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할리우드의 개척자 수현

2018.10.25GQ

할리우드 한복판을 동양인, 여성, 수현은 뚜벅뚜벅 걸어간다.

재킷, 르메르. 브라 톱, 니나리치. 플리츠 스커트, 토가. 부츠, 로저 비비에.

 

벨벳 롱 드레스, 벨트, 모두 보테가 베네타.

 

홀터넥 톱, 펌프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팬츠, 지암바티스타 발리. 벨트, 루이 비통.

 

블랙 터틀넥 벨벳 원피스, 포츠 1961.

시스루 톱, 프라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개봉을 앞두고, 수현보다 클라우디아로 불릴 일이 많죠? 맞아죠. 친한 배우들은 클라우드라고도 불러요. 프리미어 행사 전까지는 수현으로 지내야죠.

클라우디아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었나요? 어릴 적 뉴저지에 살 때, 본명을 쓰고 싶었지만 발음을 못 하더라고요. 아시안은 약속한 듯 제니, 제니퍼 같은 이름을 썼고, 엄마는 앨리샤를 추천했는데 백인만 쓰는 이름 같아 싫었어요. 그러다, 한 소설 속 독특한 아시안 주인공이 생각났죠. 그 이름을 따왔어요.

그 이름으로 디즈니 마블의 <어벤저스2: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이어 워너브라더스 ‘해리포터’ 세계관 5부작의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캐스팅됐어요. 정말 좋지만 무겁기도 해요. 아시안 배우로서 사명감까진 아니지만 책임감을 느끼거든요. 저도 해리포터에 열광하며 자란 세대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죠.

수현의 ‘내기니’ 역할이 공개되고, 전 세계 해리포터 팬들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어요. 볼드모트의 충실한 수하였던 그 뱀이 사람이었다니! 그만큼 중요한 비밀이라 철저히 보안했어요. 모든 공식 문서와 대본에 내기니 대신 나탈리라는 일종의 코드네임으로 쓰여 있었죠. 어둡고 가려진 것에도 서사를 부여하는 J.K. 롤링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이번 영화는 총 5부작인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이라 내기니가 ‘해리포터’의 내기니라는 게 실감이 나진 않아요. 나머지 3편이 남아있지만, 2편 이후 내기니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거든요.

내기니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최종 오디션 때 이 역할이 내기니라는 걸 알았어요.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이 뱀으로 변신해보라고 했죠. 뱀이라니! 당황했지만, 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떠올리며 연기했어요. “5퍼센트 뱀같이 말해보라”는, 인간과 뱀을 섞어보라는 요구도 있었고요. 에즈라가 진짜 뱀 같다며 칭찬했죠. 아무래도 에즈라와 합이 맞아서 뽑아주신 게 아닐지, 하하. 사실 전 뱀을 무서워하는데, 요즘도 그렇게 꿈에 뱀이 나와요.

에즈라 밀러와 가까운 배역인데, 교감을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나요? 에즈라의 공연도 보러 가고, 영국의 깊은 숲속에 들어가 드럼을 연주하는 의식에 참여한 적도 있어요. 우린 정말 다른데, 너무 다른 사람끼리도 그렇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연기를 할 땐 서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나중엔 눈만 찡긋해도 알아차렸어요. 에즈라는 늘 이렇게 말했어요. “you got it? yes, we got it.”

내기니가 사람이었다는 설정도 뜨거운 감자였지만, 아시안 여성에게 도구적이고 수동적인 캐릭터를 부여한 것이 차별적이란 지적도 있어요. 내기니는 불행을 안고 있는 캐릭터예요. 언제 뱀으로 변할지 모르고, 주어진 시간도 별로 없고, 늘 불안에 떨죠. 그렇다고 약하기만 한 건 아녜요. 크레덴스를 정서적으로 지지하는 캐릭터죠. 비슷한 상처를 가진 크레덴스가 두려움에 떨 때도, 내기니는 추진력 있게 행동해요. 결코 약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할리우드에서 과학자, 예언자, 전사, 뱀 인간까지 연기했지만, 하고 싶은 건 더 많겠죠? 아시안 여성 배우로서 어떤 욕심이 있나요? <다크타워: 희망의 탑>의 예언자 아라도 단순한 영적 존재라기보단 여성 리더에 가까워서 한 거예요. 할 수 있는 한 인종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는 역할을 맡으려 노력할 거예요. 욕심이라면, 비범한 인물보다 일상적 드라마의 주인공이 탐나요. 그들은 대개 백인인데, 인간의 평균값을 백인으로 보는 거죠.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는 게 목표예요. 산드라 오가 <킬링 이브>로 아시아계 최초로 에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올랐는데, 이브는 아시안 여성이어야 할 이유 없이 아시안 여성이거든요. 이런 역할이 더 주어져야 해요.

과거 인터뷰에서 ‘마블의 신데렐라’라는 표현에 대해 “마블에 합류한 아시아인에게 붙여준 수식어”라고 쿨하게 말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운이 좋았던 건 사실이죠. 하지만 신데렐라라기엔 한국에서부터 열심히 연기했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랍니다. 하하하.

신데렐라보단 개척자라는 말이 어울리겠죠. 부끄럽지만, 한국 배우로서 처음인 것들이 있긴 하죠.

