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시인 황인찬이 말하는 이유

2019.04.18GQ

미니멀리즘의 시인으로 불리던 황인찬은 침묵에 대해 생각한다. 말하지 않는 것은 고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김종삼은 한국 시 문학사에서 가장 탁월하게 침묵과 여백을 다루는 시인이었다. 나는 시가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그의 시를 통해 배웠다. 시가 침묵을 통해 보다 진실한 것을, 더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의 시를 통해 배웠다. 이를테면 이런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북치는 소년’

이 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서술어는커녕 주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부사로만 성립하는 시. 다른 시인들의 시 가운데 이보다 말수 적은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침묵과 여백을 잘 다루는 시는 나로서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이 시가 제시하는 적은 말들을 헤아려보자면 이렇다. 가난한 아이가 어떤 연유인지 서양 나라에서 전해져 온 크리스마스카드를 한 장 손에 쥐게 된다. 북치는 소년이나 어린 양들, 반짝이는 진눈깨비와 같은, 아이에게는 다소 생경한 이미지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또한 아이는 먼 나라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크리스마스란 가난한 아이와는 무관하고 머나먼 풍습이므로, 카드가 담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내용 없는 아름다움일 수밖에. 시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에게 그 아름다움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 시는 말의 여백을 활용함으로써 오히려 그 말이 도달할 수 있는 곳보다 멀리 나아간다.

말을 줄여나간다는 것은 그러한 뜻일 터다.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언어를 버리고, 말이 나아가야 할, 사실은 언어 자신조차 예견하지 못했던 어떤 먼 곳에 가닿는 일. 시인이 되기 전, 한창 시를 읽고 공부하던 시절의 나는 그가 보여준 것과 같은 언어의 활용, 아니 침묵의 활용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시인이 된 나는 그 시절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울러, 그러한 시를 써야만 했던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 생각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우회해 나에 대해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슬프지 않다. 그것을 알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주 어릴 때, 엄마에게 과자를 사 달라 조르며 울던 때, 나를 남겨두고 가버린 엄마를 보며 알았던 것일 수도 있고, 고백한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근하게 굴던 친구를 보며 알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좋다고 말하지 않고,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나인 채로 남았다. 그것을 정말 나라고 불러도 좋은지 역시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얘기할 수 없어요. 말해버리면 그게 사실이 되어버리잖아요.” 어릴 때 좋아한 드라마 <봄날>에서 고현정이 말한 대사다. 저 말이 지금까지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십 대 시절, 항상 까닭 모를 괴로움에 시달리던 내 마음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끝이 보였기에 끝까지 말하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끝에 대한 통찰은 늘 우울에서 기인한 착각일 따름이고,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겁을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토록 두려워했다. 말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을. 생각과 마음은 그것을 언어화함으로써 실체를 얻는다. ‘내뱉은 말’은 나와 무관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되며, 힘을 가진 실체로서 내 내면에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SNS에 끝없이 무엇인가를 올리고,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고, 끝없이 자신의 삶을 ‘태깅’하면서, 맛있어요, 재밌어요, 슬펐어요, 좋았어요, 좋아요, 나도 좋아요, 그런 말을 끝없이 덧붙이면서, 그 실체 없는 말이 나를 뒤덮기를 바라며, 그 쥐 떼 같은 말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허탈함과 자기혐오를 가려줄 수 있기를 바라며.

결국 언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말을 줄임으로써 숨겨지는 것이 있지만, 드러난 말로 인해 가려지는 것도 있다.

내가 시인으로 데뷔했을 당시, 내게 주어진 평가는 미니멀리즘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었고, 언제부턴가 난 그러한 평가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물론 시란 침묵을 자신의 언어로 삼는 양식인 만큼, 그것은 내 시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였지만 어쩐지 그것이 나의 자기방어적 언어를 꼬집어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그 불만이 꼭 그런 수치심 때문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말해버렸으니 그것은 이제 엄연한 사실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정말이지 가슴 깊은 데서부터 들여다보면, 내가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듯한 예술 작품을, 그러니까 김종삼 같은 이들의 시를 보며 매력을 느꼈던 것은, 그러한 심사에서 연유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적게 말하는 김종삼의 시를 보며 어느 순간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사실,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사실, 그 사실에 마음을 기대고야 말았던 것이다. 김종삼의 시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침묵, 그것은 필설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이 될 테지만, 동시에 나와 같이 심약한 인간에게는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인 도피처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타인의 침묵을 멋대로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약탈하고 내 마음대로 뒤틀어버리고, 심지어 그 왜곡과 오해가 그저 자기방어를 위한 자기만족에 그칠 뿐이라는 지독한 사실과 마주하고야 말게 된다. 작품을 읽는 것은 자유라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시인으로서(김종삼은 자신이 시인에도, 시에도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인간임을 자처하는 겸손함마저 갖고 있었다지만!) 작품을 멋대로 곡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말 시인에게 무엇인가 숨기고 싶은 것이 없었을까? 그의 간결한 언어는 그저 숭고하기만 했던 것일까? 요새는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김종삼이 나처럼 천박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나 역시 쓰는 이로서, 숭고하기만 한 글쓰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숭고함을 선택하는 인간이란, 결국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으나, 동시에 그것을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시인에게도 있었으리라. 김종삼의 시편들을 읽으면 언제나 망설임과 두려움이 느껴지는 시어들이 손에 잡혔다. 내가 김종삼의 시를 정말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그러한 두려움을 그의 시에서 읽어냈기 때문이었으리라.

언어가 축소되는 시대다. 언어는 넘쳐나는데, 언어에 채 이르지 못하는 말의 조각들뿐인 시대다. 나 역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 무엇이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니까. 그렇게 모두가 아무 말이나 하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일이 거대한 규모로 이뤄지는 시대다. 그에 따라 욕망 역시 축소되고 있다. 삶에 대한 전망이 급격하게 축소되고 있음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지는 이미 수년이 지났고, 그것은 견고한 현실이 되어 미래를 짓누르고 있다. ‘나’에 대해 꿈꾸는 일이 어려워지는 만큼, ‘나’에 대해 끝없이 말과 이미지를 덧붙일 수밖에 없다. 자꾸 흘러내리는 그 언어를 다시 덧바르면서, 그러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하며. 욕망은 축소되고, 언어는 과잉되어 오히려 왜소해지는 시대,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발을 딛은 시대의 모습이다.

이 두려움은 김종삼의 두려움과 닮아 있으면서도 전혀 다르다. 우리의 두려움이 슬퍼지는 것이 두려워 미리 말하는 일이고, 나보다 앞선 말로 나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일이라면, 김종삼의 두려움은 말하면 슬퍼질 것이 분명한데도 그 두려움 속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의 흔적이 그에게는 침묵이고 여백이 되며, 그속에서 그는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슬프지 않다. 그러나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한다. 그것이 요새 나의 삶과 시 쓰기의 태도다. 김종삼과 같이 숭고하고 고결한 언어를 다룰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할뿐더러, 조금은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말하고자 한다. 숭고하지도, 고결하지도 않게.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드러낼 뿐인. 창백하고 간결한 언어가 아니라, 다소 엉망진창이어도, 조금은 슬퍼지더라도 기어코 말해버리는 것. 나를 말로 뒤덮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말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진짜로 말해보는 것. 그것이 진정 가능할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이렇게 말해버렸기에, 그게 사실이 되리라 믿어볼 따름이다.
글 / 황인찬 (시인)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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