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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어떤 쇼핑

2018.12.23GQ

보테가 베네타 수트를 여러 벌 갖고 있다. 대체로 어깨가 딱 맞는 재킷과 헐렁하고 밑위가 긴 팬츠 세트다. 오래 전 토마스 마이어를 만났을 때, 그는 구깃구깃한 베이지색 스리버튼 면 수트를 입고 있었다. 거칠고 짧게 자른 부스스한 머리와 덜 깎은 턱수염, 독일 남자 특유의 단단한 두상. 약간 짜증 난 표정으로 마침 고장 난 에스프레소 머신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을 얼핏 봤을 뿐인데 그에게 완전히 반했다.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은 어깨가 뾰족하고 허리는 완곡한 선으로 부드럽게 이어져 남자 재킷으로는 드물게 드라마틱했다. 게다가 팬츠 폭이 무척 넓어서, 이전에는 본 적 없는 비율이었다. 단번에 눈에 띄는 형태인데도 전혀 과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굉장히 멋있었다. 그 실루엣에 반한 나머지 비싼 값을 기꺼이(는 아니고 노심초사하면서) 치르고 보테가 베네타 수트를 계절별로 샀다. 그리고 입을수록 점점 더 좋아하게 됐다. 로고가 없고, 유명인에게 무료로 빌려주지도 않으며, 시즌에 따라 디자인이 많이 바뀌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지큐> 최종 면접을 보던 날도 보테가 수트를 입었다. 진한 쥐색 수트에 어울릴 신발을 생각하다가 나이키 축구화를 야심 차게 골랐다. 운동화만 많이 신던 시절이어서 좀 다른 걸 신어볼까 하는 마음에 보급형으로 싸게 샀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어 잔뜩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면접 날 오후엔 비가 왔고, 차림에 우산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푸드 코트 구석에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파는 여자애한테 맡겼다. 고급 수트를 입고 스파이크가 달린 진짜 축구화를 신고, 우산을 밖에 두고 들어간 이 모든 앙상블이 매우 세련되었으니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축구화가 긴 복도 위에서 ‘캉캉캉’하는 금속성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앗, 이게 아닌가’ 싶어졌다. 아찔한 순간은 있었으나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의 보스는 “신발 좋다. 수트는 더 좋고!” 하고는 박력 있게 사인을 했다. 오리무중 패션을 귀엽게 봐준 덕에 합격은 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차림이야말로 잘한 짓은 아니었다. 우아한 수트에 ‘어쩌자고’ 축구화라니. 슈론의 론서 역시 그 수트에 어울릴까 해서 샀다. 그때는 바늘을 휘어서 만든 것처럼 작고 얇은 금테 안경을 콧잔등에 걸치는 게 대유행이었지만, 아름다운 건축물 같은 수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크고 둔탁한 디자인을 골랐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것도 성공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쇼핑의 기준은 같다. 아주 평범하진 않지만 지나치게 달라서 튀지는 않아야 하고, 눈에 띄는 건 싫지만 다른 사람보다 멋있어 보이고는 싶다. 얼핏 멋져도 눈요기가 되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건 싫다. 무자격인 채 겉멋 든 예술가만이 아라비아 고무로 붙인 것 같은 콧수염을 기르거나 일부러 신발에 구멍을 낸다. 덧붙이자면, 밀리 바넬리의 동앗줄 꽃다발 머리는 처음부터 거슬리더니 짧은 전성기는 립싱크 사기극으로 종결되었고, 클럽에 가도 제일 요란한 자는 구석에서 술만 축내고 춤은 티셔츠 입은 애들이 제일 잘 춘다. 그래서 한동안 물건을 살 땐 토마스 마이어가 보테가 베네타 시절에 만든 수트를 주축으로 거기 어울리는 조합을 생각하곤 했다. 가끔 성공도 했지만 실패가 더 많았다. 요즘은 예전만큼 물건을 사들이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의 보테가 베네타 수트를 입고 있는 것만으로 유행의 회오리에서 빠져 나와 고요한 평원에 선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가끔, 어제 파티에서 입었던 수트를 그대로 입고 출근한다. 밤새 노느라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기보다는 어떤 옷을 좋아하면 그걸 며칠이고 입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싫지 않아서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도 토마스 마이어에게 배웠다.

    에디터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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