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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라지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2019.04.20GQ

글과 책의 무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책을 소장하는 의미도 사그라지고 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책임을 물을 수는 있는 걸까?

“버려라.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곤도 마리에의 넷플렉스 프로그램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가 인기를 끌면서 미국에선 ‘곤마리하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예를 들어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남자친구를 곤마리했다고 말하는 식. 미니멀리즘은 적게 가지라는 말인 동시에 웬만하면 버리라는 뜻이다. 생활 철학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 관련 블랙 유머가 있다면 바로 책의 형태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책을 보면 누구의 집에서도 책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미니멀리즘의 조상이라고 하면 도미니크 로로를 꼽을 수 있다. <심플하게 산다>를 필두로 한 그의 미니멀리즘 철학은 물건을 적게 갖는 것부터 인간관계, ‘목록 만들기’까지 확장된다. <고민 대신 리스트>에는 ‘내게 책임이 없는 것들 리스트’, ‘나를 너무 감정적으로 만들어서 피곤하게 하는 리스트’를 비롯해 삶 자체를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목록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도미니크 로로가 2005년에 책을 내고 6년이 지난 2011년,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 일본을 넘어 미국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미니멀리즘 열풍은 약간 복잡한 속사정이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 사회에 안긴 충격의 여파가 미니멀리즘 열풍을 재촉했다. 물건이 많은 집은 지진이 나면 물건이 쏟아져 내려 사람들을 덮친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기억을 만화로 표현한 것도 있다. 유루리 마이의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는 잡동사니의 산이었던 집을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탈바꿈시킨 경험담이다. 센다이에 사는 유루리 마이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내리자 새로 집을 옮기면서 짐을 정리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없는 삶’이었다. 싼 물건이 대량 생산되는 현대 사회의 특징과 좁은 집에서 살아가는 일본의 주거 문화, 물건이 떨어져 내려 사람을 위협하는 지진이 만나 ‘수납’이 아닌 ‘버리기’의 미니멀리즘이 인기를 끌었다. 출판과 미니멀리즘의 상관관계, 그 첫 번째는 바로 미니멀리즘이 책의 형태로 전파됐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책에 영향을 미쳤다.

책이 작고 가벼워지고 있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한 결과라기보다는 출판계의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적절할 듯하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은 출판계가 해마다 갱신하는 투덜거림인데, 최근 몇 년 사이 출판계의 불황은 더 거세졌다. 초판을 3천 부 찍는다는 것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이제 2천 부를 찍는 책이 많고, 그마저도 잘 팔리지 않는다. 책 한 권에 들어가는 글의 양은 원고지 기준 8백~9백 매 안팎에서 이제 3백 매 정도로 뚝 떨어졌다. 아예 1백 매가 안 되는 책도 등장한다.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라는 또 다른 유구한 투덜거림과도 무관치 않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책을 읽지 않는 주제에, 언제나 젊은 세대를 탓하는 것이야말로 나이 든 사람들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 정말 책을 안 읽는 건 사실이다. <토지>, <태백산맥>, <장길산> 등 한국 사회를 담은 묵직한 ‘대하소설’이 길고도 긴 분량으로 인기리에 연재되던 시절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다. 단행본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은 이제 갔다. 장편소설이라 해도 한 권을 넘지 않는다. 한국 순문학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단편소설이 다수 창작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와는 결이 다르다.

신춘문예로 등단이 이루어지고, 규정상 단편소설을 제출하게 되어 있어 애초에 단편집이 장편소설만큼 눈에 많이 띄었지만, 요즘에는 아예 단편이나 중편(이들을 묶어 중단편 혹은 경장편이라고도 부른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버린다.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는 현재 20권까지 출간되었다. 가로 11.5, 세로 16.8센티미터의 크기에 1백 쪽을 넘지 않는다. 시리즈 제목처럼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의 소설책인데, 단편 하나로 책 한 권이 이루어진다. 글이 빽빽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일러스트도 큼직하게 들어간다.

인터넷 게시판의 짧은 소설을 묶어 소설집이 되는 경우도 있다. <회색인간>을 비롯한 김동식의 소설집이 그렇다. 출간 한 달 만에 1만 부를 넘겼다는 <회색인간>엔 총 24편의 글이 실려 있다. 게시판에서 약간 긴 글 정도의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아예 경장편 시리즈를 만드는 출판사도 늘었다. 소설과 비소설을 아우르는 민음사의 ‘쏜살문고’ 시리즈는 2백 쪽 안팎 분량의 글을 문고본으로 편집한 것이다. 2019년 2월 28일에 출간된 다니엘 켈만의 소설 <너는 갔어야 했다>는 92쪽 분량이다. 열린책들은 ‘블루 컬렉션 시리즈’를 내놓았다. 이미 출간된 작품을 중심으로 중편 분량인 소설의 표지를 새롭게 만들어 재출간한 시리즈다.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 시>가 232쪽이다.

