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패하는 소개팅 장소 | 지큐 코리아 (GQ Korea)

필패하는 소개팅 장소

2019-03-04T13:33:46+00:00 |relationship|

아래와 같은 장소에서 소개팅 첫 만남을 한다면, 반드시 망한다. 생생하고도 처절한 경험담이 여기에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이건 노래 제목도 아니고, 새로 생긴 음식점이나 술집도 아니다. 정말로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만나자는 걸 의미하며 놀랍게도 실화다. 소개팅을 하기로 한 당일까지도 약속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다. 서로 회사가 강남 쪽이니까 그 근처에서 보면 되겠다는 정도의 이야기 뿐. 그리고 만남을 2시간 앞둔 무렵 “이따 7시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볼까요?^^” 라는 문자를 받았다. 퇴근 길 강남역 10번 출구는 정말 혼란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도 많다. 시선을 둘 곳 없어 스마트폰을 보며 이름도, 얼굴도 낯선 소개팅남을 찾는 동안 이 소개팅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내려놓았다. – 김지원(광고 마케터)

인스타그래머의 힙플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소개팅 장소로 제안해봤다. 그 말인즉슨, 나 또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뜻.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너도나도 다 인증샷을 올렸길래 벼르고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줄을 서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처음 본 소개팅남과 인사를 나누고는 계속 입장을 대기하며 해야 할 말을 다 소진했다. 겨우 들어갔지만 이번엔 사방에서 들려오는 카메라 소리가 복병이었다. 사실 나도 인스타 업로드 대열에 합류하고 싶긴 했는데 소개팅남을 내버려두고 사진을 찍을 순 없었다. 시종일관 찰칵찰칵 소리를 들으며 소개팅 자리를 마무리 했고, 그 남자와의 인연도 마무리 하게 됐다. – 송미은(교사)

꿈과 희망의 놀이공원
뻔하고 진부한 소개팅이 싫다는 그 마음은 억지로라도 이해하려면 뭐, 이해할 수는 있다. 나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 소개를 하며 어색한 침묵을 메꾸기 위해 아무 말 대잔치 하게 되는 그 상황이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 만남에 롯데월드는 좀 아니지 않나? 후렌치레볼루션 줄을 서려고 막 뛰어가길래 나 또한 ‘내일까지 꼭 만들어야 하는 보고 자료가 있다’고 하고 그 반대방향으로 막 뛰어갔다. – 장나희(회사원)

미식가의 힙플
소개 받기 전 인스타그램을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는 이 시대의 고독한 미식가였다. 낮술, 혼술과 함께 요리를 즐기는 남자. 을지로와 종로의 오래된 골목을 누비며 간판도 없는 집에서 오너 셰프인 할머니의 욕을 밑반찬 삼아 식도락을 즐기는 남자. 그는 첫 만남에 ‘원래 가려던 곳이 오늘 문을 닫아서 대신 아주 죽이는 고깃집으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고기에 마음이 약해지는 육식파라, 그를 따라 나섰다. 도착한 곳은 60년 전통의 서서 먹는 갈비집. ‘서서’가 무슨 다른 뜻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정말 서서 먹는 곳이었다. 하이힐 위에 서서 갈비를 뜯으며 자기 소개를 하다보니 일주일 치 피로가 몰려왔다. 그가 2차로 제안하는 50년 전통의 노포집은 생략한 채 일찍 귀가할 수 밖에 없었다. – 정은경(일러스트레이터)

블로거 추천 소개팅 장소
소개팅남이 만남 장소를 찍어 보냈을 때, 검색을 좀 더 해봤어야 했다. 블로그 글을 두어개 찾아보니 호평 일색이라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분위기 좋은 맛집’이 아니라 포털사이트에서 ‘소개팅 추천 장소’로 엄청난 포스팅 수를 자랑하는 ‘블로거 마케팅에 성공한 집’이었다. 낯선 여자와 낯선 동네에서 낯선 맛집을 찾아야 하는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앞 뒤 옆 사방 팔방에서 소개팅하는 남녀들과 함께 하는 기분도 참 낯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배가 엄청 괜찮은 분이라고 계속 얘기하더라고요” 이게 지금 내 맞은 편 남자가 하는 얘긴지 건너편 남자가 하는 얘긴지 헷갈린 채, 자리를 마무리 했다. – 나지은(스타일리스트)

모공 비추는 형광등 조명
이런 조명인 줄 알았다면 전날 팩을 더 올리고 자는 건데. 그날따라 화장이 겉 돌아 신경이 많이 쓰였다. 암만 그래도 모르는 남자와의 첫 만남인데, 좀 어슴프레한 조명 아래서 피부 트러블이 자체 필터링 되길 바랐건만, 바람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하필 치과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강렬한 형광등 조명을 설치한 그 식당에선 나의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입술 주위 트러블에 컨실러를 덕지덕지 바른 것이 너무 신경 쓰여 밥을 코로 먹고 황급히 귀가했다. – 이송이(회사원)

이목구비가 안 보이는 어두운 조명
다들 알 거다. 첫 만남에서 조명은 어두우면 어두울 수록 유리하다는 걸. 분위기만 보여주면 되지 뭐 이목구비 또렷하게 다 드러낼 필요가 있나. 그래서 조명 어둡다고 소문난 곳을 찾아 소개팅남에게 제안을 했다. 근데 어두워도 너무 어두웠다. 그래도 최소한 이목구비가 어디 붙어있는지는 보여야하는데 촛불 조명에 가까이 다가갈 때만 살짝 보이는 정도. 평소에도 밤눈이 어두운데, 이날 식당을 나설 때는 소개팅남의 팔을 붙잡고 의지해야했다. – 백민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