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2018.02.20GQ

“저런 애들이 시집은 일찍 간다”고? 내기하자. 판돈에 이자까지 매겨서. “나중에 외롭지 않겠냐”고? 누군가와 함께 살면 덜 외로울 거라고 자신하나? 무엇보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 나 자신 말이다.

연말에 가족과 친밀한 다양한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에 간 일이 있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쏟아질 ‘결혼은?’에 대한 대비는 마친 상태였다. 나에게는 마법의 문장 ‘그러게요’가 있었던 것이다. “남자친구는 있니?”, “그러게요.”, “결혼은 곧 해야지?”, “그러게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지만 정말 예상치도 않은 질문이 오면, 이런 나마저도 말문이 막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건 바로 이 질문이다. “아이고, 이나야. 결혼은 포기했니?” 네? 포기했냐고요? 이건 뭔가 ‘그러게요’로는 답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러게요”라고 말해버리면 결혼이 너무나 간절하고 꼭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고 말아버린 것 같지 않은가. 사실은 포기했냐고 묻든 말든 넘겨버릴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그 질문에만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내 스스로도 나의 비혼이 내 선택이 아니라 포기일 수도 있지는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며칠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얻은 답은, 그 질문의 강도가 다른 질문들과 달리 무례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이며, 진심으로 놀라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비혼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혼인 시장에서의 후퇴나 포기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나는 결혼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고 비혼을 선택한 사람이다. 이념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방향 정도로 ‘주의’를 정의한다면, 비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성애자이고 연애도 하고 연애 감정도 느끼고 섹스도 하고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지만,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단 한 이성과의 법적인 계약인 혼인이라는 제도를 신뢰하지 않고, 그 제도에 묶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비혼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청년 세대의 가난,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 이전 세대와 달리 결혼이 필수 조건이 아님을 인식한 점 등이 여러 겹으로 겹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공고한 가부장제의 유령이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보다 강력한 이 사회에서는 도저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다고 판단해 비혼을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내가 비혼인 것은 사회 자체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개인적인 기대감이 전혀 없는 점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만약 내가 덜 여성 혐오적인 사회에 살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해도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비혼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연애를 시작한 또래 친구들보다 연애라는 관계에 진입한 게 늦은 편이었고, 늘 뻔하디뻔한 “저런 애들이 시집은 일찍 간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기 할래? 내가 너보다 먼저 결혼하는지 아닌지?”라고 되묻곤 했는데, 진짜 내기를 했다면 한마디 말이 비트코인이 되어 돌아오는 경험을 했을 텐데 아쉽다. 결혼식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결혼, 특히 식과 관련한 고정된 형식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뭘 또 그렇게까지’라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결혼에 대한 생각 중에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결혼이 가족과 가족의 결합인 부분을 가장 싫어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가족을 사랑하지만, 나의 선택이 아님에도 내가 사랑하고 또 일정 이상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는 나의 직계가족 외에는 없기를 바란다. 이 외에는 오직 나의 선택으로 사랑하고, 책임지며, 온기를 건네받으며 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나의 시간과 노동력과 미래의 일부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다. 더 구체적으로는 누군가를 사랑해 함께 살고 싶다는 이유로 그의 부모까지 책임지고 이름만 가족인 계약으로 묶인 관계 같은 것은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내 가족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사랑과 책임을 빚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빚을 지며 살아갈 생각이 없다. 심지어 한국에서 결혼한 후 여성에게 부여되는 며느리의 역할은 빚을 진 적도 잘못을 한 적도 없는 이에게 부양과 돌봄의 책임을 과하게 전가하지 않는가. 이 변함없는 생각은 지난 몇 년간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며느리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을 요구받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더 확고해졌다.

