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2.

2018.04.22강지영

이 글을 읽을 때 함께하면 좋을 것.
Special Cuvee Champagne – Bollinger
Etienne Champagne Saucer – The Conran Shop

그 공책이 어쩌다 거기 꼈을까. 책상 정리를 하다가 위 서랍과 아래 서랍 사이, 미지의 공간에서 노트라기보다는 누더기란 말이 맞을 물건을 찾았다. 찢어지고 구겨지고 축축했지만, 써놓은 문장들을 보고 모처럼 웃었다. 원고로 완성되기 전, 생각나는 대로 그때그때 써둔 메모와 그림을 보고 스스로가 귀여워서 샴페인도 한잔했다. 어릴 땐 글씨도 어렸다.

일요일이 제일 싫다던 샤넬은 오랫동안 살아온 파리 리츠 호텔에서 일요일에 죽었다. 조문객들은 그녀가 평소 숭배하던 흰 꽃을 약속처럼 바쳤고 오직 루키노 비스콘티만이 빨간 꽃을 무덤가에 놓았다.

개가 한번 핥았다고 당장 손을 씻거나 주인이 안 보는 사이에 고양이를 쥐어박는 사람은 싫다. 유행 따라 미니핀을 기르다 샤페이를 기르다, 몇 년 후에는 그레이트 피레니즈로 바꾸는 변덕은 차라리 개가 싫다는 몰인정보다 못하다. 12년 동안 함께 산 개가 죽었을 때 울거나, 이젠 늙어서 계단을 못 내려가는 고양이 얘기를 하면서 슬퍼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게 아니다.

뭐가 더 싫은가 생각한다. 변색된 초콜릿, 자동차 대시보드에 놓인 자수로 박은 전화번호, 엽서의 끝에 ‘먼 곳에서’라고 적는 유치한 감상, 다리를 꼰 인삼을 클로즈업한 삼계탕 집 벽의 사진.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잔인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자. 분노, 변덕스러움, 친절함, 유머, 반짝이는 생각, 검소함, 그리고 관대함.

영화 <드림 오브 라이프>에서 패티 스미스는 펑크의 ‘그랜드 마더’ 다. 볼사리노 모자와 남성용 부츠, 커튼 같은 코트로 화면을 누빈다. 이 영화가 극장 말고, 작은 화랑 같은 데 흰 벽에서 틀어졌으면 좋겠다. 바닥에 앉아서 노래도 듣고 패티 스미스 특유의 제스처도 보고 싶다. 정말 예쁜 사진은 액자에 넣지 않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야구 글러브와 글렌 메데이로스의 앨범처럼, 젊은 날을 상징하는 새파란 패션 아이템. 아직 젊지만 충분히 어리진 않은 서른 살. 뒤집어 입은 통통한 겨자색 스웨터는 루이 비통 제품.

차 사고가 났을 때 바닥에 뿌린 스프레이 자국을 보다가 “들어온 방향을 보니까, 이건 니 잘못이네”라고 말하는 애인 같은 건 필요 없다.

조시 하트넷이 운동화를 그냥 신는다면, 스테파노 필라티는 하이 패션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자부심으로 운동화를 고른다. 파란색 실크 턱시도와 오간자 팬츠를 입고 러닝화를 신거나 재킷 라펠에 꽃까지 꽂고서 사파이어 반지를 낀 손으로 운동화 끈을 묶는다. 웨스 앤더슨 역시 코듀로이 수트와 버튼다운 셔츠, 니트 타이와 함께 뭉툭한 회색 운동화를 신을 줄 안다. 셋 중 어떤 방식의 운동화가 제일 좋으냐면 조시 하트넷, 웨스 앤더슨, 스테파노 필라티 순이다. 운동화는 그저 운동화일 때가 좋기도 하거니와, 뭘 계산하고 의도하고 어떻게 보이려는 심사가 담긴 룩은 이제 그만 질려서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 오랫동안 사랑하고 너무 힘들게 헤어졌는데,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치고 보니 너무 남 같을 때. 우리가 과연 연인이긴 했었나 생각한다. 그런 순간엔 불 켜진 우리 집을 깜깜한 밖에서 들여다보고 서 있거나 남이 내 차를 몰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걸 목격한 기분이 든다.

밤이다. 내키진 않지만 받아야 하는 전화, 표정에 신경 써야 하는 거절도 없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코난 도일을 읽거나 심수봉 노래를 듣거나 심지어는 봉제 젖소 인형을 안고 있어도 상관없다. 시간은 고운 모래처럼 고요하게 지나간다.

니트는 오랫동안 오해 받았다. 이 온화하고 검소한 직물은 대개의 경우 게으르고 무신경하며 우유부단한 성품과 짝을 이뤘다. 교우관계가 협소한 남자가 아내 손에 이끌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부부를 만나러 갈 때, 빛나던 시절은 이제 완전히 잃은 쇠락한 친구를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 그들은 하필이면 스웨터를 입고 있다. 가끔은 수식어도 붙는다. ‘떼어도 떼어도 한없이 일어나는 비운의 보푸라기’ 혹은 ‘수도파이프의 동파를 막는 데나 써야 할 구식 아가일’ 같은 궁상맞은 설명들. 특히 남자가 니트를 입었을 때의 반응은 후하게 봐줘야 ‘가정적’이라는 조촐한 칭찬 정도였다.

우리들의 사랑은 버스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우리들의 사랑은 어두운 공원길에도 보이고. 우리들의 사랑은 가까이 잡힐 것처럼 보이다가도 우리들의 사랑은 신기루처럼.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쉬운 얘기 같지만. 설레이고 어지럽고 후회하고 미안해지고 잊혀질 거야 말했다가도 사랑이란 건 왜 이렇게.

    에디터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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