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자보다 루피와 우원재가 더 기억에 남는 이유

우승자보다 루피와 우원재가 더 기억에 남는 이유

2019-01-07T10:47:29+00:00 |music|

4강을 가렸다. 물론 훌륭한 래퍼는 많다.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개코와 이센스, 도끼와 빈지노도 있다. 다만 최근 랩보다 노래에 더 집중하는 듯 보이는 개코나, 이미 명예의 전당 티켓을 예약했다 말할 수 있는 이센스와 도끼, 현재 부재중인 빈지노를 다시 얘기하는 건 좀 싱겁다. 그보다는 갓 지금의 이름인 두 사람과, 여전히 지금의 이름인 두 사람에 대한 여기가 더 흥미롭다(고 여긴다).

루피는 <Show Me The Money 777>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우원재도 지난 시즌 우승하지 못했다. 다만 (적어도 내게) 각각의 시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루피와 우원재였다. 공통점이라면, 둘은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 래퍼다. 가사를 듣기도 전에 그렇게 되곤 했다. 한국 힙합이 아닌 해외 랩 곡을 들을 때, 가사가 잘 안 들려도 목소리의 톤이나 숨소리만으로 이 래퍼가 대강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루피와 우원재가 그랬다. 그래서 과연 이 사람이 오늘은 어떤 무대를 만들지 집중하게 됐다. 열광하는 무대를 즐기기보다 영화를 보듯 숨죽이는 쪽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사에 더 귀를 기울였다. 랩은 기본적으로 노래보다 말에 가깝다. 노래가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쪽이라면, 랩은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일단 이 두 래퍼는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요령이 있었다.

물론 가사까지 잘 쓰면 더 좋을 것이다. 가사를 잘 쓴다는 데도 여러 기준이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깊이 있는 가사, 혹은 재치 있는 가사, 무엇보다 거짓말 하지 않는 솔직한 가사 등등. 루피의 분위기는 가사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루피의 가사가 함량 미달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루피가 휘어잡은 분위기는 멋으로 이어지는 쪽이었다. 거기에는 그의 ‘교포 느낌’ 나는외모와 멋진 패션도 한몫했을 것이다. 가사가 좀 싱거우면 어떤가. 힙합을 듣는 게 경전을 읽는 일이 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I say yeh yeh yeh yeh yeh, I say yeh yeh yeh yeh yeh(‘Robot Love’ 中)” 같은 구절을 그렇게 자기 식대로 근사하게 말하는 래퍼를 본 적은 드물다.

다시, 물론 가사까지 잘 쓰면 더 좋다. 우원재는 가사를 이상하게 쓴다. 이상하다는 건 독창적이란 말과 매우 가깝다. 예를 들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한 노래 안에서. “돌아가서 다시, 돌아가서 돌아가서 다시, 돌아가서 다시(‘과거에게’ 中)”, “오늘도 똑같은 밤을 맞어, 그래서 똑같이 의존하고 그래서 똑같은 가살 썼고 그래서 똑같은 모잘 눌러쓰고 똑같이 눈을 깔어 나(‘또’ 中)”. 이 두 구절은 보편적으로 반복하는 후렴구가 아니다. 거기서 그의 기분을 느낀다. 사람이 화나면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했던 말을 반복하지 않나? 우원재의 가사와 랩엔 그런 생생함이 있다. ‘삑사리’도 나고,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기도 한다. 소리를 지를지라도 그것은 관객을 향한다기보다, 순전히 자기를 향한다. 그건 실로 인간 우원재가 보이는 일이었다. 지금 시대에 래퍼가 무조건 자기 얘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자기 모습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래퍼의 말에 귀기울이게 되는 건 여전히 자연스럽다. 우원재는 <Show Me The Money>가 끝나고 꼭 1년 후, EP <Af>를 발표했다. 수록곡 ‘CASH’에서 그는 기술적으로도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이른바 밀고 당기는 랩을 훌륭히 구사했다.