결혼 외 파트너십의 형태를 지지하며 관련한 정책이 입법되기를 원하는 마음 역시 결혼이 꼭 필요한지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했다. 일찍부터 동거가 왜 결혼의 대안이 될 수 없는지, 제도권 안에서 혼인한 사람들만이 얻게 되는 서로에 대한 권리가 어떤 관계로까지 넓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 그때 이미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같이 살게 된다고 해도 결혼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사회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며 또 서로에 대해 어떤 권리를 부여할지 궁금했던 듯하다. 20대까지는 ‘결혼이라는 게 꼭 필요해?’ 혹은 ‘기적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겠다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혹시 모르지’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면, 비혼에 대한 생각이 확고해진 것은 지난 3~4년 사이다. 2015년 이전에도 나는 페미니스트였지만, 2015년 이후로는 페미니스트로서 공부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됐다. 페미니스트이며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내 자신을 비혼을 선택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삶과 일을 대하는 태도를 다듬어가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않지만 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됐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나의 생활 패턴과 습관, 태도 모두 일반적으로 보편이라고 말하는 삶의 형식을 택하는 사람과는 공존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살고 떠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모든 관계를 어떤 강제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고 또 견디고 싶다. 외롭다는 이유로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택하지 않을 것.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예를 들자면, 이미 11년을 프리랜서로 살아온 나는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 6개월 이상 묶이는 형태의 계약은 하지 않는 것을 개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돈이 아주 많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므로, 내가 가진 돈으로 고정된 형태의 방(집이 아니다)을 가질 필요성 역시 크게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방을 계약한다면 내 삶의 변수, 특히 변덕스러운 내 마음의 변수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2년 정도는 친구의 집 방 한 칸에 보증금을 끼지 않은 월세를 내며 세들어 살았고, 서울의 겨울과 공기를 견딜 수 없어서 지금은 그 방에서 완전히 떠나 멜버른에 와 있다. 부모님의 집은 부모님의 집일 뿐 나에게는 임시 거처일 뿐이므로 지금의 내게는 일주일 이상 머무는 것이 보장된 나만의 공간이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주변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서른 중반이 됐음에도 소유한 것도, 정기적인 소득도 거의 없는 삶이 불안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나마 서른 중반이 되어 알게 된 사실은, 삶은 대개 불안하다는 것이다. 남편도, 아파트도, 결혼이라는 계약도 내가 가진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난 2년간 친구와 셰어하우스 형태로 살면서 알게 된 것은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도 외로움이나 불안을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나는 세계 어디든 내가 살고싶은 곳에서 살며 일하고 싶고, 그 정도만큼은 언제나 가벼웠으면 한다. 꼭 누군가와 함께일 필요가 내게는 없다. 걸음을 멈추게 할 긴 계약도, 약정도,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다. 멜버른의 단기 계약 숙소 식탁에서 맥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고, 공간의 제약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오직 자신만 책임지는 삶은 비혼주의자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지만, 내가 비혼을 택하지 않았다면 얻기 어려웠을 삶의 방식임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내게 묻는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게 싫은 거야?”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주제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지만 결국 나의 답은 동일하다. 과연 외국인이라고 해서 내가 앞서 언급한 결혼의 불합리함에서 나를 해방시켜주고, 나의 개인적인 특징들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그럴 리 없다. 정말 기적처럼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고 함께 살고 싶어진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때의 결합이 반드시 결혼일 필요가 있나? 신혼부부 대출을 받거나 청약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하지만 최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는 청약 대상에서 밀린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왜 결혼이어야 하는가? 나는 삶에 결혼이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중에 외롭지 않겠어? 누군가 묻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 덜 외롭다고 자신하는지 반문하고 싶다. 게다가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 내 자신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중에 남편과 아이와 가족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말이나 노인이 되었을 때를 염려하는 말들 때문에 지금의 나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언젠가 내 자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타인이 생기고 또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도 결혼이라는 계약에 세트로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고 떠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만나고 멀어지는 그 모든 관계를 나라는 개인과 너라는 개인이 만나 어떤 강제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고 또 견디고 싶다. 외롭다는 이유로 사람을, 반려 동물을, 연애를,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택하지 않을 것. 그들과 함께 살고 싶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과 물리적인 공간을 나눌 것.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누군가는 또 웃기지 마라, 저런 애가 꼭 엄청 요란하게 결혼하더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번이야말로 내기 해도 좋다. 이번 내기는 판돈에 이자도 매겨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테니, 20년 뒤에 로또로 찾아오길 기다리겠다.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에디터
    글 / 윤이나(대중문화 평론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