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서 "프로필에서 학력은 내려버렸어요"

최희서 “프로필에서 학력은 내려버렸어요”

2018-08-23T14:08:40+00:00 |ENTERTAINMENT|

최희서는 호기심이 많다. 궁금한 건 답을 찾고 만다. 그의 마음속, 빽빽한 질문과 답의 일장 일절.

어깨에 걸친 스팽글 재킷은 빅토리아 베컴 by 수퍼노말, 드레스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어깨에 걸친 스팽글 재킷은 빅토리아 베컴 by 수퍼노말, 드레스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키가 커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의외로 크지 않네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배우로서 에너지가 있어 보인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서 좋아요.

힘이 있는 몸이네요.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없이 과감하고요. 카메라 앞에서 어색해하면 다 담기더라고요. 전 “에라 모르겠다” 하고 놔버려요. UC버클리에 연극 전공 교환 학생으로 갔을 때, 현대무용과 신체극, 마임을 배우면서 몸 쓰는 훈련을 했어요. 그 경험이 좋은 재료가 됐죠.

<박열>의 거침없는 후미코 같은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요. 능청스럽다가도 일순 손바닥 뒤집듯 표표해지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흥미로웠어요. 이준익 감독님이 참고할 캐릭터를 주셨어요. <길>의 젤소미나, <길버트 그레이프>의 어니,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트랄라. 셋 다 전혀 다른데 어린아이처럼 야성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모든 것에 직관적이고, 종횡무진 달리는 게 후미코와 닮았어요. 계산 없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여자.

최희서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나요? 감독님이 절 캐스팅한 이유를 얘기해주셨는데, 제게서 후미코의 외길만 걷는 성정과 닮은 면을 보셨대요. 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꼭 하거든요. 주변도 안 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가요. 스무 살 전까진 공부만 했고, 연기를 꿈꾸고는 배우의 길에 매달렸으니까요. 탐탁지 않아 하는 부모님께도 일단 해볼게, 라는 태도였죠. 지금도 엄마는 “넌 정말 뻔뻔한 애”라고 얘기하세요.

여기까지 오는 데 약 8년이란 무명의 시간이 있었죠. 한 번쯤 다른 선택지에 눈을 돌릴 법도 했을 텐데요. 오디션을 80번쯤 보는 동안 “왜 좋은 학교 나와서 연기해요?”라는 질문을 백이면 백 들었지만, 저는 그 질문을 제대로 이해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전 연기 말고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이제 ‘엄친딸’, ‘뇌섹녀’ 같은 단어는 거부 반응이 일어날 지경이에요. 전 배우 나탈리 포트만을 좋아하지만 그가 하버드대를 나와서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한국에선 신인 배우를 ‘무슨 녀’ 같은 말로 규정하려드는 경향이 있어요. 그게 싫어서 공식 프로필에서 학력은 아예 내려버렸어요.

주름 장식 드레스는 마시모두띠.

주름 장식 드레스는 마시모두띠.

회의가 든 위기의 순간은 없었나요? 스물여덟 살쯤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대관료 모으고 포스터 찍어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었죠. 생활이 안 되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결국 답은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난 거지가 돼도 이걸 하고 싶어”였어요. 그때, 지하철에서 대본 리딩을 하던 제게 신연식 감독님이 명함을 주셨어요. 가장 힘든 시기에 <동주>의 제작자를 만나 여기까지 왔으니 운명적이었죠.

그리고 <박열>로 여우주연상과 여자신인상을 동시에 받았죠. 스태프의 말이 여과 없이 방송을 탄 해프닝도 있었고요. 연관검색어에도 올랐는데 누가 보면 제가 빡빡이라고 한 줄 알겠어요. 하하하. 이준익 감독님은 오히려 절 걱정해주시더라고요. 유명세는 복주머니가 아닌 독주머니가 될 텐데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요. 전 그냥 신기했어요. 충무로 대한극장 가는 길에 커다란 대종상 동상이 있어요. 볼 때마다 와, 난 언제 저런 거 타보려나 했는데, 아침에 그 트로피 두 개가 눈앞에 있으니 이상한 거예요. 아직도 비현실적이에요. 후미코라는 캐릭터를 만난 게 새삼 감사할 뿐이죠.

후미코는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몸을 던지는 여자죠. 그런 신념이 있나요? 저는 단지 그런 걸 믿어요. 관계에서도 연기에서도, 아주 진실해야 한다고. 저는 항상 모든 일에서 진짜가 뭔지 많이 생각해요. 나는 왜 배우로 살아가고 있는지, 배우로 산다는 건 어떤 것인지 계속 스스로에게 묻죠.

진짜라는 건 뭘까요? 계속 파내려가듯 묻고 묻다 보면 마지막에 탁 걸리는 게 있어요. 왜? 왜? 왜?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은 질문의 마지막 답.

이젠 답을 찾았나요? 찾는 중이에요. 최근 제가 고민하는 건, 배우로서 주어지는 역할을 다 소화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필모그라피의 색을 만드는 게 맞을까예요. 결론은 제 마음을 움직이는 시나리오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것이었어요. 전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고, 그걸 굽히지 않을 거라면 동의하지 않는 역할을 진실하게 연기할 수는 없겠단 생각이요.

