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커플의 캐나다식 웨딩

우리는 토요일 아침 법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키스하라는 주례의 말에 둘이 동시에 키스하려다 방향이 엇갈려 웃음이 터졌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였다. 옥탑방으로 이사하던 초겨울에 처음 연락을 주고받은 아내는 취업 준비생이었고, 나는 갓 1년 차를 넘긴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그러니까 동성혼이 법제화된 나라에서 동성의 배우자와 결혼 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적도 없다. 박봉과 야근에 시달리며 먹고사는 것 외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초년생이었던 나에게, 생경한 서울 살이 중 만난 아내의 첫인상은 동화 ‘시골쥐와 서울쥐’의 서울쥐였다. 나는 서울쥐와 데이트하며 가보지 않은 장소와 처음 맛보는 음식,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가며 빠르게 서울을 익혔다. 아내가 인턴으로 취업해 내가 일하던 청담동에서 일하게 되자, 우리는 일하는 중간중간 점심과 저녁 시간을 쪼개 청담동 명품 거리 사이의 순댓국집에서 밥을 먹으며 데이트를 했다. 청담동과 나의 옥탑방을 오가며 연애하던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물었다. “우리 이민 가지 않을래?”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성소수자들에게 결혼은 복잡한 문제다. 사회나 가족으로 인해 동성 연인과의 관계가 위기에 봉착할 때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멀리 떠나버릴까?”라는 대사는 퀴어 영화의 단골 클리셰일 정도니까. 미드에 또는 할리우드 연예 뉴스에 동성 배우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입양, 출산하며 ‘평범’하게 사는 커플들이 등장한 후 몇몇의 이혼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도, 내 주변에서는 그런 삶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동성혼 합헌 결정을 내렸고, 대만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동성혼을 법제화했으며, 일본의 몇몇 지자체와 기업도 동성 커플에게 이성 커플과 같은 혜택을 제공하는 2018년이지만, 여전히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결혼은 위기이며 비극이고 때로는 속박이며 형벌이다. 한국은 결혼을 진정한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로 여기지만, 동성애자들에겐 내가 하고 싶은 상대와는 할 수 없되 이유 불문해야 한다고 강요당하는 요상한 제도다. 동성애자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가족들에게 미리 ‘밑장을 깔’ 요량으로 독신주의를 주장하면 “그런 말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시집간다”는 말로 웃어 넘겨버리다가, 성인이 되어서도 연애 상대를 밝히지 않거나 결혼 생각이 없어 보이면 하자 있는 사람 취급을 한다. 비슷한 이유로 아내는 어릴 적부터 비혼주의자였다. 이렇듯 우리에게도 결혼이란 속 썩이는 모순 덩어리였다.

이민을 가자고 한 아내의 말에 이유를 묻지 않고 수긍한 건, 퀴어 영화처럼 로맨틱한 순간은 아니었다. 갓 취업한 아내와 피곤에 절어 금요일 밤을 ‘치맥’으로 달래며 커리어와 미래에 대해 얘기할 때, 아내가 토로하던 불만은 업계에 여성 임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일하던 마케팅 홍보 및 광고업계는 여성이 다수 종사하는 직군임에도 가끔 만나는 여성 중역들은 일과 가사와 육아를 저글링하는 초능력자 아니면 과로로 인한 병가에서 돌아온 ‘병 파이터’라고 했다. 출중한 능력으로 임원의 자리를 지켜낸 여성들의 평판은 종종 ‘독하다’는 말 한마디로 압축됐고, 그 표현이 칭찬으로 통하는 것도 괴이하다고 했다. 대표적인 여초 직군인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나의 2년 차 연봉은 2천만원이었고, 아내의 불만은 나의 턱없이 낮은 연봉을 만나 불꽃놀이처럼 터져버렸다. 우리에게 결혼은 그저 남의 얘기였던 데다가, 이성애자 신혼부부에게 주어지는 각종 세제 혜택이나 주택제도, 대출 상품도 누릴 수 없으므로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경제적으로 독립했지만, 열심히 일해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밥 좀 먹으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소비는 고사하고 미래를 대비할 여력조차 없었다. 물론 결혼이 아닌 동거는 가능한 미래였다. 하지만 우리가 주말을 보내던 옥탑방에서 5분 거리의 집에 살던 여성이 대낮에 강간당하고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가구에 따라오는 치안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레즈비언 인생의 난이도를 한층 높였다. 이민을 떠난다 해서 우리의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일단 떠났다가 1, 2년 후 돌아와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겠다는 판단에 나는 “그래, 떠나자”고 답했던 것이다.

오후 반차를 쓰고 만난 이민 컨설턴트는 만나자마자 해외가 얼마나 날씨가 좋고 자연이 아름다운지, 살기가 좋고 여유 있는지, 외국 생활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바빴다. 동성혼이 가능한 곳으로의 이민을 문의했더니 난민으로 인정받아 이민한 동성애자 커플의 사례를 소개해주며, 가족들로부터 감금 및 입원 당했거나 폭행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인 중에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된 사례를 보고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대부분 병역 의무가 동반되는 사례였고,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 에피소드를 쉽게 떠올릴 수는 있어도 그걸 자료로 입증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목적지를 캐나다로 결정하고 현지에서 취업 후 이민을 해보고자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했다.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아내는 주변인들로부터 시집갈 나이에 왜 해외를 가냐, 경력에 공백이 생기면 재취업 어렵다고 시달림을 당했고, 아내의 상사는 남편감을 따라 캐나다에 가는 것이라 확신했다.(이것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우리에게도 남은 미련이 있었기에 일부러 출국일을 18대 대선 바로 다음 날로 정했다. 그 불안은 대선 결과를 보고 말끔히 말소됐고, 그렇게 나는 2012년 겨울 한국을 떠났다.