수현은 키가 크고, 영어가 유창하고, 교포로 오해도 받죠. 한국에선 소위 ‘차도녀’ 역할을 주로 해왔고요. 연기하는 입장에선 짐이 될 때도 있었나요? 제가 풀어야 할 숙제예요. 한 감독님은 “수현 씨는 카페에서 알바할 얼굴이 아니잖아”라고 하신 적도 있어요. 한국에선 여자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수수하고 귀여운 얼굴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건가? 한국에선 여자 배우를 센 캐릭터와 귀여운 캐릭터로 이분하는 경향이 있고, 들어오는 역할에 한계가 있었어요.

그런 수현의 가능성을 할리우드에서 먼저 알아본 거네요. 도전할 계기를 만들어준 거죠. 할리우드에선 제 배경이나 성장 환경에 관심 없어요. 한국이란 나라에서 온 신인일 뿐이니까. 키는 거기서도 큰 편이지만, 신경 쓰일 일은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고생했지만 자유로웠어요. 한국에서 굳어진 편견을 부수면서 새로운 날 발견했죠.

기존의 것을 버리는 과정이 힘들진 않았나요? 아녜요, 재미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거든요. 힘든 건 한계 짓는 시선이었어요. “거기서 하면 얼마나 더 할 수 있겠어?” 같은 말들. 이젠 의연하게 넘겨요. 네 편의 영화와 드라마 두 시즌을 찍었고, 카자흐스탄과 런던을 오가며 말을 타고 뛰어다녔고,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어요? 항상요. 어릴 때 공항에 놀러 가는 취미가 있었어요. 세계 어느 곳이든 데려다주는 ‘포털’처럼 느껴졌거든요.

그 시절 수현은 어떤 아이였을까요? 십 대의 저는 한쪽 팔엔 <타임>지를 끼고, 머릿속으론 뱀파이어에 대한 상상에 푹 빠져 있는 애였어요. 핑크색이라면 질색하고 검은 옷만 입었고요. ‘고딕’ 추종자였거든요. 팀 버튼 영화와 스매싱 펌킨스, 배트맨 코믹스를 끼고 살았죠. 특히, <버피 더 슬레이어>라는 소녀 혼자 뱀파이어를 헤치우는 드라마는 정말 좋아했어요.

예상보다 컬트적인 취향인데요? 왜 그런 공상에 빠졌어요? 뉴저지에서 창의특별반이었는데, 한 명을 월반시키는 제도가 있었어요. 백인 아이와 제가 후보에 올랐는데 이유 없이 그 애가 됐죠. 그때부터 선을 느꼈어요. 백인 아이와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집엔 놀러 갈 순 없고, 창의특별반에 들어갈 순 있지만 월반할 수는 없는 선. 이방인의 기분을 그렇게 풀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어선 안 된다고 해서 돌아왔는데 정작 한국어를 못해 고생했죠. 해외와의 끊을 놓지 않으려고 <타임>지 사설을 챙겨보고, 에세이를 쓰고, 영어도 잊지 않으려 했어요.

그때 넓힌 시야가 지금의 수현을 만든 거네요. 청소년기엔 정체성 혼란도 왔지만, 결국 그 경계 없는 정체성이 지금의 날 만들어준 거예요. 지금 세상에선 혼종적 정체성이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어요. 전 한국인 배우이기에 아시안 배우로서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고 있지만, 그건 동시에 제가 그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기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지금 할리우드는 영화 안팎으로 여성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는 곳이잖아요. 거기서 일하는 건 어떤가요? 현장에서 일할 때 젠더 의식이 확실하다고 느껴요. 인종 문제에 대해선 더 열려야 하지만,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문제에선 한국보다 고민이 앞서 있어요. 전 여자로서 다른 여자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를 연기할 때 행복한데, 그런 건 만족스럽죠.

여자로서 다른 여자들에게 힘이 되어줄 때가 있나요? 대단치는 않지만 일상적으로요. 어떤 여성에게 성차별적 농담을 하면, “뭐라고? 다시 말해봐. 진심이야?”라고 바로 짚어요. 여자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되게 강한데, 여대를 나온 게 큰 것 같아요. 백팩 메고 여성학 특강도 열심히 찾아들었죠.

수현에게 힘이 되어준 여성이 있었다면요? 어릴 때 아무리 졸려도 꼭 CNN 일본계 여성 앵커인 카루나 신쇼의 뉴스를 봤어요. 그때부터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시절 영자 신문 기자도 했고, 방송 기자 인턴도 했어요.

이야기를 하는 배우가 됐으니 그 꿈은 이뤄진 셈이네요. 맞아요. 이젠 제 목소리를 잃지 말아야죠.

수현은 뭘 믿나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로마서의 한 구절인데 신념처럼 여겨요. 선하다는 건 착하다는 게 아녜요. ‘바르다’는 것에 가까울 거예요. 선한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해요.

앞으로의 필모그래피에도 그 의지가 반영될까요? 그래야죠. 국가와 비중에 상관 없이 하고 싶은 이야길 할 거예요. 인디필름과 한국영화에도 갈증이 있어요. 이야기 중인 미국 드라마는 인종차별을 다룬 시대극 속 유일한 동양인 역할이에요. 저변을 넓히는 의미가 커서 하고 싶은데, 일정 조율이 잘 되길….

그나저나 저녁엔 뭘 먹을 건가요? 루콜라 샐러드와 유럽식 콩 수프. 채식을 하거든요. 별로로 들릴 진 몰라도, 맛있어요.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곽기곤
    스타일리스트
    신지혜, 류가영 at Intrend
    헤어
    채수훈 at Garten
    메이크업
    서희영 at Jennyhouse Seor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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