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art

늙어버린 한국의 젊은 작가

2018.08.12GQ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왜 드물게 새로울까? 왜 그렇게 급속도로 늙을까?

최근 몇 년만 돌아봐도 앞으로 한국소설의 보람으로 남을 만한 작품은 여럿이다. 그런데 이 평가는 이젠 하나의 장르임이 분명한 문단소설 내부를 기준 삼은 판단일 뿐이다. 문단소설 관련자들에게는 또렷이 잡히는 크고 작은 성취가 바깥의 일반 독자에게는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일반 독자에게 최근 문단소설에 대한 인상을 물으면, 돌아오는 반응은 “뭐, 별로 변한 거 없이 여전하고 그래서 지겹다”에 가깝지 않을까.

문단의 젊은 소설이 좋지만 뛰어나지는 않은, 고르게 일정한 수준에 머무는 이유는 뭘까. 가장 쉬운 대답. 문단의 젊은 작가들의 실력이 그만큼이어서. 이걸 인정하는 건 냉소도 (자기) 비하도 아니다. 오히려 그마저도 인정 못 하는 현실판단과 자의식이 문제지. 실력이 부족한 건 작가들만이 아니다. 평론가, 독자 등 읽고 쓰는 공동체 참여자 모두의 실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현재 실력이 부족한데 갑자기 거기서 새로움이 나오고 온 사회가 주목할 만한 작품이 출현하진 않는다. 이번 월드컵에서 객관적인 실력 차이에도 독일을 이긴 것과 같은 이변은 그 자체가 지나치게 한국적이다. 독자들이 문단소설에서 기대하는 새로움은 뭔가를 갈아 넣고 쥐어짜는 한국적 이변이 아니다.

문단소설 작가의 실력이 그렇다는 얘기도, 작가의 재능과 잠재력이 딱 그 수준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오히려 빛나는 재능과 가능성을 가진 그 작가가 왜 이런 실력으로 굳었을까, 라는 의문이 먼저다.

이 어려운 질문의 답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두 가지는 지적할 수 있겠다. 우선, 문단소설을 발표할 자격과 기회를 얻는 시험인 등단 제도. 모든 제도는 거기 참여하는 사람을 제도에 걸맞은 신체로 변화시킨다. 입시, 공무원 시험, 임용고시, 공채 시험과 마찬가지로, 예비 작가는 등단 과정을 거치며 등단형 신체로 변모한다. 재능이 줄어들진 않더라도 등단을 통과하면서 재능의 방향이 굴절된다. 소설이 무엇보다 자유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재능의 방향이 등단 제도가 유도하는 쪽으로 옮겨가는 것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제도를 뛰어넘는 재능과 체계를 초월하는 탁월함은 극도로 희귀하니까.

갈수록 등단 제도는 약화할 것이다. 예비 작가들은 대기표를 들고 등단의 문이 자신에게 열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작가가 되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럴 때 공정한 심사와 평등한 기회라는 장점을 가진 등단 제도가 살아남을 명분은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를 선별하는 데 있지 않다. 문단소설이라는 장르가 예비하는 문학성이라는 방향에 작가의 재능을 가두지 않으면서, 우리가 알던 세계의 경계를 넓혀주는 새로운 시선에 기회를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문장이 서툴고 문학성이 떨어져도 그런 시도를 하는 작품이 있다면, 등단 제도의 심사위원들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라도 그 작품을 밀어줄 수 있을까. 문학성으로 다른 문단소설 작가들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출판시장 전체의 다른 작가들과 경쟁할 작가를 지지할 수 있을까. 그런 젊은 작가가 늘어나면 문단소설의 새로움은 소문보단 자주 일어날지 모른다.

등단 이후에는 안심해도 될까. 젊은 작가의 재능은 등단 이후 다시 굴절될 위기에 처한다. 문단에 들어선 작가는 좋든 싫든 ‘우쭈쭈 문화’에서 살아간다. 우쭈쭈 문화는 원로부터 갓 등단한 작가까지 두루 적용된다. 이 문화는 어떻게 정착되었을까. 문학이란 인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인데, 인정이라는 자원은 불균등 배분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업계 형편으론 금전적 대리 보상마저 넉넉히 줄 수 없으니, 결국 업계 종사자들끼리 위로라도 하듯 서로서로 인정을 퍼주는 문화가 됐을 테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에서 드러나듯, 돈 없는 업계 입장에서는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를 우쭈쭈라도 해서 붙드는 게 사업의 논리로 당연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받기 어려운 작가가 결핍된 욕망을 우쭈쭈 인정으로라도 달래는 게 이상하진 않다.

