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외상 후 증후군?

지금 한국영화는 긴 외상 후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근현대 혹은 동시대의 비극을 재현하는 영화들이 쏟아진다. 이들은 관객에게 정확한 위로를 건네고 있는 걸까?

염력

트라우마는 돌아온다. 수년이 지났든 수십 년이 지났든 망각되지 않고 반드시 돌아와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더 큰 고통의 늪에 빠뜨리고 만다. 그것이 쉽게 빈번히 출현하는 방식은 대중 매체인 영화다. 탄핵 후 새 정권이 들어선 지 약 1년이 되어가는 지금, 한국영화는 긴 외상 후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이 귀환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무엇을 확인하려 하나.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비극은 관객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지난해부터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아이 캔 스피크>, <1987>과 <강철비>, <염력>과 <공동정범> 등 근현대 혹은 동시대의 비극을 재현하거나 상기시키는 작품이 두드러지게 등장한 흐름을 하나의 징후로 포착해 답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재현하는 건 가장 쉬운 접근이다.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끔찍했던 비극 중 하나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철거를 앞둔 건물의 망루에서 6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 참사를 소재로 한 <염력>은 비극의 날,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초인적인 물리력을 가졌다면 어땠을까?’라는 지극히 단순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경찰이 시위를 단 며칠 만이라도 지켜봤다면?’, ‘협상을 하려는 미약한 시도나마 있었더라면?’, ‘진압 전 내부 구조에 대해 최소한이라도 파악하고 있었다면?’…. 수많은 안타까운 가정법을 건너뛰고, <염력>은 철거민 진영의 한 명을 슈퍼 히어로로 만드는 걸 택한다. 황당하고 무책임한가? 역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는 경찰이 진압 전 협상하는 광경을 보느니 차라리 철거민이 초능력을 가지는 편이 현실적일 것이라고. 그만큼 이상했던 시절, 초능력을 부여 받은 주인공은 건물 밖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받아내고 전경에 의해 고립된 이들을 빼내와 목숨을 구한다. 물론 실제 그들은 죽었다. 지나간 비극을 ‘그랬다면 어땠을까’란 가정법으로 복원하는 덧없는 위로. 말초적인 차원의 위로인 줄 알면서도 주인공이 사람들을 구해내는 장면에선 눈물이 찔끔 나고야 만다. 그렇다면 이 환상은 유효한 위로일까? 문제는 이런 B급 장르적 환상이 용산 참사와는 관계 없는 서사를 위해 복무한다는 점이다. <염력>은 한 아버지와 딸의 가족 복원의 서사를 주조로 한다. 초능력을 가진 아버지의 관심사는 철거민의 권리를 찾아주는 일이 아니라 멀어진 딸에게 환심을 사는 일이며, 용산 참사는 미시적인 영웅 서사로 축소된다. <염력>이 참사의 비극을 착취하는 장르 영화에 머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지난해부터 쏟아진 많은 영화 대부분은 적절한 위로에 실패했다. 비극을 장르의 스펙터클로, 통속의 서사로 치환해 소환한 흥행 영화들 대개가 그랬다. 탈출 액션의 오락적 스펙터클이 주가 된 <군함도>와 외부인의 시선을 상정한 <택시운전사>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전자는 일제강점기에 강제 수용됐던 민족의 아픔을 스펙터클로 전시하고 소모했다는 비판을 이미 흠씬 받은 바 있지만, 사람들은 비슷한 시기 맞붙었던 <택시운전사>가 제공한 통속적 서사에는 경계심을 늦추고 쉽고 안락하게 위로 받았다. 그러나 그 위로는 적절한 것이었을까? <택시운전사>는 5.18 민주화운동을 보여줄 주인공으로 서울의 택시운전사와 해외에서 온 벽안의 기자를 택하고, 그들에게 취재한 사진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는 미션을 부여한다. 외부인인 주인공이 취재와 서울 귀환이라는 미션에 성공하기까지, 관객들은 택시 안에서 사파리를 관람하듯 조마조마한 서스펜스를 누리게 된다. 비극적인 역사를 재현하면서 당사자를 소거하는 방식은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비겁한 안도감에 가까운 것이다.

