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비정상회담]은 비정상이다

2018.01.16GQ

남자들만 모였는데?

3년 전인 2014년 겨울, 당시 채 반년을 방영하지 않은 JTBC의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대해 상당히 긴 평론을 쓴 일이 있다. 무려 원고지 60매에 달하는 내용이므로 한줄 요약은 어렵지만 불안요소와 여러 한계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아기의 얼굴이나 새로운 여행지가 아니라면 도무지 새로운 것이 없을것 같았던 2014년의 예능들 중 가장 새로운 것에 가까운 프로그램이라는 분석이었다.

당시 <비정상회담>은 적어도 과거의 것을 답습하거나 유행에 편승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예능 프로그램 속 모두가 산과 들과 바다로 나가고 카메라의 존재를 모른 척하며 관찰의 대상이 되던 때였기 때문에, ‘후미진 구석방’에 모여 앉아 토론 형식의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만으로도 모험으로 보였다. 방송을 첫 회부터 빠짐없이 보면서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에 대해 한국어로 토론한다는 기획이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미녀들의 수다>보다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회 이슈를 다룬다고 느꼈고, 이전까지의 ‘두 유 노 김치’보다는 당연히 나아간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의 반대편에 외국인을 놓고, 이들에게 한국이나 한국 문화에 대한 어떤 정해진 답을 요구해온 이전의 상태를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세계’라고 할 때, <비정상회담>은 이 세계 안에서 정해진 답이 아닌, ‘보기’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방송 초반 <비정상회담>의 패널은 정치적 성향부터 사회 이슈에 대한 태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들로 채워졌고, 그로 인해 외국인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타자로 만드는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모국의 문화에 대해 말한다는 알리바이가 존재하기에 한국의 예능이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어도 언급은 할 수 있었다. 홍석천이 출연해서 ‘탑게이’로 희화화되지 않고도 조심스럽게나마 동성 결혼 이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송이 이전까지 존재했나? 범죄자의 인권에 대해 다양한 예시를 들어가며 청년 세대가 첨예한 토론을 하는 장면을 방송에서 본 적 있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하지 않고 동거 상태로 살고 있는 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 대해 방송에 나와 자연스러운 문화로 언급한다는 것 자체, 그것만으로도 <비정상회담>은 칭찬받을 만한 프로그램으로 보였다. “프랑스의 어떤 문화가 터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자국에서 배우고 몸에 익혀온 삶의 가치관을 배경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의 의견을 밝히는 과정”이 주는 시사/교양적 재미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었다. 결론적으로 <비정상회담>은 “누군가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일들이 가능한 세상이 있음을 확인하고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더 나은 방향을 지향하는 순간을 예능을 통해 경험”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당시 나의 결론이었다. 패널이 남자, 백인 중심이라는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2014년의 <비정상회담>은 문명으로 보였다.

방송이 177회까지 진행된 이후 3년 동안, <비정상회담>에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사이 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결국 공개되지 않은 그 평론이 떠오르는 상황과 마주했다. 당연히 그 글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이 대부분이었다. 에네스 카야의 하차는 정말로 ‘불미스러운’ 정도로 수식하고 그칠 일이었을까? 악습이나 혐오를 문화와 구분하지 않는 패널들의 태도는 어떤가? 나라의 경제적 풍요나 국력으로 패널들을 비교하거나 은연중에 줄 세우는 프로그램과 진행자들의 태도는 어떤가? 한국 대표라고 말하면서 한국 남자, 그 와중에도 부정적인 일면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현무, 유세윤, 성시경의 진행 방식은 이 프로그램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특히 유세윤이 옹달샘 사태 이후로도 진행자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은, <비정상회담>의 ‘국경 없는 세상’이란 그 구석방에 가득한 남자들에게만 가능한 유토피아임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2014년에는 <비정상회담> 속 유세윤에 대해, “‘30대 후반의 한국 미혼 남자’ 자의식으로 한국 대표를 자처하며 토론에 뛰어드는 성시경과 진지한 분위기를 예능으로 변주하거나 놀리고 놀림받는 데 집중하는 전현무 사이에서, 유세윤은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중심을 잡는다”라고 썼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외국인 젊은 남성들이 제2외국어인 한국어를 때로는 자신보다 유창하게 구사하며 토론을 이어나갈 때 경청하는 유세윤은, 여성과 소수자를 비하하는 지독한 혐오 표현을 개그라고 펼치고 있는 동료 장동민과 있을 때 추임새를 넣어가며 그 누구보다 많이 떠드는 유세윤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빠른 속도로 2014년에 내가 본 것들이 착시였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각국 젊은이들의 대표라는 단어를 쓰면서 남성만으로 패널을 구성했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바, 이들이 상정한 세계 속 인간의 기본값은 남자다. 이런 상태라면 패널들 모국의 문화 차이나 개인적 성향의 차이보다는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더 드러나는 공동체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이러저러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래도 그 차이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는 남성이라는 사실 아래서 이들 안의 정상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누가 가장 먼저 ‘알탕 문화’라는 말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상황에 적확한 호명이 아닐 수 없다. 비정상 패널들은 한국을 본격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상치 못한 기회와 모험을 제공한이 나라의 어둠, 특히 남성 중심 문화의 폐단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방송 녹화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것처럼 종종 튀어나오는 에피소드들 속에 회식으로 다져진 남성 친목의 울타리는 너무도 단단해 보인다. 100회를 전후해 패널을 대거 교체한 것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겠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당연히 그들 또한 한국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물며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TV 출연의 기회를 얻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각국 젊은이들의 대표라는 단어를 쓰면서 남성만으로 패널을 구성했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바、이들이 상정한 세계 속 인간의 기본값은 남자다.

