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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과 [버닝]의 아버지, 그 커다란 공허

2018.08.10GQ

이준익 감독과 이창동 감독은 <변산>과 <버닝>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떠난 아들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그들이 청년 세대에게 건네는 위로와 질문은 공허하기만 하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인공 영자는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다. (‘상경’이라는 단어와 ‘무작정’이라는 부사는 얼마나 적절한 조합인가.) 하지만 서울은 아등바등 살아내려던 영자를 결국 무자비하게 부수어놓고 만다. 실제로 1970년대, 산업화와 맞물리면서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상경하는 탈향의 서사는 많은 작품에서 변주되었다. 영화사를 늘어놓기 위해 <영자의 전성시대>를 떠올린 건 아니다. 다만 나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 신기하게 우리 앞에 거의 동시에 도착한 두 명의 주인공 <변산>의 학수와 <버닝>의 종수의 귀향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변산>은 <동주>, <박열>에 이은 ‘청춘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일하게 동시대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래퍼로 성공하고 싶은 학수의 고향은 전라북도 ‘변산’이다. 6년이나 고배를 마신 랩 경연 프로그램 덕분에 학수는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의 래퍼가 되었지만, 여전히 좁은 고시원에서 근근이 서울살이를 이어간다. 학수는 성공하기 전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고 그것은 직접적인 대사로 드러난다. “이 꼬라지로 고향에 오기 싫었어야. 금의환향 콤플렉스. 고향 떠난 남자들한테는 그런 것이 쪼까 있는디, 내가 그게 좀 심햐.”

그런데 그런 학수를 고향 변산으로 불러들이는 과정은 이야기꾼으로 잘 알려진 이준익 감독의 솜씨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하다. 첫 번째 우연. 손님 차를 운전하던 학수는 끼어든 차에 놀라 화를 낸다. 그 차에는 졸업 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향 친구들이 있고, 한 명은 아들인 학수조차 찾지 않는 어머니의 산소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친구다. 두 번째 우연. 그러니 의도. 회포도 풀 겸 이들과 밥을 먹기 시작한 학수에게 고향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낯모를 전화가 온다. 평소라면 좋은 기억이라곤 없는 고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리 없지만 고향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라 어쩐지 전화를 거절할 수 없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고도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학수를 향해 친구들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코러스’처럼 고향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종용한다. 얼마간의 망설임 끝에 학수는 결국 고향으로 향한다. 변산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왜 하필 서울에 왔는지, 하필 그때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지, 그리고 또 하필, 그 다음 날, 랩 경연대회에서 제시한 주제가 ‘어머니’였는지, 잦은 우연을 포개 필연을 만들어놓고 영화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 억지스러움을 모를 리 없는 이준익에게 학수의 귀향은 어쩌면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 같다. 비단옷 없는 학수를 어쨌든 고향으로 불러들이는 것,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학수가 고향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 (뜬금없이 학수에게 수갑을 채우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학수가 변산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맥이 풀린 듯 여러 인물과 현재, 과거를 오가며 헤매기 시작한다.

