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6명의 여자가 함께 사는 집

2018.02.21GQ

고독사의 위험에 노출된 1인 가구에게 필요한 건 낮은 주거 비용과 적절한 수준을 갖춘 집,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을 잃었을 때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병원에 신고해줄 사람이다.

우리 집엔 여섯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매일 아침 7시 반이면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알람처럼 울리고, 차례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분주한 소리가 들려온다. 10분 간격으로 쿵, 쿵, 쿵, 시간에 쫓겨 채 닫지 못한 현관문이 바람에 흔들린다. 8시 반이면 한바탕의 출근 소동이 끝나고 집은 잠시 정적. 하지만 다시 어젯밤 가장 늦게 퇴근한 3인실의 K가 슬그머니 주방에 나와 동그란 안경을 끼고 고구마, 양배추, 미역을 순서대로 먹는다. 한 시간 쯤 지나 10시 반이 되면 풀메이크업에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J가 도도한 걸음으로 3인실에서 나온다. 우리 집의 최고 핫스팟인 전신거울 앞에 서서 전면, 옆면, 뒷면을 꼼꼼히 확인한 후 출근한다. K는 빈 집에 혼자 남아 요가 매트를 깔고 근력운동을 하거나 최근 배우기 시작한 패턴을 뜬다. 그리고 오후 4시쯤 카페로 출근한다. 우리가 사는 대개의 아침 풍경이다. 각자의 일상이 맞물려 단조롭게 흘러가는 모양새. 요란한 파티나 무리하게 시간을 맞춰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는 집이라는 쉼터에서 각자의 시간을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데 익숙한 뼛속 깊은 개인주의자들이다.

1인실의 R을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명은 함께 지낸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터줏대감은 식이섬유 중독이 의심되는 3인실의 K로 벌써 3년째 거주 중이다. 다들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취직했고, 살 집이 필요했고,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반지하, 쪽방 등 컨디션이 나빴으며 출근 날짜는 촉박했다는 비슷한 사연들이 있었다. 3인실의 J는 셰어하우스에 살아본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처음이었다. 다들 여행객처럼 캐리어 하나만 달랑 끌고 입주했다. 듣기에도 생소한 이 셰어하우스라는 방식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집을 나가겠다는 최후의 보루처럼 갓 입주한 동거인의 캐리어는 언제나 거실 구석에 한동안 놓여 있었다. 나 역시 그랬는데, 어느새 붙박이장에 사계절 옷이 빼곡한 채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우리들의 동거 관계도 초반에는 삐걱거림이 있었다. 관리업체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집안일과 관련해 공동의 규칙을 정하는 회의를 권장했는데, 우습게도 이 회의가 분란의 씨앗이 되었다. 우선 근무 날짜가 제각각인 우리들이 한날한시에 모이는 게 쉽지 않았고, 몇몇만 모인 회의에서 정해진 규칙들이 직장생활에 허덕이는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짐이 되기도 했다. 설거지를 제때 한다든가 마른 빨래를 재깍 걷는다든가 자주 안 신는 신발은 신발장에 넣는 등의 사소한 규칙들이 그랬다. 결국에는 월세 비용에 포함된 월 2회 청소도우미 서비스에 만족하기로 합의했고, 기타 불만사항은 개인 간에 해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주방가위, 쓰레기봉투 등 공동의 물건이 떨어지면 필요한 사람이 먼저 구매했고 나머지 사람이 비용을 분담하는 식이다. 억지스러운 규제는 최소화하고 관리업체를 배제한 우리만의 방식을 찾자 평화가 찾아왔다.

1인 가구의 급증과 더불어 주거난, 고독사 등의 사회적 문제는 당장 우리 주변에도 만연하다. 이전에는 1인 가구를 정상 가족의 범주로 인식하지 않았지만, 비혼, 이혼, 고령화 등 각종 사회적 변화에 따라 1인 가구는 청년세대뿐 아니라 장년-노년층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고 있으며, 이미 전체 가구 형태 중 가장 높은 비율(27.9퍼센트)을 차지하고 있다. 스무 살에 1인 가구로 시작한 아무개 씨가 1인 가구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닌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생애 주기의 일정 시점에 혈연이나 결혼을 통해 반드시 법적 ‘보호자’를 획득할 것으로 전제하는 기존 사회제도의 전반적 검토와 개선이 시급하게 필요함을 시사한다. 가구 분리가 처음 시작되는 청년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어서까지도 1인 가구의 형태를 지속하는 이유는 비혼 혹은 만혼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나 역시 1988년에 태어나 정규직 취업 실패와 비혼으로 순항 중인 88세대로, 아마 1인가구로 생을 마감할 예정인 아무개 씨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정확히 1년 전, 결혼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건 경제적 이유보다는 전통적 관계가 주는 피로감 때문이었다.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관계를 맺는 데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는 두 집단이 혼재한다.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인보다는 사회적 역할끼리 맺는 관계에 익숙한 집단이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직원 등 사회적 역할끼리 관계를 맺으며 관습대로 정해진 권리와 의무를 교환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 간의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는 집단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관계 맺기에 수반한 권리와 의무 교환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연인이 되기보다는 ‘썸’을 타고, 결혼보다는 동거를 선택하며,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를 만나기보다 메신저의 오픈 채팅방에 들어간다.

