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세월은 흘러가고 작별의 날이 왔네

철같이 부식된 안개가 재색 빌딩 위에 어른거립니다. 거주지의 엷은 회색은 옅은 갈색으로 보입니다. 골목 응달엔 우유의 막처럼 얇은 2월의 눈이 덮여 있습니다. 나도 눈사람 같습니다. 석탄으로 만든 눈, 녹아내리는 코, 나뭇가지가 그린 입. 내가 있건 없건 눈 내린 날이면 계속될 풍경입니다. 겨울을 보내고 눈앞에 놓인 따뜻한 날짜를 세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수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얼마나 지속될지 헤아리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골짜기로 처박히고 음미하길 원하는 대상의 본질적 유한성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헤어짐의 접근법, 이별의 경험을 옆으로 밀어놓는 마음의 특이성을 들여다봅니다. 참 이상합니다. 추운 날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 마음처럼, 부정할 수 없으나 말이 안 되는 욕구를 설명하는 기분이랄까요. 확실히 작별의 순간은 독특한 어색함을 만듭니다. 얼른 벗어나길 바라는 어색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만 열망하는 세상에 내내 유지되거나 끝까지 남는 행복이 있을까요? 이변성이 스며든 현재는 시간의 계단 위에서 부서져 미래에 먹히고 맙니다.

영원은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나는 연대기가 무색할 만큼 오래 <지큐>를 만들 것 같았습니다. <지큐>를 만드는 나의 왼손과 오른손은 관속에서나 가슴 위에 포개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끝은 끝이 아니라 아직 중간에 있을 때 다가옵니다. 작은 종들이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펜으로 적은 편집장의 노트에 문장 한 줄이 끊겨 있는 건 언어가 넘쳐서일까요, 여백이 없어서일까요? 어쩌면 그건 하나의 단절일까요?

매일 새벽 네 시. 무겁고 끈적한 호박처럼 매달려 있던 시계가 곧 손을 놓아버리면, 눈을 가늘게 뜬 채 솔로 연습을 하는 메트로놈과 끈질기게 박자를 맞춥니다. 세상의 반을 향해 등을 돌리면 한쪽 귀가 눌리고, 빛이 닿지 않는 땅의 틈으로부터 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시간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는 거지? 과거를? 오지 않은 영광을? 시간의 입자가 부스러져 보풀이 입니다. 과거의 노트를 펼쳐보니 이런 생각은 한참 전 아주 흐리던 그 전전날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에게 <지큐>는 도착했다기보다 멈춘 곳이 되었습니다. 잘 생각했어. 나만의 달력을 발명한 이래 처음으로 자신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어 자체는 인식을 반박하는 기계와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가장 깊게 남는 건 언제나 침묵이었습니다.

창간 17주년 기념호를 마지막으로 <지큐>를 떠나기로 정한 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작은 사슴을 소화시키는 나무 위의 뱀처럼 지냈습니다. 모든 것을 요구하는 2월의 교활함…. 세상은 여전히 무한 반복되는 오디오 파일 같습니다. 시끄럽고 반복적입니다. 쓰레기 같은 매체도 지천입니다. 물론 쓰레기를 용납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의무가 아닙니다. 회상은 손질된 피드백을 제공합니다. 그 첫 번째 봄에, 전공 서적이 든 배낭을 멘 청년이 덥수룩한 머리를 하곤 미래가 없는 길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기다려! 내 말을 들어봐!”라고 소리쳤던 것 같습니다. 시간의 판 위에 대충 그린 스케치처럼 분필 표시는 흐릿해지고, 추억은 벌 떼처럼 윙윙거립니다. 순수한 행운. 웃기는 자부심. 하찮은 후회. 웃는 네안데르탈인. 실망스러운 현대적 인간. 유흥을 판다는 것. 또 다른 곤경이라는 내러티브. 한 무더기의 핑계. 매 순간 뭐든 판단하는 피곤함. 몽상과 수정. 망할 놈의 딜레마. 긍정주의의 느린 침식. 잊힌 카덴차…. 나는 답을 찾으려고 더듬거리다 포기하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축으로 천천히 순환합니다. 그러나 회한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아무 밀가루나 버무려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낮은 다른 하루의 시작 같습니다. 사무실 형광등은 바닥에서 깜빡거리는 A4 용지를 세로로 자릅니다.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평범함에서 나오는 자질의 특별함이란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습니다. 화가로 비유하자면, 나는 일생 동안 단 하나의 그림도 팔지 못했습니다. 또는 그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운명이 눈밭으로 영원히 던져진 충격을 극복할 만큼 강인한 등장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른이 된 지금, 내가 아이였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에겐 <지큐> 말고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다른 매체가 없었습니다. <지큐>는 과학처럼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주는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가끔 자문했습니다. 이 경험이 주관적인 것인지 시적인 것인지, 결국 감상할 만한 것인지. 그 사이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 잠시 또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많은 경우, 잔디를 깎아주러 온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달랐습니다.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매료, 도덕적 긴박함과 친밀함, 더 생생한 맹목은 우리 우정의 구성분자였습니다. 당신의 조용한 친절은 언제나 나를 쑥스럽게 했지만 함께 있을 때, 횡단보도를 건널 때, 택시를 탈 때, 우리는 서로의 제스처를, 말의 리듬을, 기분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타인의 눈으로 주변을 볼 때 세계를 다시 인식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여된 이 단락은 무엇일까요? 이 차가운 확신은 어디서 온 걸까요? 당신도 나의 허심탄회한 놀라움에 동의하나요?

무엇을 하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우리는 연속적인 사건의 중심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가슴 뼈가 조용히 쿵쾅댑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시간은 제로섬 게임이 되었고, 분별 있는 남자는 어느 때가 되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개인은 몸 사이즈에 맞게 비싼 옷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겐 블루스 같은 산성의 혼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낮은 천장에 갇힌 공기는 모든 소리를 전달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외침, 인정을 구하는 외면, 고통의 눈부신 투명함까지도….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는 매번 이렇게 거북합니다. 하지만 상실에만 집중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사라지는 대신 조금은 남아 있을 자취로든, 손목에서 째깍거리는 시계로든, 네모난 지큐로든 형태를 갖추고 당신의 다음 시기와 동반할 것입니다. 삶은 어쨌든 삶의 양식보다 우선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나는 선물 가게의 고양이 조각처럼 호기심도 욕망도 없이 졸고 있습니다. 거꾸로 쓴 스냅백은 하릴없이 눈썹을 위쪽으로 당깁니다. 누구나처럼 나도 즐거운 면과 심각한 면 다 있지만 대부분 이렇게 엉성합니다. 수영장의 취객처럼. …무슨 노래였을까요? 아침과 긴 오후, 당신과 책 사이로 무슨 노래가 들린 걸까요…? 이제 말해주세요. 너는 날달걀에서 쏙 빠져나온 노른자처럼 선명하고 윤기 난다고. 스스로 몰수한 이상이 너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누군가 나를 깨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지금 기분이 어떤지 묻습니다. 하지만 안녕. 이 단어를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버리면 남는 언어가 얼마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얼음 위에 입을 벌린 굴만큼.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배고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계셔요. 당신의 장도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