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스포츠가 스포츠인 이유

2019.05.19GQ

“손과 눈만 움직이는 게 무슨 스포츠야.” 얄궂은 조롱을 받아온 게임이 스포츠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이유.

“엄마, e스포츠 하러 가게 천원만 주세요.” e스포츠 기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본 댓글 중 하나다. e스포츠를 단순히 게임 대회 혹은 엔터테인먼트의 일종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 적나라하게 드러낸 표현이다. 아직 e스포츠를 PC방에서 한 시간에 1천원 내고 하는 만만한 컴퓨터 게임의 ‘프로 버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게임의 역할 중 오락으로서의 수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영역을 점점 넓혀 이제 스포츠의 범주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산업 규모가 엄청나게 불었고,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자본과 만나게 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게임 인구는 그 어떤 스포츠도 압도할 정도로 많다. 게임의 장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종의 다양성’도 보장된다. 물론 직접 하는 게 재미있고, 보는 게 즐거워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이지 스포츠 산업에 얽힌 자본이 흥미로워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게임마다 다른 경기의 흐름과 스타성을 갖춘 선수들의 등장만 보더라도 게임만큼 발전 가능성이 큰 스포츠는 없다.

스포츠를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다. 축구에서 90분이 모두 흐른 뒤 추가 시간에 터져 나오는 극적인 골이나 9회 말 2아웃 만루 찬스에 담장을 시원하게 넘기는 홈런, 4쿼터 마지막 1초를 채 남기지 않고 저 멀리서 던진 슛이 철썩 소리를 내며 꽂히는 버저비터. 상대에게 허탈감을 선물하며 역전의 마침표까지 찍는다면 경기에 몰입하던 관중과 시청자의 쾌감도 덩달아 폭발한다.

e스포츠에서도 짜릿한 장면이 꽤 자주 등장한다. 상향 평준화된 프로게이머의 대회 경기에서도 심심찮게 역전승이 나온다. 스포츠에서 한 팀이 특정 팀에게 상대 전적이 너무 좋지 않을 때 ‘상성’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e스포츠에서도 모두의 예측을 뒤집어버리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피지컬’ 이라고 하는 손의 빠르기와 정확도 등 컨트롤 능력에 따라, 선수의 당일 컨디션에 따라 경기 결과가 바뀌는 것도 일반 스포츠와 비슷하다.

지금 한국 e스포츠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종목은 리그 오브 레전드(LoL)로 게임하는 ‘LoL e스포츠’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는 ‘LoL 챔피언스 코리아’ 라고 하며 보통 ‘LCK’로 줄여 말한다. LCK에서 활동하는 팀은 총 10개인데, 그중 ‘kt 롤스터’라는 팀이 있다. kt 롤스터는 항상 리그 상위권을 기록했지만 유독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높은 성적은 준우승이었다. kt 롤스터의 간판은 ‘Score’라는 닉네임을 쓰는 고동빈 선수다. 오랫동안 몸담은 팀에 꼭 우승을 안기겠다고 다짐한 건지, 언젠가 우승할 거라고 확신하는 건지, 혹은 구단과의 정이 돈독한 건지, 고동빈은 한 팀에서만 오랫동안 커리어를 쌓은 ‘프랜차이즈 스타’다. 대가는 당연히 ‘우승 경험 전무’다. 2018년이 되어서야 ‘LCK 서머 시즌’에서 우승하며 원을 풀었다. 데뷔 6년 만이었다.

우승을 맛보기 전까지 고동빈의 도전은 처절했다. 1등의 위치에 닿을 듯하다가도 매번 눈 앞에서 기회를 놓쳤다. 가장 대표적인 경기는 2016년 여름 잠실 올림픽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LCK 서머 시즌 결승이었다. 고동빈의 kt 롤스터와 ROX 타이거즈가 만났다. 두 팀은 마지막 5판 3선승제에서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는데, 우승을 판가름하는 마지막 5세트가 고동빈에겐 참 뼈아팠다.

LoL에는 ‘내셔 남작’이라는 몬스터가 있다. 이를 사냥(체력을 0으로 만드는 것)한 팀에 승패를 가를 만한 능력치를 부여한다. 5세트에 승기를 굳혀가던 kt 롤스터는 내셔 남작 사냥을 거의 끝내는 듯했다. 하지만 내셔 남작의 체력이 정확히 2가 남았을 때, ROX 타이거즈가 마지막 일격을 가해 능력치를 자신들의 소유로 돌렸다. 야구로 따지면 9회 말 2아웃에 만루 찬스를 만든 수준이고, 축구로 치면 추가 시간에 상대 골키퍼와 1:1 찬스를 만든 것과 비슷했다. 기회를 잡은 ROX 타이거즈는 이를 놓치지 않고 역전승으로 연결했다. kt 롤스터와 고동빈은 또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보통 LoL에서 내셔 남작 사냥을 마무리하는 역할은 ‘정글러’라는 포지션의 선수가 하는데, kt 롤스터의 정글러는 고동빈이었다. 항상 2등만 하던 프로게이머가 첫 우승을 코앞에 두고 자기 손으로 내셔 남작을 빼앗겼으니 온라인 커뮤니티엔 ‘고동빈, 80세(우승 0회)’, ‘홍진호의 재림’ 같은 글이 쏟아졌다.