반면 <버닝>의 종수의 귀향은 어딘가 교묘하다. 종수도 고향 친구 해미를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종수가 파주로 향하는 건 해미 때문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 아버지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영자처럼 고향을 떠났다가 이제는 아버지 세대가 되어버린 탈향의 청춘들이 자신처럼 고향을 떠난 아들들을 다시 고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변산>의 아버지는 왕년에 잘나가던 건달로 가족도 버리고 떠돌다 망가진 몸으로 고향, 변산으로 돌아온다. <버닝>의 아버지는 석유 붐이 일던 시기 중동으로 떠났다가 고향인 파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내는 집을 나가고, 지키고 싶던 고향은 변해버렸다. 화를 이기지 못한 그는 공무원을 폭행한 혐의로 수감된다. 그리고 두 아버지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울에 간 아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변산>의 아버지가 뻔뻔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아들을 불러들였다면, <버닝>의 아버지는 이야기 뒤에 숨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게 아무런 대사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종수에게 아버지가 있다거나 혹은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설정은 원작에 없는, 이창동의 선택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파주라는 공간을 접점으로 고향 친구 해미의 등장과 실종이 뒤엉키고, 그의 말과 존재의 진위를 찾기 위해 종수는 파주를 헤매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해미를 매개로 등장한 벤이 파주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겠다고 선언하면서 종수의 고향, 파주는 그야말로 혼돈의 장소가 되어버린다. 앞을 분간할 수 없게 짙게 내려앉은 안개는 고향을 떠나려는 학수를 주저앉게 만드는 갯벌과 공명하고, 폐가처럼 버려진 둘의 고향집엔 오래된 물건들과 뽀얀 먼지를 덮어쓴 사진들만 남아, 잊고 싶던 과거를 망령처럼 불러낸다. 학수와 종수는 영자처럼 부서지기 전에 고향을 떠날 수 있을까? 이때 이준익과 이창동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밖에 없는 변산에서 학수를 기다렸던 선미는 학수의 몸 위로 내려앉은 노을을 ‘비단옷’이라고 부르며 그가 금의환향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운 좋게 다시 선 무대에서 학수는 랩을 하다 말고 멈추어 선다. 중단한 이 공연으로 학수는 자신이 원하던 성공한 래퍼가 되었을까?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대로 끝난 줄 알았던 영화는 에필로그를 가장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학수와 선미의 결혼식 파티장에 고향의 모든 사람이 모여 춤추고 노래한다. 몸을 가누지 못했던 선미의 아버지도 일어나 함께 춤춘다. 이 어리둥절하고 나이브한 판타지라고밖에 할 수 없는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자기최면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이준익 감독의 낙천주의가 이처럼 불편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진 것 없어 노을밖에 주지 못했던 고향과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좌절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것이 이준익 감독이 (선미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충고한 ‘정면을 보는’ 태도일까?

이창동 감독은 좀 더 서늘하고 황폐한 길을 택한다. 고향, 파주에서 종수가 마주한 건 ‘모른다’라는 사실뿐이다. 삶의 의미를 찾겠다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돌아온 해미의 춤도 아무 데서나 옷을 벗는 ‘창녀’의 행위로 읽고 마는 종수는 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런 편안한 삶을 살게 됐는지, 해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린 시절 해미는 정말 우물에 갇혔었는지, 벤이 태운다던 비닐하우스는 정말 존재하는지, 자신의 분노는 어디에 기인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수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종수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종수는 학수와는 달리(선미의 말을 빌리자면) 정면을 바라보려 하지만, 어디가 정면인지 모른다.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분노 밖에 물려주지 않은 아버지와 기능하지 않는 어머니, 사랑을 받아줄 새도 없이 사라진 해미,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벤, 누구에게 종수의 분노가 향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종수 앞에 모르는 척 벤을 데려다 놓았던 영화는 마지막 순간, 종수가 벤을 살해한 건 마치 해미가 종수에게 경품추첨함에서 시계를 뽑아주었던 것처럼 랜덤한 결정에 불과하다며 슬며시 뒤로 물러선다. 종수의 선택이 각성이 아니고, 성장일 수 없는 까닭이다. 시종일관 무지한 종수를 내려다보며 관찰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영화 속 아버지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영화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결국 <변산>의 학수도 <버닝>의 종수도 성공적인 ‘탈향’과 ‘귀향’, 어느 쪽도 경험하지 못한다. 물론 ‘칠전팔기’를 외치며 도전하던 학수처럼 실패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뒤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불안한 그림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종수의 집으로 걸려온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처럼 말이다. 두 편의 영화에서 읽히는 징후는 명백한 퇴행이다. 그렇게 고향으로 불러들인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내놓는 답은 공허하다. 이준익 감독이 동시대 청춘에게 주고 싶다던 위안이란 힘든 현실을 도피하는 퇴행적 판타지에 불과하고, 이창동 감독이 그리고 싶다던 청년 세대의 무력감과 분노를 바라보는 태도는 그저 싸늘한 회피와 관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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