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서울 다이빙

2018.03.12이예지

극장에 가서 영화 속 서울을 본다. 영화가 끝나면 다시 서울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길 얼마나 오래 반복했던가. 극장 입구에서 마치 발을 헛디딘 것처럼, 그렇게 비틀거리듯이. 요컨대 이 글은 다이빙의 기록이다.

“…그러자,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중략) 혹은 그처럼 기억 바깥에 버려진 그런 기억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무도 없고, 모든 게 분해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형태 또한 없어지거나 잠들어버리거나 하여, 의식에 결부될 만한 팽창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옛 과거에서 몇 개의 장면들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집요하게, 충만하게, 오랫동안 변함 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다. (중략)”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문장은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스완의 집으로’의 첫 장이 끝나기 바로 전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면서 내 멋대로 마들렌 과자의 냄새와 맛을 장면으로 살짝 바꿨다. 이것이 내가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다. 내가 살아온 서울, 내가 살아가는 서울. 이때 기억에 리듬을 불어넣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들은 파편이 된 장면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극장에 가서 그 장면을 구경한다. 그걸 보기 위해 극장에 가고, 영화가 끝나면 살기 위해 다시 서울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반복했던가. 그때마다 극장 입구에서 마치 발을 헛디딘 것처럼, 그렇게 비틀거리듯이, 내가 살아온 서울이라는 고유한 시간의 세계 안으로 뛰어드는 방법 앞에서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다이빙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배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은 내가 기억을 마모시키는 시간보다 더 빨리 자기를 때려 부수면서 무언가를 그 자리에 출현시켰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건 괴물과도 같았다. 나는 봉준호가 한강 한복판에서 ‘괴물’을 출현시켰을 때 완전히 공감했다. 여기서는 괴물밖에 달리 나타날 것이 없는 도시가 되어갔다. 봉준호가 슈퍼 돼지 옥자를 서울 한복판에 풀어놓고 쑥밭을 만들 때 그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면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길거리를 쏘다녔다. 마치 <극장전>의 동수처럼. “그래, 생각을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나는 얼마나 자주 골목에서 길을 잃었던가. 위대한 홍상수의 골목. 이때 당신은 무엇을 배웠나요? 길거리의 의미. 가로수의 의미. 골목의 의미. 계단의 의미. 사라져가는 의미. 무엇이 홀쭉하고 무엇이 뚱뚱한가. 그 안에서의 해석. 나는 거리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쉴 사이 없이 쳐다보았고, 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광경을 내내 지켜보았다. 나는 종로의 길거리에서 개를 만나는 것보다 더 자주 개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개를 마주치는 것보다 더 자주 개처럼 잡혀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마 당신이 속초에 살고 있다면 다른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광주에 살고 있다면 다른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은 여기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대해서 무언의 해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지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한 줌의 도덕을 구할 뿐이다.

나는 몇 차례이고 보았다, 라고 말했다. 당신은 내게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영화와 서울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나요? 서울은 내게 산책하는 세계다. 발걸음의 유클리드적 공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옆으로 새고, 가로와 세로를 자유자재로 옮기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가끔은 돌고, 때로 무언가에 의지해서 멈춰선 채로 이동하면서, 수많은 풍경이 그렇게 펼쳐진다. 서울은 산책하던 내게 관절의 운동과 근육의 반작용, 그리고 시선의 파노라마와 청각의 미세한 반응을 요구했다. 피부는 때로 차가운 공기 속에서 경련을 일으켰고, 때로 습한 바람 속에서 젖었다. 서울은 산책자에게 종종 자본 속을 걸어가고 있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피곤에 지칠 때 당신은 그루브한 사운드 스케이프 속에서 기분 좋은 자몽주스를 마실 수도 있지만 직장 없이 불안한 표정으로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오후를 낭비하던 어떤 날은 지하철 자판기에서 캔 커피에 만족해야 한다. 서울은 하나의 도시이지만 각자의 고유한 세계로 미세하게 분할되어 있다. 각자의 법칙. 어떤 문은 당신에게만 허락될 것이고, 어떤 문은 당신을 거절할 것이다.