 

1987

올해 개봉한 <1987>은 ‘우리’의 비극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는 영화다. 많은 캐릭터가 릴레이 형식으로 등장해 서사를 이어나가다 보편의 얼굴, 연희가 6월 항쟁의 한복판 바리케이트 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극영화가 가진 캐릭터 위주의 서사라는 숙명적 재현의 한계를 극복하려 투구한다.(노력한 흔적이 역력함에도, 강동원이라는 순정만화적 장치나 하정우라는 마초적 장치를 고민 없이 그대로 이식한 것은 매우 게으르게 느껴진다. 주인공들은 다양한 데 반해 적은 단 한 명의 인간으로 환원한 것도 아쉽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자베르 경감을 주적으로 삼았다면 구조의 문제는 지워지지 않았을까?) 한 명의 영웅 서사가 아닌 평범한 보편의 존재,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시작해 이한열 사망 사건,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1987년의 한 순간을 승리의 기억으로 복원해내며 끝맺는다. 마지막 바톤을 넘겨받듯 시위 한복판에 오른 연희의 시선을 따라 도는 트래킹 숏은 마치 이미 승리한 것만 같은 짜릿함마저 안겨준다. 물론, 사람들은 6월 항쟁 이후 양김의 단일화 실패로 5년의 세월을 더 군부 통치를 당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을 끝내고 역사상 9번째 개헌을 이루어낸 그 승리의 경험을 훼손되지 않는 순간으로 재현해낸다는 것은 현 시점에도 의미가 있다. 1970년대에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언론의 승리를 그린 <더 포스트>가 약 50년 후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 용기를 주는 이야기이듯, 6월 항쟁이라는 승리의 경험은 지금의 한국에도 각별한 것이다.

과거는 중요하지만, 현재와 이어지는 맥락이 부재한다면 힘을 갖기 어렵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여름 시장을 휩쓸며 상당한 무력감을 안겨주고 난 뒤 개봉한 <아이 캔 스피크>는 상업 극영화가 역사적 비극에 접근하는 노련한 해법을 보여준 사례다. 극적인 캐릭터와 서사를 만들면서도 훼손하지 않고, 과거의 비극을 관음적 시선으로 재현하는 대신 현재를 담아낸다. 위안부 피해자가 겁탈당하는 장면을 가해자의 시선에서 찍은 <귀향>과는 달리, 이 영화는 과거 재현을 생략하고 현재 피해 생존자가 미국 의회에 서서 “나는 말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생생한 증언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것이 이 영화를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염력>과 같은 용산 참사를 다룬 <공동정범>은 한발 더 나아가, 참사 이후 9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망루를 떠날 수 없는 생존자들의 소외된 고통을 비추어낸다. <공동정범>엔 환상의 온기가 없다. 사망 원인 규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철거민들은 서로를 원망한다. 카메라는 그들 사이 갈등의 내피를, 소외 속의 소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상처를 헤집는다. 일말의 미화도 없다. 그것이 기득권이 약자를 길들이는 오래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약자들을 링 위에 몰아넣어 서로 물어뜯고 밀어내게 하는 메커니즘. 사람을 파고들며 역설적으로 구조 너머를 보게 하는 <공동정범>은 위로로부터 딛고 나아갈 단서를 제공한다. 나 아닌 타인의 고통을 발견하는 것, 피해자가 무결할 의무가 없음을 이해하는 것, 어떤 치부에도 그들이 겪은 피해 사실은 변함이 없으며, 함께 나눠야 할 것임을 알게 되는 것. 그렇기에 <공동정범>은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한 시절의 비극에 대한 적확한 직시이자 유효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이유로 스러져간 목숨들, 그리고 그 이후 남은 자들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이야기. 이것은 <공동정범>이 용산 참사에 대한 영화일 뿐 아니라 ‘포스트 세월호’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지난한 세월을 겪은 한국인들에겐 위로가 절실하다. 희망이라는 이름도 좋다. 이제 스크린에선 지난 정권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아주 대범하고 미래적인 희망도 제시되고 있다. 이를테면 남과 북이 핵을 나눠 갖고 거의 완전한 평화를 이루는 자주적인 민족 판타지. 남북 분단의 비극을 그토록 수많은 영화가 다뤘지만, <강철비>처럼 파격적인 결말을 제시한 영화는 없었다.(놀랍게도 최근 북한 비핵화가 논의되며 한반도 평화에 청신호가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영화가 현실을 앞서나가거나 뒤따라오거나 완전히 현실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와 현실은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재반영한다. 지금 한국영화는 한 시절을 통과하며 겪은 공동의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과도기에 있고, 대부분 기만과 자위에 그쳤지만 적어도 무력감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꺼운 일이다. 지난한 세월을 겪은 이들에게는 때론 찬란한 사랑보다 정확한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