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맞는 서정시

시대에 맞는 서정시

2018-10-31T10:27:03+00:00 |culture|

서정시의 시대는 끝났지만 어떤 서정시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해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여기에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에 대한 질문과 ‘서정시’에 대한 질문이 동시에 들어 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온 문학 형태 또는 예술 형태가 인간 문명의 발전 서사와 어떤 연관성을 맺느냐는 까다로운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속내를 담고 있다. 예전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서정시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의 주류였던 서정시가 지금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서정시의 영향력이나 파괴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좀 고루해 보일지 모르지만 서정시란 뭔가에 대한 이론적 규정이 일단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보편적 규정이라기보다 시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서정시 抒情詩는 영웅이나 신을 찬양하는 노래인 서사시 敍事詩와 달리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담고 있는 시로서, 정 情이라는 말을 포함한다. 예전부터 써온 표현은 아니고, 서양어 ‘Lyric’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하프를 닮은 고대인의 악기 ‘리라’에서 나왔다. 서정시가 악기, 즉 음악과 일체가 된 ‘노래’였다는 걸 의미한다.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담은 서정시가 음악과 일체화된 노래였다는 사실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옛사람들의 중대한 형이상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람들은 음악이 우주 질서의 일부이자 존재의 표현이라고 여겼다. 서정시를 본격적으로 창조한 고대 그리스인들 중 피타고라스 같은 학자는 음악적 질서를 수학과 동류의 차원으로 인식했고, 우주는 수학적이고 음악적인 균형, 즉 비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동아시아의 중요 경전이었던 <예기>에는 소리의 탐구가 음악의 탐구요, 음악을 잘 다루는 인간은 우주의 질서를 잘 이해하기 때문에 바른 심성을 길러 정치도 잘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하는 하류 사회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불리던 민간 노래를 듣고, 노래는 바람이고 가르침이며, 바람이 불면 초목이 움직이고, 이를 가르치면 사람이 변화한다고 썼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음악과 자연, 우주적 섭리와 인간 정신·정서가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옛사람들의 관점이다. 서정시는 우주와 인간, 자연과 인공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의 유기적 호흡을 반영하는 노래였다. 서정시의 이 정서는 오랜 시간 시의 주류, 어쩌면 더 이상 영웅 찬가나 신화가 노래로 불릴 수 없었던 고대 이후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종교적 찬송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일한 시의 형태였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의 유대는 끊어졌다. 파스칼이 표현한 바, 인간은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며 그 빈 공간에서 깊은 공허와 공포를 느낀다. 밤하늘의 별들이 신의 축복으로, 그 축복이 대지의 꽃들로, 사슴 뿔의 문양으로 서로를 조응하고, 마침내 그것이 인간의 목소리에서 노래로 흘러나오는 존재 연관의 사슬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우주의 신비를 찬양한 낭만주의에서 가장 찬란한 노래를 부른 서정시의 시대는 서양에서는 상징주의의 빛을 끝으로 막을 고한다.