첫 번째 장면을 이야기할 차례다. 내가 떠올리는 첫 번째 장면은 아주 오래전에 본 어느 봄날이다. 그건 춘삼월의 어느 날이어야 한다. 당신은 잘 상상이 안 되겠지만 서울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어머니는 외갓집에 갈 때마다 나를 데리고 갔다. 그때 외할머니 댁은 삼선교에 있었다. 거기에 들른 다음 나를 데리고 종종 화신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곤 했다. 안타깝지만 화신백화점은 지금 흔적도 볼 수 없다. 나는 발터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를 읽으면서 파리의 파사주를 이야기할 때 즉시 내 어린 시절의 화신백화점을 떠올렸다. 화신백화점의 중앙은 천장이 유리 돔형으로 된 긴 복도처럼 늘어서 있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이는 실내 천장. 나는 이곳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화신백화점을 갈 때 늘 전차를 탔다. 삼선교에서 탄 전차는 명륜동을 지나쳤다. 그때 명륜동과 대학로를 지나가는 중앙에는 큰 분수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는 전차는 그런 다음 창경원 앞을 지나갔다.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 담벼락 저편에서 코끼리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공작새가 슬로 모션으로 우아하게 흔드는 날갯짓. 대장 원숭이가 거만하게 어슬렁거리는 따사로운 오후. 그러고서 마주친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서 비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비원의 담장을 타고 내린 노란 개나리가 만발했다. 유리 창문에 달라붙은 나는 홀린 듯이 그 풍경을 보고 또 보았다. 비원 앞을 지나친 전차는 직진했다. 그때 북촌의 풍경은 지금처럼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한없이 늘어선 한옥들의 첩첩산중. 빛바랜 기와들이 이루어내는 원근법. 그런 다음 풍문여고 앞에서 전차는 갑자기 좌회전해 조계사 앞을 지나서 지금의 종각 앞에서 멈추었다. 거기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이때 이 장면은 무조건 트래블링 숏이어야 한다. 게다가 시네마스코프여야 한다. 수평으로 운동을 시작한 다음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장면. 하나의 파노라마. 나는 창문에서 바라본 이 풍경을 마치 끝나지 않는 하나의 숏처럼 기억한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알지 못했다. 많은 풍경이 봄날처럼 사라져 갔다. 나는 그것이 슬펐다.

두 번째 풍경은 배경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 <1987>을 본 다음 나는 재빨리 객석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이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깊은 한숨을 쉬었고 (나는 틀림없이 그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곁에 온 사람에게, 나는 저때 말이지, 하면서 약간 격앙된 목소리를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1987년이 오기 훨씬 전, 그때 막 학교를 졸업한 다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를 하겠다고 무작정 충무로 거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때는 종로에서도, 신림동에서도, 신촌에서도, 화양리에서도, 하여튼 온 사방에서 시위가 게릴라전처럼 벌어졌고, 그러면 어슬렁거리던 빨간 모자를 쓴 백골단 전경들은 번개처럼 진압에 나섰다. 나는 그날 충무로 전철역에서 내려 그 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 바로 그때 바로 위, 어쩌면 대한극장 앞에서 시위가 있었는지 모른다. 시위를 하던 학생 몇몇이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열댓 명의 백골단 전경들이 뒤쫓아 들어왔다. 학생들은 사람들을 헤치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전경들은 사람들을 걷어차면서 쫓아 내려갔다. 학생들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구호를 외쳐댔다. 몇몇 사람들이 갑자기 구호에 호응했다. 놀랍게도 뒤쫓던 전경 중 한 명이 사람들을 향해서 흩어지라는 듯 사과탄을 던, 졌, 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시내 한복판 전철역 안에서 최류탄의 일종인 사과탄을 던졌다. 그냥 한마디로 아수라장. 비명 소리가 났고, 순식간에 번져나가는 가스 연기 속에 우왕좌왕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던 나는 도리 없이 그 연기 속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때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한 학생이 맞은편에서 올라오던 내게 그 와중에 스쳐 지나가듯 전단지를 건네주었다. 물론 내용은 펼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전단지가 아니다. 내 손과 스쳐 지나간 그 학생의 손끝이었다.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그 전단지를 받아들었다. 나는 그 학생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치 그 손을 만져본 것만 같은 온기를 느낀다. 충무로역에서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나는 그 순간이 항상 떠오른다. 그 클로즈업의 순간. 손과 손이 마주친 다음 그렇게 헤어진 순간. 전철역을 나서자 대한극장 앞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비가 내리던 그해 서울.