현재 추세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김동식 작가의 사례와 비교해볼 만한 경우는 <킬링 이브>다. 2019년 골든 글로브를 비롯한 TV 드라마 관련 시상식에서 산드라 오에게 연거푸 여우주연상을 안긴 <킬링 이브>의 원작소설이다. 한국판 단행본은 296쪽이지만, 사실 이 책은 영국의 루크 제닝스가 <킬링 이브: 코드네임 빌라넬> 등의 제목을 달고 전자책으로 먼저 출간했다. 출판된 유형의 책은 네 편의 중편소설을 한 권으로 묶은 결과물이다. 한 권의 책에 한 개의 에피소드를 담아 가볍게 전자책으로 유통되다 인기를 끌었고, 이후 드라마화되었다.

단순히 분량만의 문제는 아니다. 2018년 내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눈에 띈 장르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였다. ‘소확행 시대’의 글쓰기다. 에세이는 소설이 아닌 산문이면서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낸 글을 말한다. 영어로 에세이를 ‘소논문’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과거엔 중수필이라고 불렀던, 학술적이거나 과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비개성적이고 논리적, 객관적인 글이 이에 해당된다.

현재 에세이의 유형은 두 가지 글쓰기를 모두 포괄한다.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긴 번역서는 사적인 에세이와 비개성적인 에세이가 모두 포함된다. 하지만 한국어로 쓰인 에세이의 경우 사적인 에세이의 비중이 높고, 한 주제당 원고지 7~10매 안팎의 짧은 글을 모은 에세이집이 인기다. 두세 페이지면 끝날 정도로 호흡이 짧다. 5년여 전만 해도 지금의 2배에서 3배에 해당하는 글을 묶은 에세이집이 많았다. 분량에도 변화가 있는 셈이다.

책이 작아지고 그 안에서도 짧은 글끼리 묶는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는 1백 쇄가 넘었고, 정문정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도 큰 관심을 받았다. 유명 작가를 멘토로 삼는 책보다 처음 보는 이름의 작가라 해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제목과 내용이라면 선택을 받았다.

이런 흐름을 타고 경량화된 에세이 시리즈도 등장했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라는 세 1인 출판사가 연합해 만든 ‘아무튼 시리즈’가 좋은 예다. 1인 출판사라서 많은 책을 빠르게 낼 수 없다는 점과 기획의 경향이 치우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발한 시도다. 현재 에세이를 시리즈로 내고 있으며 총 17권이 출간되었다.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 구달의 <아무튼, 양말>, 금정연의 <아무튼, 택시>, 김민섭의 <아무튼, 망원동> 등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다. 택시를 좋아하고, 양말을 좋아하고, 망원동을 좋아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일상의 작은 기쁨을 한 권의 책으로 전달한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판형과 아무 때나 꺼내 한 꼭지의 글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인기를 끄는 것은 미니멀리즘이 유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책이 점점 소멸해가는 중간 단계로, 내용과 외양 모두 가벼워지고 있는 것이다. 가볍게 가볍게. 하지만 출판과 미니멀리즘의 상관관계에서 가장 큰 변화는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이동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나 해외 거주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미니멀리스트로 살려면 집 넓이와 무관하게 책이고 뭐고 짐이 적어야 한다. 특히 책은 먼지를 집 안에 쌓는다는 문제도 가지고 있으며 청소와 이사의 가장 큰 적이기도 하다.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바꾸면 스마트폰과 전자책 리더기를 오가며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다. 전자책 수요가 점점 늘어나면서 ‘밀리의 서재’, ‘리디셀렉트’ 등 e북 대여 서비스가 빠르게 덩치를 키워가고 있다. 형태가 없는 전자책조차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유 서비스면 충분하다.

<캡틴 마블>을 보고 나오며 삽입곡을 듣기 위해 음반 가게로 가는 대신 애플뮤직에서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하듯이,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고 싶다면 바로 전자책을 다운받을 수 있다. 당일 배송도 이보다 빠를 순 없다. 출간일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아무리 빨라도 종이책이 출간되고 3~6개월 정도 지나 전자책을 냈는데, 이제는 한 달 내에 전자책이 나온다. 전자책으로 읽고 SNS로 공유하는 게 가장 확실한 책 홍보가 되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이쯤 되면 미니멀리즘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아예 출판계의 생태가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보노보노, 곰돌이 푸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대사를 모아 그림과 함께 펴내는 ‘힐링 도서’의 붐은 내용 경량화의 ‘끝판왕’이다. 책을 굿즈와 함께 파는 것도 모자라 아예 책 자체를 굿즈로 만들어버린다. 두 페이지의 글조차 읽을 필요가 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마치 시집처럼 짧은 줄글이 등장한다. 한 주제가 한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는다. 그림이 귀여워 ‘사진발’도 잘 받는다.

점점 짧은 글, 가벼운 글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미니멀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존 전략에 가까워 보인다. ‘요즘 젊은이들’을 한탄할 순 없다. 대하소설을 읽던 사람들이, 인문학을 그렇게 사랑했다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면, 요즘 청년 세대가 무엇을 읽든 두껍고 묵직한 책들이 팔릴 텐데, 딱히 그렇지도 않으니까.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런데 팔아야 한다. 지금 잘 팔리는 상품과 비슷한 기획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글 / 이다혜(<씨네21> 기자, 북 칼럼니스트)

    에디터
    이재현
    포토그래퍼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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