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을 뛰어 넘는 ‘곰탕 르네상스’

평양냉면이 새삼스럽게 인기를 얻은 직후, 곰탕 열풍이 맞물려 따라왔다. 지금 서울에선 최상의 재료와 완성된 기술로 육향을 뽐내는 곰탕집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작년 2월, 사람 셋이 들어가서 샴페인 한잔하며 월풀을 즐겨도 될 법한 거대한 솥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주방에 간 적이 있다. 온갖 부위의 소 살코기와 머리며 혀와 내장이 그 용암 같은 대류 운동에 따라 넘실대고 있었다. “오늘은 밤을 새워야 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중얼거리며 제 머리통만 한 국자로 육수에 뜬 기름을 걷어내고 있는 남자는 임정식 셰프였다. 서울과 뉴욕의 정식당으로 <미쉐린 가이드> 별 두 개씩, 도합 네 개의 별을 가진 모던 한식의 대표 주자. 그 거대한 곰탕 용암은 올해 1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개관과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 ‘평화옥’의 준비 작업이었다. 팝업 이벤트 형식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곰탕을 끓여 선보였는데, 따지고 보면 메뉴 개발을 아예 대용량으로, 실전으로 한 셈이다. 적은 양으로 끓여봐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게 임정식 셰프의 판단이었다.

공항이라는 특수한 상권을 선택한 스타 셰프가 왜 ‘서민 음식’으로 꼽히던 곰탕을 세컨드 브랜드로 생각해냈을까? “다 국물이잖아요.” 임정식 셰프가 툭 뱉었다. 지난 10년간, 동양의 국물 음식이 차례로 전 세계적인 히트를 했다. 태국의 톰양쿵, 그다음엔 일본의 라멘, 그리고 최근의 베트남 퍼보(소고기 쌀국수). “국물 음식은 세계 어딜 가나 통해요. 곰탕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먹어도 이해할 수 있는 맛이고요.” 우려낸 국물은 어느 음식 문화권에나 있다. 전 지구인이 아는 맛이다. 질기고 단단한 고기를 물에 넣고 끓인다, 고기는 부드럽게 풀어지고 고기 맛과 성분이 녹은 다량의 육수가 생긴다. 불의 발명 후 신석기 문명에서 토기가 발명된 이래부터 시작됐을 단순하고도 원시적인 조리법 중 하나다. 어느 음식 문화권에 가도 국물 음식은 빠지지 않고, 컴포트 푸드의 자리에 놓여 있다.

임정식 셰프가 인천에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동안, 서울 시내에서도 신흥 곰탕 강자를 꿈꾸는 곰탕집이 여럿 등장해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두 곳의 새로운 곰탕집을 취재했을 때, 남 몰래 떠올린 단어는 ‘덕후’ 다. 마포구 현석동 곰탕수육전문의 김정길 사장은 모 곰탕집에 단골로 드나들다 숫제 주방에 취업해 비법을 배워 나온 경우이고, 합정동 합정옥 차계민 사장의 시아버지 윤홍렬씨는 수십 년을 집에서 그렇게 새벽마다 곰탕을 고아 드셨다. 최고의 곰탕을 생에서 경험하고 ‘덕력’을 갈고 닦아온 곰탕 덕후가 ‘덕업일치’를 이룬 것이다. 곰탕수육전문과 합정옥은 소비자들에게 “하동관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평판을 얻었다. 곰탕을 얘기할 때마다 애꿎은 하동관이 비교군으로 등장하는 게 이제 지겨울 때도 됐지만, 분명 하동관은 곰탕의 서울에선 어떤 표준이다. (2007년, 하동관이 68년 만에 수하동을 떠나 명동으로 이전했을 때나 2015년 송사가 있었을 때도, 올해 1월 불이 났을 때도 중앙 일간지에 소식이 실렸다.)

그런 드디어 곰탕이 다각화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곰탕집이라면, 하동관급 노포가 아닌 이상 프랜차이즈이거나, 거의 완성 단계로 넘어오는 ‘공장제’ 곰탕을 데워 내는 곳이었다. 맛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신에 가격이 저렴하고 시스템화가 잘돼 있어 대충 한 끼 해결해야 할 때 편하게 가는 곳들 말이다. 처음으로 ‘곰탕 르네상스’의 신호를 쏘아 올린 곰탕수육전문과 합정옥은 하동관이 아닌 곰탕집도 고품질, 고가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동안 하동관은 선입견 때문에 ‘20공’, ‘25공’ 같은 식으로 메뉴 가격을 암호화해 숨겨놓고 팔아야 했지만, 세상이 바뀐 것이다. 광교옥과 언주옥도 올해 비슷한 시기 나란히 등장해 강남권을 팔팔 끓이고 있다. 광교옥은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씨가 돼지 곰탕을 선보인 ‘광화문 국밥’에 이어 낸 소고기 곰탕 전문점으로 대치동에 있다. 논현동의 언주옥은 문을 열자마자 입소문이 확 퍼지면서 화제가 된 곳이다.