여기에서 보들레르의 인공낙원 찬양은 이중의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인공낙원은 더 이상 존재 연관을 갖지 못하는 자연 세계로부터 인공세계로 변이하는 시인(인간)의 감정 이동선을 보여주며, 자연과 인공세계, 인간의 노래와 우주적 질서 간의 유연한 리듬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정직한 시인의 유일한 임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엄격한 음악적 정형성을 지닌 전통시의 형식들을 버리고 노래로 불릴 수 없고 다만 읽을 수 있는 ‘산문시’를 발명한 것은 이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대체로 서양에서는 그로부터 현대시가 시작됐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 그친다면 서정시에 대해 자칫 크게 오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전히 보들레르 이후 두 세기가 지나도록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많은 서정시가 창작되고 있으며, 수많은 서정 시인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현대시’가 아니며 그들은 ‘현대 시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상대적으로 현대성을 갖지 못한 서정시와 현대적 서정시로 나뉘는 기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이 둘을 가를 수 있는 유력한 형태상의 차이는 ‘현대적 시’는 ‘낭송’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시각적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표면적 음악성을 정형적으로 드러내는 시가 그 형이상학에서 현대적 조건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일례로 한국에서는 시조가 ‘현대시조’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쓰이지만, 음악적 정형성으로 드러나는 조화의 이상을 전제로 한 그 시가 현대적 사유를 담는 서정시가 되기엔 역부족이다. 지방의 문학 행사 중에는 지금도 ‘낭송회’라는 표현을 쓰는 행사가 있다. 반면 도시의 문학 행사에서는 이제 거의 ‘낭독회’라고 하지 ‘낭송회’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다. 노래할 수 있는 시와 노래할 수 없는 시에 대한 구별이 도시적 삶에 바탕한 현대시의 이해 조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국에서 이 구별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인은 이상이다. 이상 이후 한국 시는 시가 더 이상 낭송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이 형식의 구별 자체가 현대시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한국 시는 이상으로부터 현대 시의 두 가지 특징적 태도를 배웠다. 하나는 보들레르 이후 서양 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의 눈을 주관적 감정이 아닌 메마른 인공사물 세계로 이동시키는 일이었다. 이것을 흔히 ‘모더니즘’적 시선이라고 한다. 둘째 나의 정서를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나’는 세계와 불화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도 불화한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발견은 프로이트로부터 나온 현대 인간학의 최대 발견인데, 이것은 시의 문법처럼 이루어지는 꿈의 분석을 통해 도출한 것이다. 한마디로 통합성의 상실, 세계 조화의 불가능성이 현대시의 조건이며, 이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서정시를 전통적 서정시와 비교해 ‘불행한 서정시’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이 시대에는 어떤 서정시가 가능한가, 또는 현대성을 띤 서정시란 어떤 형태인가라고 바꾸어 묻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나는 이것을 시는 ‘아름다운 노래’이거나 ‘낯선 말’이라는 황현산의 규정을 받아들여, ‘노래가 되지 못하는 낯선 말들의 세계’라고 표현하고 싶다. 대개 그런 말들로 이루어진 주체의 서정은 불행하다. 한국 시사에서 그것은 주체의 분열인식과 세계와의 불화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간 이상의 불행한 정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문학사의 계보로 설명할 수도 있다. 황지우와 이성복의 젊은 날 시가 지니고 있던 강력한 자의식과 화법의 아이러니가 거기에 속하고, 최승자와 김혜순이 ‘여류시인’이라는 거북스러운 비평 규정을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여성 시’로 한국 시를 진일보시킬 수 있었던 것도 패러디와 아이러니를 경주하는 공격적인 시문법 덕택이었다. 진짜 얼굴이 뒤통수에 있거나 여러 개인 황병승의 주체, 가족삼각형의 억압 속에서 그로테스크한 복수극을 감행하는 김민정의 서정, 자기 안에 누군지 모를 비성년 목소리를 보유하고 있는 신해욱, 몇 개의 다른 시공간이 나뉘어 있기도 겹쳐 있기도 한 김행숙, 진술될 수는 있지만 스크린으로 이미지화될 수는 없는 김언, 끝없이 되돌아보며 빈 공간을 응시하는 이장욱의 질문하는 화자, 기도할 수 있는 의식 너머의 혼에 의지하는 이영광. 이들의 시가 모두 불행한 서정시다. 이런 시들은 이 시대에 놓인 존재 상황, 주체의 조건을 이해하고 쓰인다. 지금 유의미한 서정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 자기 조건에 대한 숙고를 통해 발화하는 서정시다. 세계와의 연관이 끊어진 주체가 온전한 존재의 가능성에 닿는 일은 이제 명료한 의식의 표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직관하는 이영광의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깔깔대는 혼이여/ 거품 같은 몸이여/ 모두 일 나가고 저물도록 혼자 집 보는 것/ 무섭고 외롭더라도/ 조금만 더 외로워보아/ 조금만 더 정신을 잃어보아/ 원한 없는 열 개 스무 개 닭 모가지들이/ 갸우뚱 올려다보는 하얀 마당/ 원한 없는 열 개 스무 개 닭 모가지들이/ 갸우뚱 내려다보는 검은 잠 속(이영광 ‘깔깔대는 혼’ 중)”. 글 / 함돈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