 때가 많아요. 제 취향의 음악과 에프엑스가 가까워서 항상 자신감이 있어요. 못할 것 같은 파트는 제가 먼저 얘기해요.

요새 런던 노이즈의 곡을 많이 부르는데, 거기에도 크리스탈의 의견이 반영된 건가요? 제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된 곡이 ‘4 walls’이긴 해요. 되게 오랜만의 앨범인 데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곡이었거든요. 이 곡을 타이틀로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작업할 때도 활동할 때도 너무 좋았죠.

에프엑스의 노래는 긍정적으로 이상한 곡이 많아요. 근데 마치 보는 사람이 어, 나만 이상하다고 느끼나, 라고 생각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는 게 크리스탈더러 ‘정확하다’고 얘기하는 맥락이기도 해요. ‘제트별’ 무대에서 머리를 돌리는 모습이랄지, ‘일렉트릭 쇼크’에서 학처럼 팔을 굽히는 동작이랄지…. 우물쭈물하고 창피해하면 다 보이잖아요. 뭐든 당당하게 해야만 보는 사람에게도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지금 하라 그러면 못 해요. 머리 돌릴 땐 제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하하. 그땐 쇼트 팬츠, 미니스커트 아니면 절대 안 입었거든요? 이젠 못 입고 다니잖아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는 게 불편하더라고요. 어렸을 땐 신경 안 썼는데, 이젠 의식을 하더라니까요.

어른이 될수록 의식하는 것도 가리는 것도 안 하는 것도 많아지죠. 하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긴데, 설리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설리는 어색하고 어설픈 게 귀엽고 매력적으로 보였던 거라면, 크리스탈은 무대에서 맡은 임무를 완수하려는 사람 같았달까. 하하, 인간적이지 않아 보였어요?

화이트 시폰 셔츠, 스웨이드 랩 스커트, 모두 토즈. 귀고리는 미우미우.

나쁘게 말하면 그럴 수 있지만 그렇진 않아요. 그게 크리스탈의 매력이니까. 저는 무대에서 ‘오바’를 못 해요. 그러니까 덜 하지도 않지만 ‘오바’도 안 하는거죠. 그러고 보니 맞네요. 하하. 딱 그렇게만 해요, 내가 연습한 대로. 어떻게 보면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여태 그렇게 해와서요.

크리스탈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게 없을까 하다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잉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봤어요. 보고 나서 좀 웃었죠. 어, 제가 아는 사람들 말고는 안 하는데?

가족과 멤버밖에 없는 와중에 포니 피피엘을 팔로우하더라고요? 맞아요! 제가 너무 팬인데 보컬이랑 포니 피피엘 공식 계정이 저를 팔로우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떡해! 이거는 어떻게든 해야 돼, 하면서 팔로우했죠.

제가 웃은 포인트는 가족과 멤버를 제외한 팔로잉이 참 에프엑스랑 비슷한 포니 피피엘뿐이구나, 였어요. 포니 피피엘 너무 좋지 않아요? 하하.

양가죽 후디 톱과 플리츠스커트, 엑스 스트랩 샌들, 모두 토즈.

올해 방영한 드라마 <하백의 신부>도 에프엑스의 음악처럼 만만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일상생활을 하는 신이었으니까. 그 말투랑 표정이랑 진짜 많이 연습했어요. 첫 대본 리딩하고 ‘멘붕’이 왔거든요. 생활 연기라고 해야 하나? 그냥 자연스럽게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공명이랑 같이 멘붕이 와서,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엄청나게 연습했죠.

<하백의 신부>가 그랬지만, 크리스탈이 좋은 평가를 받은 연기는 대개 사람들이 “크리스탈은 이럴거야”라고 짐작하는 이미지의 역할이었죠. 좀 더 편해서 잘할 수 있는 걸까요? 음, 어렵다. 모르겠어요. 하하. 음,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반대로 물어볼게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때는 불편한 게 있었어요? 네, 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주연을 맡았고, 좋은 기회였지만 잘 소화하기에는 제가 부족했어요. 몰입이라고 해야 하나? 그 캐릭터에 공감을 못 해서 주변을 맴돈 것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보는 분들도 아닌 것 같은데?, 했을 거예요. 근데 그 드라마 통해서 배운 게 많아요.

실크 셔츠, 토즈.

하지만 배우가 매번 다른 이미지를 보여줄 필요는 없죠. 심지어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좋은 배우도 얼마든지 있고요. 그쵸. 근데 맨날 똑같은 거 하면 제가 좀 질릴 것 같은데? 전 아직 배워가는 과정이고. 좀 더 나이가 들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여유가 생길 것 같아요. 지금은 뭘 해도 긴장하고 잘해야 하고 열심히 하고 싶고 정확하게 하고 싶기 때문에….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어떤 쪽이에요? 어떤 분들은 그냥 예전과 똑같다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제일 몰입이 잘되는 캐릭터예요. 제일 믿을 수 있는 캐릭터.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머리도 단발로 자르고 <하백의 신부>와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제 노력을 조금 알아주시면 좋겠죠. 헤헤.

실크 셔츠와 스웨이드 팬츠, 모두 토즈.

배우는 ‘과정’에서 하기 싫은 일도 있잖아요. 생일이라서 하는 말인데 하기 싫은 걸 하는 게 보통 어른이 되는 거라고 얘기하죠. 죽어도 하기 싫었던 적은 딱히 없었어요. 너무나 행운이죠. 근데 그런 일에 맞닥뜨려도 그땐 인지를 못 할 것 같아요.

왜죠? 일단 일이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 책임감? 네, 그것도 있고요. 아닌가, 생각해보니 하기 싫은 건 안 한 것 같기도 하네요. 아, 너무 안 해서 모르는 건가? 하하하.

하하, 그럴 수 있죠. 그렇다면 크리스탈 버전의 어른이 된다는 건 뭔데요? 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른이 되나요, 사람이?

양가죽 셔츠와 팬츠, 모두 토즈.

하하하. 저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물어보고 싶네요. 저희 엄마만 봐도 너무 소녀 같고 내 친구 같아요. 저랑 친한 언니 중에서는 저랑 스무 살 차이 나는 사람도 있고요. 어느 정도 선을 지나고 나면 다 비슷한 것 같아요.

2017년의 크리스탈은 그 선 위 쪽인가요? 나 어른이야, 라고 생각해본 적은 진짜 없어요. 아직은 뭐 딱히 어린애도 아니지만 그냥 그 중간쯤이지 않을까요? 그냥 여자?

    에디터
    박나나, 정우영
    포토그래퍼
    목나정
    스타일리스트
    김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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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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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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