약팀이 강팀을 제압하는 장면도 자주 펼쳐진다. 삼성 갤럭시라는 팀은 kt 롤스터에게 상대 전적 ‘0승 19패’로 크게 밀렸다. 공교롭게도 두 팀은 ‘롤드컵’이라고 불리는 LoL 월드 챔피언십에 출전할 한국 대표팀 선발전 마지막 라운드에서 만났다. 총 세 팀이 대표로 선발되는데, 이미 두 자리는 채워진 상태였다. 이긴 팀은 한국 대표가 되고 진 팀은 합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19전 19승의 kt 롤스터가 승리할 것 같았지만, 삼성 갤럭시가 한국 대표가 됐다.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보이던 삼성 갤럭시 소속 프로게이머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팬들 사이에 회자되곤 한다. 험난한 과정 끝에 세계 대회에 나간 삼성 갤럭시는 첫 진출 만에 준우승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만 극적인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다. 최근 국산 게임인 카트라이더가 인기를 되찾으면서 15년째 이어지고 있는 카트라이더 리그 역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레이싱 장르의 특징 덕분에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카트라이더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열 살이 되기 전부터 프로게이머로 활동한 문호준, 그리고 오랫동안 그와 경쟁 관계를 이어온 유영혁이다. 두 선수는 2015년에 열린 ‘카트라이더 에볼루션’이라는 대회 결승전에서 만났다. 문호준의 소속 팀과 유영혁의 소속 팀은 1:1 동점 상황이었다. 결국 3세트 1:1 대결인 ‘에이스 결정전’으로 우승 팀을 가르게 됐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레이싱을 하던 중, 유영혁의 카트가 나무를 박았고, 이후 앞서나가는 문호준을 한 번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쇼트트랙에서 인코스를 밟으며 추월하는 것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깊숙하게 코너를 파고들더니, 최단 거리만 그리며 집요하게 문호준을 따라붙었다. 두 선수는 경기 화면 상으로 동시에 골인한 것처럼 보였다. 기록 판독 결과 유영혁이 문호준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다. 두 선수의 기록 차이는 0.005초였다.

e스포츠 경기장의 모습도 일반 스포츠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게이머의 기발한 경기 운영과 엄지발가락까지 짜릿한 역전의 순간, 혹은 상대 팀을 궤멸시킬 때마다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으로 채워진다. 2018 LoL 월드 챔피언십은 중국에서 열렸는데, 취재차 향한 경기장의 객석은 몇 시간 전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 팬으로 가득 찼다. 경기에 출전하는 프로게이머들이 한 명 한 명 소개될 때마다 스타디움은 응원 소리로 울리는 동시에 출정식 같은 비장한 기운까지 흐른다. 항상 보고 듣는 광경이지만, 언제나 놀랍다. 미국에서 열린 LoL 월드 챔피언십 경기 현장도 기억에 남는다. 결승전은 한국 팀끼리의 대결이었는데, 자국 선수가 없는 경기임에도 관중석은 미국인으로 가득 찼다.

e스포츠는 더 이상 한국에서만 열광하는 집안 잔치가 아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게이머인 ‘페이커’ 이상혁은 국제적인 스포츠 영웅이 되었고, ‘PC방 문화의 양지화’라는 비아냥도 이 나라를 벗어나면 논리를 잃는다. 1896년에 열린 1회 올림픽의 종목은 육상과 수영, 레슬링 등 9개 종목이 전부였다. 실내 테니스로 고안한 탁구, 이누이트가 사냥할 때 타는 배에서 유래한 카약이 스포츠로 인정받고,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리라곤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둑이나 체스 등 ‘두뇌 스포츠’까지 정식 스포츠로 분류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한 지금, 종목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정의도 점점 변화하고 있는 게 오늘의 스포츠다.

게임이 스포츠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스포츠 채널을 넘기다가 축구나 야구 경기를 무심코 틀어놓는 것처럼 e스포츠 중계에 채널을 맞춰보세요. 규정을 모르거나 처음 보는 게임이라도 해설자의 말을 들으며 경기 영상과 선수들의 표정을 살피다 보면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프로게이머의 프로필을 찾고 있을 거예요. 지금 관심을 갖는 스포츠도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어요? 글 / 박범 (<인벤> 기자)

    에디터
    이재현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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