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가족의 탄생

2018.02.18GQ

나와 8년간 함께한 하우스 메이트 L은 이성 친구지만, 연인은 아니다. 정부의 주택공급정책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우리는 “그냥 혼인 서류에 도장 찍어버릴까” 하는 말을 종종 해댔다.

이사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금 거주하는 집이 새 주인에게 팔렸기 때문에 계약 만료일에 집을 비워줘야 합니다.” 강추위와 함께 부동산으로부터 날아온 문자다. 올해 상향 조정될 다주택자 양도세를 피하고자 집주인이 급작스레 집을 내놓은 바람에 나와 하우스 메이트는 5년 동안 정을 준 둥지를 떠나 새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에 서울로 이주한 이후 무수히 집을 옮기며 갖게 된 이사에 대한 바람은 언제나 한결같다. 기왕 이사해야 한다면 지금 사는 집보다는 나은 곳으로 가고픈 마음.

문제는 돈이다. 심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준비 없이 날아든 소식에 우리는 급급히 전세자금대출을 알아보며 SH와 LH공사의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했다.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해서 국가주택 공사를 들여다보다 알게 된 사실은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미혼모 가정과 함께 신혼부부가 각종 주택공급정책의 최우선 대상자에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보호 차원이라면, 신혼부부의 경우 결혼 및 출산을 장려하는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대책이었다. 나와 하우스 메이트 L은 지난 8년을 ‘가족’으로 지내왔지만 국가가 승인하지 않은 ‘가족’이기에 그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나와 L은 이성 친구지만, 연인은 아니다. 20대 전반을 함께 살며 얼마간 나의 연인과 셋이 동거한 적은 있다. 우리 셋의 관계는 커플과 친구의 관계가 아닌, 셋이 각자 우정의 관계로 맺어진 식구였다. 뿐만 아니라 항상 방이 세 개인 집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다양한 동거인이 집을 매개로 한 공동체로서 살아왔다. 식구의 의미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뜻한다면, 이들과 우리의 관계는 자취생 커뮤니티라기보다는 삶을 공유하는 한 식구였다. 적어도 내게는 일 년에 두어 번쯤 볼까 하는 혈연 가족보다 지금 이곳에서 매일 밥을 먹고 안부를 주고받는 동거인들과의 관계가 훨씬 더 가족이란 이름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과 남성의 결합, 즉 이성애를 전제하기에 지금까지 난 결혼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애초 이성애 결혼 제도에 속할 수가 없기에 스스로를 비혼주의자라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실제 나와 L의 생활은 비혼인의 삶과 비슷하다. 새집을 알아보며 우리는 주택공급의 수혜자가 되고자 “그냥 혼인 서류에 도장찍어 버릴까”라는 말을 종종 해댔다. 답답한 마음에 농담으로 던진 말이지만, 실행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실제 우리의 관계는 섹스만 없을 뿐 결혼한 커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같은 관계를 ‘의식의 가족’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가족주의나 혈연을 매개하지 않아도 삶의 지향점을 공유하고 가족적 친밀성과 돌봄이 가능한 가치 중심의 공동체를 뜻하는 말을 찾고자 함이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던 동거인은 탈북자,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 탈북자, 이성애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녔었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생활의 지향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마음 맞는 친구들과 동거하게 된 것이다. 단지 국가에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함께하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살았다. 우리 집과 멀지 않은 한 빌라에는 12인 내외의 성소수자와 비혼인이 함께 사는 ‘무지개 하우스’라는 주거공동체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이 삶의 형태와 지향성이 비슷한 사람들이 가치 중심으로 모여 함께 사는 것이 대안적인 가족 모델이라 생각한다.

나에겐 가족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다. 한 번은 양심적 병역 거부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통영에서 독방 생활을 할 동안 물심양면으로 나의 옥바라지를 해준 이는 다름 아닌 나의 동거인들이었다. 그들은 매일 서신으로 나의 안부를 걱정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10분간의 짧은 면회를 위해 매달 서울에서 통영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차를 타고 오가며 나를 챙겨주었다. 무언가에 대해 가슴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부재한 환경에 놓이면 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게 되었을 때 사랑에 대한 진정한 사유가 시작되고, 평화에 대한 갈망은 전쟁 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감옥의 수인보다 자유와 가족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이는 없을 것이다. 독방 생활로 철저히 고립되었을 때 비로소 난 인간이 관계적 동물이라는 사실과 지금 내 곁을 헌신적으로 지켜주는 이들이야말로 가족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 우리는 국가가 승인한 가족만 있고 개인이 욕망하는 가족은 부재한 20세기의 가족 제도 속에 살고 있다. 구시대적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독립적인 주체가 결속될 수 있는 다원적 공동체가 절실하다.