일단 이렇게 올해 가장 돋보인 두 명의 이름을 가장 먼저 최고의 래퍼 후보로 올린다. 당연히 기준은 지금이다. 힙합은 지금의 음악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랩은 무척 빠르게 변한다. 불과 몇 년 전 최고의 래퍼로 꼽히던 이름이 퇴물 취급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힙합 신이다. 모호한 ‘분위기’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낸 이유의 배경은, 랩을 잘한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완벽하다는 말과 같지 않아서다. 음역이 얼마나 넓고, 고음이 무슨 음까지 올라가고, 성량이 크고…. 보컬에 대해 얘기할 때 주로 논의되는 정량적 기준이다. 랩에는 정량적 기준을 매기기 어렵다. 물론 정량적으로 뛰어나다고 무조건 좋은 보컬리스트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정량적 기준에 따른 완성도에 부합하지 않는 보컬리스트를 대상으로 최고를 뽑는 경우 또한 드물다. 여기까지는 사실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랩은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스스로를 도시의 왕으로 칭하거나, ‘현존 최고의 래퍼(Best Rapper Alive)’ 랭킹처럼 최고를 가리는 것을 꽤 즐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래퍼를 평가할 때는 랩 외적인 요소들을 자주 덧붙이게 된다. 간단히는 그의 음악이 얼마나 독창적인가부터 이 사람이 힙합 신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언행일치를 하는지 등등. 분위기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동시에 힙합을 말할 때 유독 자주 등장하는 ‘크레딧’이란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얼마나 험난한 경쟁을 이겨냈는지, 데뷔 전 무슨 믹스테이프를 만들었는지. 이 모든 것이 래퍼의 크레딧이다. 직역하면 신용 정도쯤이겠지만, 뭔가를 쌓아 올렸다는 뜻에서 지속 가능성일 수 있다. 그리고 힙합처럼 지금을 좇고 새로움이 가장 가치있는 필드에서라면 지속 가능성은 래퍼를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계속 지금의 이름, 오늘의 이름으로 남아 오래 버티는 것. 수많은 혈기왕성한 젊은 래퍼들 사이에서 매 순간 실력을 증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 그 기준에 부합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루피와 우원재 곁에 놓는다. 더 콰이엇과 마스타 우. 루피와 우원재는 아직 지속 가능성을 증명할 만큼 경력이 길지 않다. 그러니 이 항목에 대해선 평가할 수 없다. 일단 더 콰이엇과 마스타 우 또한 루피와 우원재의 장점을 갖고 있다. 더 콰이엇은 참 쉬엄쉬엄 랩을 한다. 이건 너무 허술하게 쓴 가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공백도 많다. 그러니까 <Show Me The Money>라는 랩 경연에서 가장 경연답지 않은 랩을 하는 사람이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격이다. 무대 호응을 이끌고 침 튀기며 무대를 ‘조지는’ 쪽이라기보다, 자기 페이스대로 무대를 끌어당긴다. 마스타 우는 더 콰이엇보다 경력이 더 길다. 그가 래퍼로 주요한 역할을 맡은 이현도의 <완전(完全) Hiphop>은 2000년에 나왔다. 그 후로 두 장의 정규 음반과 세 장의 싱글을 냈을 뿐이다. 하지만 아마도 <Anecdote> 당시라면 분명 최고의 래퍼로 뽑았을 이센스와의 근작 컬래버레이션 ‘MTLA’에서 명불허전 이센스의 랩마저 이어서 받아치는 마스타 우의 ‘꾸준하지 않은 꾸준함’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그는 2014년작 ‘이리와바’는 도끼와 바비, 2016년작 ‘야마하’는 오케이션, 2017년작 ‘Shit’은 다시 도끼, 그리고 이번엔 이센스와 작업했다. 각각 매해 가장 뜨거운 이름이 분명하다. 그의 기묘한 ‘크레딧’에 끌렸듯, 그가 이런 행보를 통해 ‘크레딧’을 쌓았든, 마스타 우는 자기의 방식대로 신에서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4강을 가렸다. 물론 훌륭한 래퍼는 많다.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개코와 이센스, 도끼와 빈지노도 있다. 다만 최근 랩보다 노래에 더 집중하는 듯 보이는 개코나, 이미 명예의 전당 티켓을 예약했다 말할 수 있는 이센스와 도끼, 현재 부재중인 빈지노를 다시 얘기하는 건 좀 싱겁다. 그보다는 갓 지금의 이름인 두 사람과, 여전히 지금의 이름인 두 사람에 대한 여기가 더 흥미롭다(고 여긴다).

이 넷 중 단 한 명을 고르긴 어렵다. 다만 2019년의 문을 열어젖히는 시점에서 넷 모두 누구보다 신선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는 점만은 같다. 더 콰이엇은 지난 9월 트랩도 붐뱁도 아닌, 모던 훵크를 연상케 하는 인스트루멘털과 이름값 대신 신예급 피처링으로 허를 찌르는 앨범 <Glow Forever>로 새 출발을 알렸다. 불쑥 일리네어 레코즈를 설립하며 이전과 완전히 다른 음악을 들고 나왔을 때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우원재는 분위기에 기술과 실험(‘Cash’ 같이 전자적인 곡의)을 더한 웰메이드 EP <af>로 연착륙했다. 마스타 우는 YG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 종료 후 XYZ 엔터테인먼트라는 1인 기획사를 세우고 그의 랩처럼 느리고 유연하게 싱글로 잽을 날리는 중이다. 루피는 <Show Me The Money 777> 준우승 이후 우승자이자 동료인 나플라와 지난 12월 싱글 ‘Woke up Like This’로 신호탄을 쐈다. 모두 분기점을 갓 지났거나, 새로운 분기점을 앞두고 있다.

누가 더 다채로운 플로를 갖고 있나, 누가 더 짜임새 있는 라임을 쓰는가, 누가 가사 전달력이 뛰어난가, 라는 전통적 기준을 대입하자면 루피, 우원재, 더 콰이엇, 마스타 우는 만점짜리 래퍼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를테면, 막 데뷔한 멈블 래퍼에게 웅얼웅얼 가사가 잘 안들린다고 따질 순 없다. 싱잉 랩은 랩인가? 카니예 웨스트의 음악은 힙합인가? 이런 건 지금 힙합의 성격과 동떨어진 우둔한 질문 같다. 며칠 전 현시대 랩의 아이콘과 같은 트래비스 스캇이 기어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곡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10년대 최고의 크레딧을 가진 드레이크와의 협업이었다. ‘분위기’와 ‘크레딧’의 화려한 만남. 가장 빠른 엔터테인먼트로서, 힙합엔 재방송이 없다. 올해는 루피, 우원재, 더 콰이엇, 마스타 우 본방 사수. 글 / 유지성(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