우쭈쭈 문화란 별스러운 게 아니다. 등단 이후에 문단 업계의 정사원이 되면, 그때부터 업계 종사자들로부터 선생님 등의 호칭으로 불린다.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스스로 나가떨어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쭈쭈 문화가 서서히 내면화된다.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문단의 사교 문화가 어느새 자연스러워지고 이젠 예절 대신 의전을, 대접 대신 접대를 기본으로 삼는 경력직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등단이라는 기묘한 제도는 능력주의를 방패 삼아 예비 작가들을 줄 세우는데, 정작 등단 이후는 일종의 신분제에 가깝게 운용되는 모순이 점점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이 문화가 젊은 문단작가의 재능이 빠르게 소진되는 경향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우쭈쭈 문화는 문단작가를 모두 막내로 만든다. 나이가 많건 적건, 선배건 후배건 그냥 아들, 딸과는 다른 막내 정체성을 부여한다. 단독성과 자율성을 얻으려는 소설적 시도와 동시에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하고, 자립하다 보면 당연히 소멸하는 울타리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작가가 된다. 소설적 야심보다는 문단 업계의 보호 아래 제한된 경쟁 속에서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와 그에 따르는 경제적 보상에 만족한다.

막내 정체성을 장착한 작가는 이제 문단에서 가출하지 않는다. 우쭈쭈 문화에서는 작가의 동기부여가 바뀐다. 뭔가를 쓰기 시작했을 때 가졌던 작가의 야심은 쪼그라들고 문단 내 동료들과의 작은 비교 우위에 안도한다. 뭘 써도 일단 우쭈쭈 받으면서 문단이라는 자기 집안의 지원 속에서 몇 번의 기회를 안전하게 얻는다. 다른 분야의 최전선과 겨루고, 세계와 마주하면서 소설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결기는 희석된 채 점점 관료제 공무원 같은 모습을 갖는다.

작품의 내적 논리에 따르지 않고 업계의 일정에 따라 좋지만 뛰어나지는 않은 작업을 내놓더라도, 업계의 낡은 관행에 지나지 않는 우쭈쭈를 여기저기서 받다 보면 마치 세상이 날 알아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업적보다 늘 부풀려진 대접을 받다 보면, 그건 문단작가라는 지위에 덧붙은 장식이란 걸 잊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열심히 했는데 왜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퇴행하는가, 라는 의심은 곧 사라진다. 이렇게 낙후된 문화는 빛나는 재능을 잠식한다.

그나마 다행은 우쭈쭈 문화에 적응할 수 없는 젊은 작가들이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선생님을 비롯한 과포장 호칭을 사양한다. 위계적 의전, 접대 문화에서 가장 고치기 쉬운 신호는 호칭이다. 문학은 아직 가장 강력한 개인화의 장치다. 그런 문학을 한다면서 관련 종사자들이 대등한 개인으로 만나지 못하는 문화라면, 좀 망해도 좋지 않을까. 선배가 후배를 부르는 호칭을 후배가 선배에게 못한다면, 원로가 신입을 부르는 호칭을 신입이 원로에게 못한다면, 그렇게 위계적인 호칭이 남을 수밖에 없는 문화여서 님이나 씨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 사소한 호칭 하나 상호 존중하는 방식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젊은 작가들은 부디 이 문화에서 어서 탈출하시길. 뒤도 돌아보지 말고 멀리 달아나 새로운 문화를 만드시길.

또, 어떤 작가들은 등단과 미등단의 구별을 허물고 ‘비등단’의 자리를 마련한다. 아직 등단하지 못했으나 언젠가 그렇게 될 미등단이란 말을 버리고, 예비 작가란 말에 내포된 ‘아직’을 버리고, ‘이미’ 그렇게 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문단의 열외에 서는 비등단 작가들은 익숙한 것들 사이에 새로 경계선을 그어 스스로 변화의 동력이 되고 있다.

등단 제도와 우쭈쭈 문화를 바꾸거나 벗어나서, 인정의 위계적 배분이 아닌 수평적 존중의 문화를 만들어내도 작품이 갑자기 탁월해지진 않는다. 재능과 실력이 부족해서 나온 결과라면 받아들여야겠지만, 낡은 제도에 의해 재능의 방향이 굴절돼서 나온 결과를 실력으로 인정하기는 아쉽다. 젊은 작가들의 재능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 아니라면, 그들 자신도 모를 잠재성까지 끌어낼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실력 부족이라는 진단에 서러움과 억울함이 남지 않게. 새로움은 그 바탕에 있다.
글 / 박준석(문학평론가)

    에디터
    정우영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