곰탕수육전문은 평양냉면 등 소고기 요리로 손꼽히는 우래옥과 곰탕 노포 하동관에 고기를 대는 것으로 유명한 팔판정육점에서 고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합정옥 역시 마장동에서 고품질의 암소 한우고기를 받아 쓰는 것으로 밝혔다. 광교옥은 호주산을 쓰는데, 와규를 선택해 맛과 단가를 함께 높였다. 호주산 와규는 곡물 비육을 해 맛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언주옥은 프리미엄 정육점이자 한우 오마카세 열풍의 원점인 본앤브레드에서 소고기를 받아 쓰는 것이 주요한 인기 요인이었다.

프리미엄화는 소고기 곰탕만의 일도 아니다. 같은 시기에 마침 돼지 곰탕의 붐도 맞물렸다. 제주 흑돼지와 붉은 털을 가진 듀록 돼지로 국물을 뺀 광화문 국밥, 흑돼지 계열의 버크셔K를 사용하는 옥동식이 소고기 곰탕 못지않은 맑고 고운, 누린내 나지 않는 돼지 곰탕을 선보였다. 돼지 생산량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삼원교잡종보다 고급 품종으로 인식되는 품종들을 쓰는 것이 공통점이다.
곰탕 열풍과 거의 동시에, 그러나 조금 더 앞서 일어난 미식 업계의 열풍 현상이 있다. 평양냉면이 새삼스럽게 힙스터라면 알고 즐겨야 하는 음식으로 거론되며, 개성 있는 신규 평양냉면 전문점들이 일거에 등장한 일이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의정부파’, ‘장충동파’ 따져가며 성지순례하듯 번거롭게 찾아가야 했던 평양냉면이 어디서나 30분 거리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흔한 음식이 되었다.

지금 한국엔 그 어느 때보다도 양질의 소고기가 풍족하다. 1등급 이상 소고기가 2등급, 3등급보다 흔하다. 축산 기술이 발전하고 기업형 농가가 등장하면서 일정 등급 이상의 소를 길러내는 인프라가 완비된 것이다. 더구나 미국산과 호주산 소고기도 세분화되어 수입되고 있어 예전처럼 단지 싼 맛에 먹는 고기가 아니게 됐다. 한우 못지않게 좋은 맛을 내는 고품질 라인업이 원활히 공급되고 있다. 곰탕이나 냉면이나, 기술도 기술이지만 결국은 재료 싸움이다. 도처에 양질의 재료가 있으니 상향 평준화된 경쟁이 성립한다.

곰탕 열풍은 평양냉면 붐보다도 거세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두 요리 모두 고기국물이지만, 뜨끈한 국물 쪽이 더 편안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곰탕은 밥이요, 냉면은 면이다. 게다가 메밀 면이니 호오도 갈린다. 곰탕은 무난하지만, 냉면은 여전히 뭔가 유난스럽다.

물리적인 이유도 있다. 냉면은 한그릇 내기까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큰 솥에 육수를 낸다. 육수를 식힌다. 메밀가루로 반죽을 만든다.(자가 제분을 하려면 제분기가 필요하다.) 냉면기계에 반죽을 넣어 면을 삶는다.(강한 압력으로 분틀을 통과시켜 면으로 뽑아내고, 팔팔 끓는 물에 곧바로 떨어뜨려주는 냉면 최적화 주방 설비.) 잘 삶아진 면을 건져 얼음물에 박박 씻는다. 면은 물기를 꽉꽉 짜서 수분이 남지 않게 한다. 식당 음식 중에 이렇게 번거로운 음식도 흔치 않다.

반면 주방에서 곰탕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큰 솥에 육수를 낸다. 밥솥에 밥을 짓는다. 끝이다. 기백만원 하는 냉면 기계나 제분기도 필요없다. 단계와 장비가 적다는 것은 곧 인건비와도 직결된다. 냉면집은 육수 뽑을 기술자와 면 뽑을 기술자가 따로 있어야 돌아가는데, 곰탕은 육수 뽑을 기술자만 있으면 된다. 장비와 인력이 적게 들어 규모가 작은 주방에서도 만들 수 있다. 임대료 부담도 덜하다. 식당 입장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곰탕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같은 재료, 같은 가격대, 같은 소구 고객층이기에 더 그렇다.

술이 안 깨서, 술이 당겨서, 바람이 차서, 몸이 허해서, 일이 바빠서, 배를 곯아서, 아니면 그냥 만만해서 언제나 우리는 곰탕을 먹는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라도 후루룩 비우기 좋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면 속도 든든하다. 다만 밥이 국물에 토렴해 나오는지, 밥대로 공기에 담겨 나오는지는 곰탕집 주인장 맘이다. 여기에 시큼한 깍두기 하나만 있어도 곰탕 밥상은 완성이다. 맛의 구성으로 분해해보자면 단맛을 내는 탄수화물 주식에 고소한 짭짤함과 감칠맛을 가진 국물 메인, 그리고 아삭한 산미와 적절한 매콤함을 가진 사이드 메뉴 하나. 더 이상의 반찬도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어디에나 곰탕집이 있다.
글 / 이해림(푸드 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