동등한 개인이 모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셰어하우스는 나에게 알맞은 온도로, 지속하고 싶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 혼자 살기와 가족 이루기라는 양극단에서 고른 하나의 좌표인 셈이다.

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결혼을 포기한 이유도 상대방이 ‘나’라는 개인보다는 아내, 며느리, 훗날 엄마가 될 나의 ‘사회적 역할’과 관계 맺기를 더 원했기 때문이다. 연말에 새해문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는 2인실의 S, 누군가와 함께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자신을 극복해보고자 셰어하우스를 선택했다는 3인실의 H도 비슷한 온도를 지닌 사람이다. 1인실 문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R이나 문자를 보내면 답장을 받기까지 기본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3인실의 K, 고독한 미식가 J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모인 우리는 실제 일상생활에서도 의무가 아닌 편의에 따라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우리 중 누구도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나 같이 사는 사람끼리 뭉쳐야 한다는 식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 집에서는 소파에 누워 킬킬거리고 있다가 언제 결혼할 거냐는 기습 잔소리 공격을 당할 위험이 없고, 누군가의 꿀꿀한 기분을 의무적으로 풀어주어야 할 위험도 없다. 여섯 명은 이 집에서만큼은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언제든지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안정감 속에는 소소한 일상의 접점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적당한 정도의 온기가 묻어 있다. 우리는 연말에 안부문자를 하지도 서로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기지도 않지만, H가 직장에서 당한 부당한 대우에 함께 공분하고, 소개팅 나가는 J를 보며 함께 설렌다. 끔찍한 꿈에서 깬 새벽에는 위층 침대에서 ‘쩍벌’ 자세로 머슴처럼 자는 S를 보며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에 크게 안심하기도 한다. 간혹 1월 1일에 일출을 보러가는 열정의 동거인들도 있다. 난 어려서부터 친척들에게 “잔정이 없는 애”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고모와 노래방을 가지 않았다고, 가까이 살면서 할머니 댁에 자주 들르지 않는다고. 그래서인지 나는 이토록 잔정 없는 삭막한 동거 관계가 편안하고, 이런 느슨한 유대감이 명절에도 고향을 찾지 않는 지독한 불효녀들을 한 지붕 아래 묶어둘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동거인이 없다면 바쁜 출근 시간에 화장실을 마음껏 사용하거나 밤늦게 영화를 보면서 소리가 너무 크지 않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샤워 후 맨몸으로 나오는 등 생각만으로도 속 시원한 소박한 자유들이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1인 가구로 생을 마감할 예비 아무개로서 나는 문득문득 고독사가 두렵다. 며칠 동안 발견 못한 내 시체가 뉴스에 보도되는 것보다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 홀로 그 공포와 맞서야 한다는 게 두렵다. 노년에는 꽤 괜찮은 실버타운에 입주할 정도로 돈이 많을지도 모른다고 안심해버리기에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돈이 많아 본 적이 없다. 즉, 혼자 산다면 무한대로 누릴 자유만큼이나 고독사 외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공포의 순간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고 결혼을 하면 아내도 되어야 하고, 며느리도 되어야 하고, 엄마도 되어야 한다. 언젠가 부부가 된다는 것이 이 모든 사회적 역할을 떠안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면 나의 비혼도 끝날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딸이면서, 손녀면서, 조카면서, 고모면서, 동시에 ‘나’인 것만으로 충분하다.

동등한 개인들이 모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셰어하우스라는 새로운 방식의 동거인 관계는 나에게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딱 알맞은 온도로, 앞으로도 지속하고 싶은 삶의 방식이 되었다. 혼자 살기와 가족 이루기라는 양극단의 수직선에서 고른 하나의 좌표인 셈이다. 동거인들과의 관계는 오래도록 법적 ‘보호자’가 없을 서로에게 대안 가족이 될 희미한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부양의 의무를 전제하는 장기적 의미의 가족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서 말한 느슨한 유대는 언제든 흩어질 수도 있는 자유 또한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셰어하우스가 1인 가구의 대안 가족 모델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다”지만, 꼭 가족이란 이름의 명명까지 필요한가? 당장의 주거난과 고독사의 위험에 노출된 1인 가구에 현실적으로 필요한 건 낮은 주거 비용과 적절한 수준을 갖춘 집, 그리고 갑자기 정신을 잃었을 때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병원에 신고해줄 사람이다. 셰어하우스는 이런 요소들을 대체로 갖추고 있다. 앞으로 늘어날 1인 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셰어하우스가 공급되기를 바라고, 개인적으로는 집을 셰어할 단 한명의 동거인도 구하지 못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끝으로 모든 이야기를 공유해준 다섯 명의 동거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K, 어제 준 고구마 맛있더라.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에디터
    글 / 박지아(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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