세 번째 장면을 말할 차례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조각난 것처럼 보이는 자기의 세계를 하나로 모으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세계의 매듭. 그걸 내버려두면 우리는 너무 깊은 상심에 우울증의 늪에 빠지거나 아니면 불안에 사로 잡혀 조각난 자기 세계의 모서리에 찔릴 것이다. 때로 나의 세계는 칼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그걸 막아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나는 그때마다 남산에 올라간다. 어떻게 해서든 세계가 기호가 되는 것을 중단시켜야만 한다. 텅 빈 기호들이 날뛰는 세계. 나는 그것을 원래의 세계에로 되돌려놓아야만 했다. 서울은 조금만 방심해도 순식간에 공허한 기표들로 변해버렸다. 여기서 매일을 살아야 하는 내 삶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내가 살고 있는 풍경을 원상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래서 내 세계를 다시 한 번 더 감싸 안기 위하여, 남산에 간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거기 올라가는 건 그곳에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남산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 내가 거기에 가는 까닭은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다. 비밀을 고백하겠다. 나는 케이블카 ‘덕후’다. 그래서 내가 방문한 도시에 케이블카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탄다. 타이베이의 케이블카. 만리장성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시안의 케이블카. 알프스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나는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는 남산에만 케이블카가 있다. 지금은 관광객이 넘쳐나지만 예전에는 텅 빈 채로 오가곤 했다. 어떤 날은 나 혼자 타고 올라간 적도 있다. 그걸 타고 남산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채 3분이 걸리지 않는다. 나는 사계절 모두 타보았다. 내가 케이블카를 맨 처음 타본 것은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다. 여기에 처음 혼자 가본 것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친구들은 주말에 삼삼오오 어울려 어디론가 몰려갔고, 어떤 친구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했다. 나는 남산에 혼자 갔다. 아니,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그날 해가 막 저물가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군대에 다녀온 다음 학교에 복학하던 봄날에도 혼자 타러 왔다. 솜처럼 꽃씨가 날리고 있었다. 그건 생각이 난다. 그런 다음에도 몇 번이고 다시 이걸 타러 왔다. 내가 고통받고 있을 때, 절망에 빠져있을 때, 슬픔에 사로잡혔을 때, 세상만사에 짜증이 났을 때, 아니 언제나 슬플 때, 그렇다, 슬플 때, 나는 이걸 타러 갔다. 그때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이 기계가 작동하는 순간 갑자기 그 히스테리로부터, 그 정신병에 걸릴 것만 같은 상황으로부터, 그 도착적인 슬픔으로부터, 매듭이 풀려나가는 것만 같은 기쁨을 느꼈다. 감정의 기계 장치. 그 모든 것으로부터 일시적이나마 나를 해방시켜주는 풍경의 작동 장치. 이걸 상투적으로 조감쇼트(Bird’s Eye View Shot)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때 내가 느끼는 기분은 새처럼 날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건 세계를 한 번 본 다음(Shot) 다시 나를 바라보는(Reverse Shot) 서로 마주봄의 대화다. 그렇게 나는 슬픔에 잠긴 세계 위로 상공 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눈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다.

한 장면을 설명하겠다. 나의 첫 번째 영화 마지막 장면은 남산에서 끝난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가장 먼저 썼다. 아버지 없는 아이를 임신한 소녀는 친구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으로 올라간다. 나는 이걸 찍기 위해 겨울에 촬영이 끝난 영화의 동료들과 배우들에게 오월 마지막 셋째 주 수요일에 한 번 더 모여달라고 간청했다. 모두 망설이지 않고 허락해주었다. 화창한 날씨이기를 바랐지만 비가 와도 상관없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한겨울에 촬영이 끝난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오월 그날의 날씨를 내가 무슨 재주로 알 수 있겠는가. 나에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저 그날이 중요했다. 정말 중요했다. 처음 혼자 케이블카를 타던 날, 그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혼자서 한 말이 있었다. 그걸 일기에 써놓았다. 그리고 오랫 동안 간직했다. 나는 그 말을 시나리오에 썼다.

친구가 물어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그러자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케이블카 바깥 풍경을 보면서 대답한다. “이젠 두렵지 않아, 이젠 죽어두 죽진 않을 거야, 비가 오면 비를 맞을 거구, 바람이 불면 세상을 마주 볼 거야, 이젠 울지 않을 거야, 필요 없어, 눈물 따윈, 정말 필요 없어,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볼 거야, 난 노력할 거야, 난 매일매일 쉬지 않고 아침을 기다릴 거야.”

물론 일기에 쓴 말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열일곱 살의 내가 일기장에 쓴 문장을 옮겨서 쓴 시나리오의 대사를 배우가 외워서 읊조리기 시작했을 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그 장면을 찍기 시작했을 때, 그 목소리를 녹음하면서 헤드폰으로 들었을 때, 그렇게 케이블카 창문으로 서울의 풍경이 흘러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세계 안으로 내가 들어서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의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자기를 둘러싼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마치 포위된 것만 같은 느낌. 이 불길한 느낌. 기분 나쁜 정황. 그래서 이 기호들과 싸워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틀렸다. 자신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방법은 그 기호들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기쁨은 그 기호들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배움의 신호들을 끌어내 거기서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지금 그 배움을 안고 나는 서울에 관한 다음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게 내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비로소 다이빙하는 방법을 익힌 것만 같다. 말하자면 나의 21세기. 당신과 함께 수영을 하러 가고 싶다.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채대한
    정성일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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