캐나다에 살면서는 굳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아도 됐다. 먼저 묻는 사람도 드물지만, 배우자가 여성임이 드러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아내가 아플 때 회사에서 조퇴하거나, 회사 파티에 함께 참석하거나 하는 식으로, 일상적인 간접 커밍아웃을 매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선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가족을 정의하고 소개한다. 예를 들어, 아내의 상사는 함께 산 지 오래인 배우자를 ‘걸프렌드’라 하고, 나의 동료는 연인과 집을 공동으로 구입해 살고 있지만 결혼식을 올릴 계획은 없다고 한다. 나는 ‘레즈 가정’을 이루기까지 여러 호칭을 시도하다가 아내를 ‘아내’라 부르기로 했다. 여자친구나 애인 등 혼동을 주는 호칭보다는 확실하게 우리의 관계를 표현할 호칭이 필요했고, 동성 배우자에게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확장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아내는 나를 ‘파트너’ 또는 ‘여자친구’라고 부르는데, 아내 또는 와이프라고 부를 때 연상되는 전통적인 혼인 관계에 갇히기 싫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레즈 가정’을 이루기까지 여러 호칭을 시도하다가 아내를 ‘아내’라 부르기로 했다. 확실하게 우리의 관계를 표현할 호칭이 필요했고, ‘아내’의 의미를 확장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해외에서 살면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보다 인종 차별이 더 크게 느껴지지 않냐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인종뿐 아니라 다른 차별도 있지만,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와 그 합의를 따르는(혹은 척이라도 하는) 구성원에 대해 믿음이 있다”고. 한마디로 차별을 받지만 차별을 받았을 때 보호받을 창구도 있다는 말이다. 현재 내가 일하는 회사는 입사 시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출신 국가, 나이, 장애, 혼인 여부 등에 대한 차별금지에 동의하는 서류를 필수로 제출해야 하며, 지난 미국 대선 이후에는 이민자에 대한 차별 금지 내규를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세금을 내는 나라와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차별 당하기 쉬운 부분을 언어로 명시하고 공유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대목이다.

현재 탈조선과 페미니즘이 화두가 된 한국에서 상호 교차성 페미니즘이나 “내 나라에서 2등 시민으로 사느니 차라리 나라를 떠나겠다”는 요지의 논의가 활발하고, SNS를 통해서도 이민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모님의 지나친 통제나 강요, 간섭도 빠지지 않는데,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다음 날 캐나다로 출국했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부모님의 딸로서 함께 살기가 힘든데 결혼밖에 독립할 길은 없고, 해외로 떠나려고 하니 결혼식은 꼭 올려야 한다기에”라고. 그때의 나는 이성애자가 한국에서 누리는 혜택들이 마냥 부러워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와 나는 같은 것을 원해서 떠나왔다. 우리에겐 내 의지로 삶을 살 자유가 필요했다. 해외로 이민을 가서 동성 결혼을 한 내게 고민 상담을 하는 이들에게 이민 정보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떻게 살아가고 누구와 관계를 맺을 것인지, 내 의지를 분명히 말하고 행동할 자유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 못한 채 이민이라는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한국에서도 더욱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지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레즈비언인 내가 캐나다에서 결혼했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다. 캐나다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동성혼을 한 커플을 유니콘 보듯 신기해하고, 한국의 성소수자 친구들도 결혼 상대의 성별을 조심스레 묻는다. 성소수자라면 누구나 사회생활 하다 보니, 혹은 부모의 기대에 따라 이성과의 결혼을 택해버리는 옛 친구 하나쯤은 있으니까. 우리가 정착한 캐나다의 퀘벡주는 지난 30년간 법적 혼인을 하는 인구가 캐나다에서 가장 많이 줄어든 주다. 법적 혼인과 동거, 사실혼 관계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캐나다의 연방법을 고려해도 동일 기간 캐나다 전체에서 혼인하는 인구가 2/3 수준으로 줄어든 반면 퀘벡은 반이나 줄었고, 따라서 사실혼 커플이나 1인 가구도 흔히 볼 수 있다. 아내는 혼인제도보다 유연하고 대안적인 생활동반자법을 지지하고, 캐나다에서 동성 동거 커플로 사는 것은 아무런 불편함이 없으므로 굳이 법적 혼인을 할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토요일 아침 법원에서 반지 교환도 없는, 주례를 당황하게 한 결혼식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키스하라는 주례사의 말에 둘이 동시에 키스하려다 방향이 엇갈려 웃음이 터졌던 추억이 남았다. 굳이 법적 부부를 선택한 까닭은, 캐나다에서는 당연한 권리이지만 한국에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한국어로 생각하는 한국인이고, 카테고리가 더 늘어난 소수자이자 이민자다. 우리는 죽을 때도 캐나다의 관은 어떻게 짜는지 몰라 긴장하며 헤맬 것 같다는 농담도 하고, 아내의 어머니는 여전히 듣도 보도 못한 동성 부부의 결혼 생활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혼란스러워하신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의 자유를 찾은 경험이 생겼고, 앞으로 닥칠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원하는 바를 찾을 수 있는 자신과 용기가 생겼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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