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라고 평가 받는 한지원 | 지큐 코리아 (GQ Korea)

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라고 평가 받는 한지원

2019-03-25T16:45:04+09:00 |interview|

혼자 작업한 첫 애니메이션으로 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라는 평을 들은 한지원 감독은 지금도 한 뼘씩 자신의 우주를 넓히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에 개봉한 장편 애니메이션 <생각보다 맑은>으로 주목받은 후 4년이 지났어요. 어떻게 지냈나요? 현실적으로 졸업 후 바로 장편에 뛰어들긴 쉽지 않았을 텐데. 잘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교집합을 좇으며 작업 중이에요. 독립 스튜디오를 차려 에디킴 ‘Last’ 뮤직비디오, 웹 애니메이션 <딸에게 주는 레시피>, 브랜드 스톤헨지와 함께 제작한 애니메이션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를 만들었죠. 충분한 예산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데, 이 프로젝트는 예산도 자유도도 높은 좋은 기회였어요. 덕분에 주어진 예산을 남김없이 쓰며 온전히 결과만 바라보는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었죠.

원화부터 편집까지 대부분 혼자 하는 1인 작업으로 유명해요. 애니메이션은 혼자 해내기 매우 어려운 작업인데, 스태프를 최소화하고 혼자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유가 있나요? 선과 색채가 주는 그림의 맛, 시나리오, 어느 하나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을 내놓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혼자 작업하면 결과물을 장담할 수 있어요. 머릿속에 그린 것이 그대로 나오니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그린다는 행위는 작가에게 쓴다는 행위와 같은 기본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세계관과 이야기를 내 그림으로 전달하는 건 제게 당연한 일이에요.

혼자 작업하면 무척 고독하고 더디게 느껴질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극복하나요? 고독한 건 정말이에요. 힘들면 울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죠. 정 안 되면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과 대화해요. 뱃속에서부터 콤비였던 쌍둥이 언니도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어서, 밤새 작업 이야길 하다 보면 풀죽었던 작업 욕구가 솟아나죠.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잘 굴러가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대견해하는 좀 변태 같은 성격도 일을 꾸준히 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렇지만 혼자 일한다고 더디진 않아요.

애니메이션 산업이 대부분 3D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갔음에도, 2D 셀 애니메이션을 고수하는 이유는 뭔가요? 단순해요. 예쁘기 때문이에요. 멈춰 있는 그림을 보면 2D가 3D보다 압도적으로 예쁘죠. 내 방 벽에 그림을 붙인다면 <겨울왕국>보단 <벼랑 위의 포뇨>의 그림을 붙일 거예요. 전 선이 움직여 입체를 만들고, 그 입체가 현장감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를 사랑해요. 애니메이션이 마법 같은 이유는, 살아 있는 캐릭터가 실은 평면 위에 그어놓은 몇 가닥 선의 조합이라는 점 때문이죠. 2D 셀 애니메이션은 한 장 한 장 그리는 게 고되지만, 작가의 개성이 개입되는 영역이 많아서 좋아요.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는 손녀가 우주인으로 활약한 할머니를 보며 자신도 우주인을 꿈꾸는 내용이에요. 할머니가 우주인이었다는 설정이 대범해요. 우주는 비현실적인 현실 공간이죠. 그곳에 간 것만으로도 꿈을 이룬 것을 시각화할 수 있어요. 할머니를 우주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명확한 여성 서사를 보여주고 싶어서였어요. 처음엔 소녀가 우주인이 되는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보고 자란 롤 모델도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였으면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죠.

<딸에게 주는 레시피>와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는 어머니가 딸에게, 할머니가 손녀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해주는 격려예요. 여성 롤 모델의 제시라는 주제에 몰두하는 까닭은 뭔가요? 자기 위치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전 과거에 응당 잃어선 안 될 것을 잃어서 힘들었던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빠져나온 후 보게 된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죠. 돌이켜보면 내가 보고 자란 콘텐츠 중 예술적으로 훌륭하다고 느꼈던 작품들에도 사소한 함정이 많아요. 여성 서사를 다루는 방식은 아직 갈 길이 멀고, 이제부터라도 바뀌어야 해요.

<뭐든 될 수 있을 거야>에서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은요? 주인공이 우주선 밖에서 기체를 수리하는 장면. 우주선을 돌리는 화면전환, 우주복을 표현하기 위해 3D로 밑 작업을 하고 한 장 한 장 리터치했어요. 오히려 우주는 생각보다 그릴 게 별로 없어요. 우주선은 NASA에서 제공하는 우주선 소스와 3D 모델링을 활용해 노동량을 줄였죠. 무중력 상태도 편했어요. 캐릭터가 걷는 동화 작업을 귀찮아하는데 여기선 둥둥 떠다니니까요. 지구는 한 장만 그려 돌려가며 쓴 거예요. 이런 ‘꼼수’들 덕분에 1인 제작이 가능했죠.

첫 작품 <생각보다 맑은>에서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을 보여줬는데, <뭐든 될 수 있을 거야>에서는 꿈을 이룬 할머니를 보며 꿈을 꾸는 손녀가 나와요. 꿈에 대해서 뭔가가 달라졌나요? 과거엔 내 자신을 믿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확실한 것들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다 보면 처음에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좋은 곳에 도착해 있곤 했어요. 낭떠러지라고 생각한 곳에 다리가 있는 경험을 몇 번 하니, ‘일단은 한 발 딛고 생각하자’고 마음 먹게 됐어요. 이젠 어려운 상황을 그릴 때도 그 이후의 이야기를 쉽게 떠올릴 수 있죠.

장편 애니메이션 <생각보다 맑은>으로 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라는 영화평론가들의 평을 들었어요. 초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1인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요. 이젠 신카이 마코토가 대중적인 감독이 되면서 작업 방식도 달라졌는데, 한지원 감독의 작업 역시 그럴까요? 개봉 당시엔 신카이 마코토 감독 같다는 말을 들으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젠 무덤덤하네요. 하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감독들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에요. 저도 큰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요.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애니메이션은 시간과 품이 아주 오래, 많이 드는 작업이에요. 만드는 동안 삶의 화두나 잠정적인 결론이 달라지면 곤란하죠. 지금은 어떤 블랙홀 같은 화두에 골몰하고 있는데, 꾸준히 가져갈 수 있을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도 당분간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네요.

척박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장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계획도 있을까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단편이 앞으로 나올 장편의 습작이에요. 긴 작업 과정을 견뎌줄 이야기를 찾고 있죠. 아트워크는 어느 정도 나왔고, 이야기도 시작점을 발견한 것 같아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현실이 잘 따라와 줄 것이라 믿어요. 장편 프로젝트를 협업할 수 있는 팀을 구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예요. 그간 단편을 열심히 만들며 매력을 발산해왔던 것도, 미래의 파트너를 위한 구애의 춤이었을 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