2014년 비평의 핵심은 한국 대부분의 TV 프로그램이 ‘한국인, 대한민국, 남성, 제1세계, TV 안’ 의 세계에 머무르려 할 때, <비정상회담>은 적어도 한국인과 외국인의 이분법적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경계에서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이분법은 이 프로그램 안에서 ‘한국인과 가나인과 벨기에인과 미국인과 독일인 등’이 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 이 안은 어떠하냐라고 묻는 대신 그 경계를 흐리게 하거나 더 다양한, 하지만 반드시 둘을 나누는 방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경계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쓰면서도 이런 경계를 흐리는 방식이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식으로 작동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비정상회담>의 초반 독일 대표가 “독일에서 차별은 범죄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 그러니까 한국 방송에서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는 말들이 전파를 탔다는 것만으로 이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KBS <미녀들의 수다>가 여성 패널을 손님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남성 진행자와 패널들이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 뒤 대답을 듣는 쇼여서 불편했던것과 달리, <비정상회담>을 통해서 외국인들이 조금 더 다양한 나라와 민족의 사람들로 분화되고 그들이 각자의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더 진화한 프로그램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미 많이 지적되었던 ‘수다’와 ‘회담’의 차이는 차치하더라도, 이 두 프로그램의 성격에 젠더에 대한 편견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비정상회담>의 변화에 먼저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당시 내 안의 무의식적인 여성 혐오 또한 읽는다.

<비정상회담>의 성공 후 스핀오프 프로그램이었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비슷한 포맷의 대량 생산으로 방송가만의 유행을 만드는 풍조 속에 외국인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외국인이야말로 방송에서 언제나 원하는 ‘그림의 새로움’을 만족시켜주면서 여행 예능의 유행과도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프로그램 중 <비정상회담>과 일대일로 비교해볼 만한 프로그램은 없다. <비정상회담>과 정확히 대칭의 위치에 자리하는 프로그램은 오히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간 KBS에서 방영한 <러브 인 아시아>다. 다문화 가정의 휴먼 스토리라는 프로그램 소개가 말해주듯,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이주여성이다. 대부분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 이민을 온 경우로, 지금 한국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떤지, 고국이 얼마나 그리운지가 소재다. 보통 한국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은 나라 출신인 그녀들에게 한국은 남편의 국가, 시혜의 국가로 존재한다. 이들은 외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한국보다 경제력이 낮은 국가 출신의 노동자로서, 몇 겹에 걸쳐 타자화된다. 누군가의 아내나 며느리로만 존재하며 여전히 ‘한국에 잘 적응했다는 사실’이나 ‘힘든 형편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로 칭찬받는 이들에게서 고유한 정체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정서는 현재도 방영 중인 EBS의 <다문화 고부 열전>으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외국인 여성, 특히 결혼 이주 여성은 완벽히 한국적 정상 가족 서사 안에서만 그나마도 타자로 존재한다.

이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비정상회담>이 문명인을 자처하면서 외면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보인다. ‘한국말 못 하는 며느리들’과 달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남성들은 <비정상회담>을 통해 스타 방송인이나 강연자가 되는, 팔자를 바꿀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세계의 모든 이슈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과거의 나와 같은 사람에게 박수와 칭찬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한다. 이 낙차를 외면하고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한국 여성 이과 대학생을 위해 외국인 남성 인문학 전공자가 강연을 펼치고, 외국인 남성이 한국인 여성에게 어려운 한국어 단어에 대해 ‘맨스플레인’하고, 이러이러한 점 때문에 모국의 여성보다 한국 여성이 좋다고 말하고 그걸 무려 영상으로 만들어 올리면서도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인 동시에 여성 혐오자임을 모르는 외국인 남성들을 목격하게 한, 나에게 <비정상 회담>은 이런 풍경을 낳은 프로그램이다.

성시경은 시즌 1 마지막 회에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보다는 “우리가 몰랐던 한국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의도는 다르겠지만 맞는 말이다. <비정상회담>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남성에게 관대한지,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 없이 쓰는 정상성에 어떤 범주가 포함되는지를 재차 확인시켜줌으로써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던 한국을 다시 보게 해준 프로그램이다. 3년 전의 글에는 “연예인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체험하는 것을 ‘리얼리티’라고 부르는 한국 방송에서, <비정상회담>의 리얼리티는 이들이 지금 한국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준 데 있다”라고 쓴대목이다. 차별을 범죄라고 말하고, 동성혼이 인정되고, 인권에 대해 논의하고, 명예 살인의 명예는 곧 불명예라고 소리 높여 외칠 수 있는 세상이, 이 나라 밖에 분명한 현실로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남자들만 모여서 한다면 어떨까? 오늘 <비정상회담>을 통해 알 수 있는 현실은 미국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 깨닫게 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비정상회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자들에게만 국경 없는 세상’이다. 남자들만 모여 앉아 세상의 정치가 우리 사이에 만든 벽이 있지만 ‘손에 손잡고’ 넘어설 수 있다고 밝게 웃으며 ‘화이팅!’을 외쳐주는 너무도 지루하고 뻔뻔한 세상. 봄에 시즌 2로 돌아온다는 <비정상회담>에도 그런 세상이 펼쳐진다면, 주저없이 채널을 돌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새는 채널을 돌리느니 보통 꺼버리긴 하지만.

“본방 사수”라는 말도 사어가 됐다. TV는 동시대에 뒤처졌다. 한국 사회에서 TV는 여전히 가장 영향력이 큰 매체지만 동시대 감각에 무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책임감마저 없어 보인다. “욕하면서도 본다”라는 전혀 달콤하지 않은 말에 취해 있어도 좋은 걸까? 끌 때 끄더라도 욕 한마디는 시원하게 해야겠다.

    에디터
    글 / 윤이나(대중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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