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딩크 부부가 말하는 ‘자유’

2018.02.14GQ

우리 부부는 세상에 좋은 것이 서로밖에 없다. 나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있고, 철이 들었고, 인구 절벽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 단지 우리 부부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다.

과거의 나는 아이를 꼭 낳고 싶었다. 내 첫 시집의 표제작 <에듀케이션>은 언젠가 낳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딸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나는 잠시만이라도 행복하고 싶었다. 딸을 낳고, 딸이 웃으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종종 기쁠 수 있다는 것이 태어날 이유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괴로울 일이 훨씬 많겠지. 그래서 딸의 이름도 미리 지었다. 김아니라고 부르자. 그러면 괴로울 때, 세상이 이해되지 않을 때, 아니야, 아니야, 자기 이름만 자꾸 불러도 마음이 차분해질 거야. 이런저런 상상을 참 많이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나는 시인이고 아내는 출판 편집자다. 우리는 4년차 부부지만, 연애 기간은 거의 없었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은 꽤 길었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판단만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지 2주가 안 되어 혼인신고를 했다.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결혼식도 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알린 다음에는 결혼식을 올려야 할지도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어디서 살지? 일단 집부터 알아보자. 우리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내 아내와 나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나는 애를 낳고 싶었고 아내는 아예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고, 나는 사람이 많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시골도 괜찮았고, 아내는 도심이 아니면 안 되었다. 나는 가습기나 공기청정기가 필요했고 아내는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닮은 점도 있다. 우리는 욕심이 없다. 나는 버는 것에 비해 과소비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봤자 맛있는 것을 먹거나 택시를 자주 타는 것 말고는 없다. 우리는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것뿐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 부부는 세상에 좋은 것이 서로밖에 없다. 여행도 싫어하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으며,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정말로 귀찮아한다. 단지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나더러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는 것 같다거나, 철이 덜 들어서 그런다거나,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인구 절벽이 세상의 종말인 것처럼 묘사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아이를 낳을 자신이 있고, 철이 들었고, 인구 절벽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 단지 우리 부부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올해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전셋집으로 옮길 생각이다. 결혼 4년 차에 접어들고있기 때문에 빨리 대출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방 한 칸짜리 집에 살고 있는데, 점점 집이 좁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집을 옮기고, 출판사를 만들고, 내 책을 외국에 소개하는 일을 하자. 일을 조금만 하자. 우리는 일을 싫어하니까. 우리는 계획을 좋아해. 계획은 재밌고 일은 재미가 없어. 계획하는 게 일이면 좋겠어. 계획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아이를 계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낳으면 어떤 애가 나올 것 같은지에 대해서는 얘기해봤지만, 언제, 어떻게, 왜 낳을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노후대책은 종종 죽음 얘기로 끝났던 것 같다. 노후를 위해 아이를 낳는다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비이성적이다. 늙으면 어쩌지? 죽어야지. 늙었을 때 가난하면 죽는다. 내 생각엔 이게 더 이성적인 얘기다. 노벨상 받기로 했잖아. 노벨상 받으면 노후는 해결되겠지. 그래, 그럼 되겠다. 나는 정말 받을 것이고, 글도 열심히 쓰니까. 네가 책도 많이 만들어주면 되겠다. 그래, 그러면 되지. 그런데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쩌지? 그러면 안락사로 가자. 그래, 그러자. 우리에게 노벨상과 안락사는 출산보다 구체적인 현실이다.

딩크로 살기로 한 것을 어떤 신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출산은 우리 부부에게는 절대로 계획되지 않을 비이성적인 판단에 불과할 뿐이다. 내 아내는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출산과 육아는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어머니들은 종종 “내가 너를 얼마나 힘들게 낳았는데”라고 말하곤 한다. 이가 빠지고, 죽을 위기도 수차례 겪었다고들 한다. 사랑이 희생을 낳는다는 것은 알겠다. 이미 희생한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내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통 중의 하나를 어째서 감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한 고통이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까 봐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다. 희생하지 않아도 나와 아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을 찾을 것이다.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낼 것이다. 일단 우리는 아이를 낳는 것보다 <요츠바랑> 읽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한다. 그러면 <요츠바랑>을 읽으면 된다.

우리가 애를 낳지 않는 이유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이다. 사회가 어떻든 애를 낳지 않겠다는 거다. 딩크 부부에게 필요한 자유는 아이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냥 ‘자유’다.

나는 딩크라는 것에 당당하지만 부모가 언제 애를 낳을 거냐고 물어보면 “에이, 낳게 되면 낳겠지”하고 얼버무리곤 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대화로는 절대 부모 세대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에게 동의해야 한다. 더 거시적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절대로 이데올로기를 수정할 수 없다. 내 힘으로는 절대 이 사회와 국가를 수정할 수 없다. 통념은 바뀌지 않는다. 통념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통념은 무너지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보기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이 사회의 비극적인 병폐다. 사회의 통념과 합리적으로 거래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생활방식이 비극적인 병폐라는 그들의 주장을 일정 부분 동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많은 이가 말하는 ‘아이에 대한 책임’이라는 말이 굉장히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이미 부과된 경제적 책임이나 사회적 책임이 더 무거워지기 때문에 애를 안 낳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압박이 더 심했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애를 많이 낳았다. 만약 우리 부부도 그 시절에 태어났으면 애를 낳았을지도 모르지. 여기저기 부모와 친인척이 몰려와서 그러면 안 된다고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는 다 줬다면, 그냥 한번 낳고 말자, 낳아줘야 되는 건가 보다 했을지도 모른다. 애 낳아야 더 열심히 일하고, 돈도 많이 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힘으로! 얼마나 끔찍한가? 우리 부부가 딩크인 핵심적인 이유가 경제적인 이유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애를 낳지 않는 이유는 차라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이다. 돈이 있든 없든 애를 낳지 않겠다는 거다. 사회가 어떻든 애를 낳지 않겠다는거다. 딩크 부부에게 필요한 자유는 아이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냥 ‘자유’다.

다행히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한테 애가 없어서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게 다 친구를 잘 사귀어서 그런 거겠지만. 내 주변의 기혼자들은 다들 딩크족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냐고 서로에게 묻지 않는다. 우리는 부부 동반으로 어딜 놀러 가지도 않는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물었다. 어째서 애를 낳고 싶지 않느냐고. 다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럼 어쩌면 낳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낳을지도 모른다고 헛된 오지랖을 부리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내 친구들에게 미래가 걱정되지 않냐고는 묻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는 지금 행복하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여보, 너는 첫 시집을 네가 언젠가 낳을 딸아이를 위해 썼잖아. 딸아이 이름도 이미 지어뒀잖아. 김아니잖아. 그때는 네가 없었잖아. 그때는 기적이 필요했거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내 미래에 있기를 바랐거든.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 너는 지금 네 친구의 결혼식에 갔고, 너의 이름은 김아니이고, 그건 내가 지은 내 딸의 이름과 몬데그린이 된다. 젊었을 땐 너무 괴로워서 기적이 필요했지.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생활이고, 목표이고,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은 거절에 있다. 나는 샤워를 하면서 내 아내의 이름을 자꾸 부른다. 밖에서 왜 부르냐고 물어보면 그냥 불렀다고 한다. 나는 행복하다.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에디터
    글 / 김승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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