또 다른 계기는 미국에서 였다.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청되어 작년 여름은 미국에서 지냈다. 미전역에서 모여든 다양한 창작자들과 두 달여간 지내며 그들의 인간관계와 가족구성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가장 친하게 지낸 소설가 코린은 트랜스젠더 남성과 결혼한 뒤 또 다른 이성애자 커플과 그들의 자녀와 함께 5명이서 한 지붕에서 살았다. 코린 커플은 오픈 릴레이션십으로 서로가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을 허용했다. 레즈비언 극작가 엠마는 한 달 뒤 뉴욕에서 동성 파트너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이미 동성 연인과 결혼한 레즈비언 영화감독은 입양한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돌잔치에 나를 초대 했었다. 15년간 비혼주의의 신념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 중인 이성애자 커플도 있었고, 종종 연애는 하지만 성관계는 가지지 않는 무성애자도 있었다. 평범한 이성애자도 있었지만, 상당수가 파트너 간 오픈 릴레이션십을 지향했다. 토종 한국인으로 살아온 내게는 상상하기 힘든 다양한 관계 및 가족 형태가 놀라웠다. 동성애자라서 법적 가족구성권이 박탈된 나는 부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이들의 다양한 관계는 사회적 규범에서 자유로운 예술가 커뮤니티였기에 더욱 두드러졌겠지만,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관계를 오랜 시간 고민해온 서구의 역사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비혼과 저출산 현상을 오래전부터 경험했고, 가족과 사랑의 개념을 회의하며 대안적인 공동체를 고민해왔다. 프랑스는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미혼모, 편부모, 입양인, 이민자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 형태를 인정하고 모든 지원을 평등하게 했다. 21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동성 결혼 및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인정하는 시민 결합이 도입되며 다원주의적 사회 공동체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성 부부 관계를 기반으로 한 일부일처제의 혈연 공동체라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구태의연한 가족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혼부부가 많아져야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고 인구 절벽을 앞둔 고령화 시대에 생산 가능한 인력이 늘어날 것이라는 희망은 산업화 시대의 환상이다. 오히려 1인 가구의 증가와 저출산은 개인을 자본주의 사회의 값싼 노동 인구로만 취급하는 국가의 관점에 대항한 현 세대의 저항에 가깝다.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배타적인 이성애 가족 제도의 불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고, 이상적 가족이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배웠다. 부모를 반면교사 삼게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낭만적 아우라로 치장되어 있으나 전통적으로 결혼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은 채 무급 가사노동으로 유지되는 가부장적 제도이자, 처지가 맞는 계급 간의 경제 공동체일 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일이 아니며,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두 성인의 인생을 담보로 하는 행위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삼포 세대의 ‘포기’만 문제시했지,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보지 못했다.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최선은 아닐지언정 다른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행위가 수반된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탈조선을 꿈꾸는 삼포 세대의 욕망 이면에는 내 자신의 삶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선택이 숨겨져 있다. 삼포세대가 기어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기 존중과 자아실현과 같은 개인에 대한 가치다. 일반적으로 저출산은 고용·주거 등의 경제 자본의 결핍으로 벌어진 현상이라 분석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개인에 대한 가치와 공동체에 대한 가치가 전도된 현상이다. 혈연 가족은 과거 농경사회에서나 어울릴 법한 마을 공동체의 형태이며, 가정을 경제 공동체의 토대로 자녀 양육과 함께 사회적 풍요를 기대했던 건 산업화 시대에나 가능했다. 사회 발전과 경제적 번영을 욕망한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그들의 그늘에서 자라난 우리 세대에게는 자기 존중의 욕망이 강하다. 내가 있어야 가족이 있고 국가가 있다. 사회적 욕망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귀 기울이는 세대에게 기성 가족 모델이 맞아떨어질 리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왕자님과 공주님의 사랑 이야기로 귀결되는 동화를 읽으며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만이 정상적인 것으로 교육 받았다. 또한 가정-초·중·고등학교-대학교-군대-취업-결혼-출산-노후로 이어지는 삶의 내러티브를 따라야지만 도태되지 않는다는 집단적 압력 속에서 자랐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 기준에 부합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세대에 이르러 젠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그에 기반한 한국인의 규범적 내러티브는 조금씩 의심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저출산은 사회적 위기로만 인식되었지만, 달리 보면 집단주의의 정념이 지배해온 한국 사회의 ‘개인’에 대한 다른 접근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그에 기반한 ‘다원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을 자랑하는 국가는 신혼부부를 모시고자 예산을 퍼붓듯 지원하지만 정작 실효성은 없다. 현 시대의 살아가는 이들의 변화하는 욕망을 읽어내지 못한 채 헛된 발길질만 해대고 있을 뿐이다. 청년세대의 사회안전망은 중요하다. 그러나 주거와 고용이 안정화되더라도 종래와 같은 가족 제도에 편입되려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경제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편협한 사고로 인간관계를 재단하고 제도화하는 국가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우리는 국가가 승인한 가족만 있고 개인이 욕망하는 가족은 부재한 20세기의 가족 제도 속에 살고 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과 공동체는 족쇄가 될 뿐이다. 곧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3분의 1을 차지할 될 한국사회에서 고립된 1인 가구, 파편화된 개인성을 넘어서려면 공동체 윤리는 앞으로 더 중대해질 것이다. 구시대적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독립적인 주체들의 개인이 온전하게 타인의 삶과 결속될 수 있는 다원적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이 절실하다.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에디터
    글 / 김경묵(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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