어떤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여요? 차기작 <아워 바디>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좋은 시나리오라 해도, 여성 캐릭터는 섹시한 요부로 나와서 눈을 즐겁게 하고 나가는 역할이면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제작자는 “요즘엔 페미니즘이 뜨잖아, ‘남혐’이 대세잖아” 이런 식으로 뜨는 맛집 말하듯 여성 캐릭터를 넣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대상화한 인물엔 공감이 갈 것 같지 않아요. 지금의 저에겐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공감이 되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져줄 수 있는 시나리오가 가장 좋은 이야기로 다가오네요.

스스로에게도 남들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걸 즐겨하네요. 전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 요즘 제 관심사는 왜 비트코인이 이렇게 열풍인가예요.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나요? 그런 편이에요. 전 저랑 다른 사람한테 끌려요. 까다롭고 섬세한 사람보다는 덤덤한 이공계 사람들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남자를 만날 때 배우는 관심 없어요. 예술가한테는 그냥, 관심이 안 생겨요.

연애는 해요? 저한테 사랑은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스무 살 때부터 연애는 늘 진행 중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이라고 오해하더라고요. 전 한 사람을 오래 만나서 지금까지 네 명 만났어요.

사랑은 최희서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인간에게도 배우에게도 필수적인 것. <라비앙 로즈>에서 에디트 피아프가 이런 말을 해요. “여성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은? 사랑. 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 어린이에게는요? 사랑.” 저는 배우에겐 체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금기시되는 환경이 안타까워요.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화두가 되고 모든 일의 중심에 있으니까요.

후미코도 사상가, 연인으로서 박열을 사랑했죠. “나는 박열의 본질을 알고 있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누군가의 본질을 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후미코는 그 뒤에 이렇게 말해요. “그의 과실과 결점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것을 넘어서 그를 사랑한다”고. 그 사람의 본질을 안다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제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 그의 본질을 알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싫어하는 친구에 대해 쟤는 저래, 라고 한다면 그게 정말 그의 본질일까요? 제 프레임 안에서 본 단면만을 아는 거겠죠. 저는 그를 절대 알 수 없어요.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지점이 있어요? 연기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건 선입견을 갖고 캐릭터를 바라보는 거예요. 캐릭터가 교사라면 “교사는 이래야 돼”라는 생각에 갇히게 되는 거요. 그래서 전 교사 역할을 하게 되면 교사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는 보지 않아요. 대신 교사 지인을 찾아서 물어보거나, 다큐멘터리 속 교사의 모습을 찾죠.

벨벳 슬립 드레스는 푸시버튼.

벨벳 슬립 드레스는 푸시버튼.

“<라비앙 로즈>에서 에디트 피아프가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해요. 여성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것은? 사랑. 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 어린이에게는요? 사랑.”

‘진짜’에 다가서기 위해 항상 분투하네요. 후미코의 마지막 대사를 인용한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었어요. “산다는 것은 그저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이 비록 죽음을 향한 것이더라도 삶의 부정이 아니다. 긍정이다.” 생각하는 것에 따라 말하고 움직이고 표현하는 게 배우란 직업의 본질이란 생각을 했거든요. 배우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연기하는 게 제 의지대로 살아가는 일이 될 거예요.

직접 시나리오를 써보는 건 어때요? 장편 하나 쓰고 있어요. 공모전에서 떨어진 작가 지망생이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과 별장에 놀러 갔는데, 그 별장에 좋아하는 시인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런데 볼수록 그의 삶에 그의 시에서 느껴졌던 숭고함이 없어서 실망하고, 시인은 너 같은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해요. 울분과 실망이 가득한 여름휴가가 되죠. 마지막에는 시를 한 편 쓰겠죠? 블랙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일 거예요.

파올로 소렌티노 영화 한 편 본 느낌인데요? 역설에 흥미를 느끼는군요. 정말요? 저 그 감독 좋아해요. 하지만 연출을 잘 못 해서. 하하. 학생 때 연출한 단편도 꿈이 으스러지는, 상상했던 기대가 깨지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꿈을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너무 큰 사람이라서 반대급부로 그런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글 쓰는 걸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좋아했어요. 아주 어릴 땐 굉장히 발랄한 애였는데,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십 대를 보내면서 내성적이 됐어요. 어디서든 이방인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울했고 외로웠죠. 문학은 좋은 도피처였어요.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그리고 박경리의 <토지>에 푹 빠졌죠. 여름방학 동안 20권을 다 읽었어요. 주인공 최서희를 사랑했어요.

최서희의 불 같은 성정, 고집, 이루고야 마는 끈기. 최희서와도 분명 비슷한 구석이 있네요. 제 예명 최희서도 최서희와 닮아서 택한 거예요.

예전에 야생화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글을 쓴 적 있죠? 지금은 어때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본연의 색을 가진 사람이요. 굽히지 않고서도 살아남는. 그리고 어우러지는. 그럴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