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연애와 스포츠는 닮은 꼴

2019.05.20GQ

연애는 스포츠와 다르다. 하지만 온갖 변수와 적잖은 우연에 헛스윙을 하고, 삼진도 먹다 보면 대처 훈련이 절실해진다.

그녀는 요즘 “이제야 내 말을 좀 알아듣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10년 넘게 만났다. 이제라도 조금씩 알아들으니 다행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왜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그보다는 연애가 원래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연애 초기의 나는 오늘은 그녀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의 반응이 좋은 날도 있지만 안 좋은 날이 더 많았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녀를 더 편안하게 해줄 방법을 생각한다. 오늘의 일정상 식사하기 편한 곳을 찾는다. 뭔가 신경질적인 모습이 보이면 식당으로 이끌고, 피곤해 보이면 어깨와 목을 주물러준다. 10년을 함께한 이상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모험심은 없다. 다만 함께하는 시간은 그때보다 더 편해졌다.

지금 알고 있는 걸 10년 전에 알았다면, 우리의 10년은 더 행복했을까? 행복했겠지만,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야구나 축구처럼 연애가 상대를 분석하고 그에 맞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니 말이다. 야구가 좋아서 사회인 야구를 하는 나의 야구 실력에 빗대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올 시즌 나의 사회인 야구 스탯은 1타수 무안타. 타율이 0.000이다. 타격이야 공이 눈에 들어오면 휘두르다가 맞는다고 쳐도, 수비는 더 문제다. 내가 플라이볼을 잡아 아웃시킨 경우는 딱 한 번뿐이다. 타구가 날아올 확률이 적은 우익수를 맡기 때문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사실 내가 잘 못 잡는다. 머리 위의 공을 보며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연애가 스포츠 같은 거였다면, 10년 전의 나는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지금의 나와 같았을 거다. 잘하려고 하다가 망쳐버리는 연애. 그때의 나도 우리의 연애에 찾아올 온갖 변수를 상상했겠지만 아무 소용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녀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이 수월해졌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말 그대로 상상의 훈련이다. 실제 경기 도중 일어날 수 있는 변수들을 최대한 예상해보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미리 가늠하는 것이다. 프로 선수들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변수에 대응하는 반응 속도를 높이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얻는다고 한다. 프로야구 기사 사진 중에는 타자가 배트를 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 많다.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지금 그들은 상대 팀 투수가 던져올 구종을 상상하며 맞춰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중이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추신수는 자신의 책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꿈꾸다>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기를 하기 전에 내 훈련 정도나 몸의 상태에 따라 그날 있을 경기가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그려진 상황이 실제 경기에서 일어나기도 해서 신기한 적이 최근에 몇 번 있다. 이것은 내가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변수를 최대한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그날 경기를 9회 말부터 역순으로 계산해서 작전을 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연애 초기에는 불가능하다.

스포츠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건, 나의 훈련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연애 초기에 그 정도의 전력 분석이 가능할까? 남자들은 보통 이렇고, 여자들은 보통 저렇다는 개념은 있을 수 있다. 타자들은 보통 풀카운트에서 풀스윙을 하고, 투수는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연애 초기에는 상대방의 데이터도 알 수 없고, 누가 데이터를 분석해놓은 스카우팅 리포트도 없다. 상대 투수가 힘으로 윽박지르는 유형인지, 땅볼 유도형인지, 뜬 공 유도형인지 알 수 없다. 나를 대신해 먼저 타석에 나가 상대 투수의 공을 최대한 많이 봐주는 1번 타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의 전 연인을 만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놈의 연애는 고졸 신인 선수처럼 아무 생각 없이 던지고 치는 게 좋지도 않아 보인다. 김성근 감독이 말한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정신으로 들이대면 정말 다음이 없을 수 있다. 한때 LG 트윈스의 감독이자 단장이었고 지금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있는 양상문 감독은, LG 트윈스 시절 더그아웃에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란 문구를 붙여놓았다. 연애를 그런 태도로 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바보였다는 걸 깨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연애에서는 차라리 사회인 야구 선수의 마인드가 더 어울려 보인다. 프로 선수는 타격이 안 될 때 훈련을 더 열심히 하지만, 사회인 야구 선수는 온라인 쇼핑몰을 뒤져 새로운 장비를 사니까. 그러니 연애에서는 그저 날아오는 공을 계속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헛스윙도 하고, 삼진도 먹고, 데드볼도 맞고, 어느 날은 운 좋게 포볼로 출루하고, 그러다 보면 조금씩 타이밍이 맞아 배트에 걸린 공이 백네트로 튕겨가는 경험도 할 것이고, 또 그러다 보면 멀리 쳐서 외야 플라이 아웃도 당해볼 것이며, 그렇게 아웃은 당했지만 3루에 있던 주자가 태그업해서 타점도 기록하게 될 것이다. 단, 안타나 홈런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연애에서 안타나 홈런은 운이지 실력이 아니다. 한 사람과 10년 넘게 만난 덕분에 이제야 조금씩 말을 알아듣고 있지만, 예전보다 타석당 삼진율이 조금 좋아졌을 뿐이다. 그녀에 대한 상황 대처법이나 경기 운용법이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자동 입력되어 있어도 낙구지점을 찾는 건 여전히 어렵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나만큼 그녀도 나의 ‘쿠세’, 즉 버릇을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교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쁘다고 하거나, 사랑한다고 할 때 그녀는 종종 “말에 영혼이 없다”고 받아친다. 사실 바쁘거나 졸릴 때 그런 적이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할 때, 그녀는 또 “담배 피우러 가는 거야?”라고 묻는다. 담배를 피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피우고 싶을 때 그러곤 했다. 그녀의 생일과 해외 출장이 비슷한 시기에 있을 때 면세점 사이트에서 선물을 골라보라고 했는데, 그녀에게 핀잔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잔머리를 굴렸던 것 같다.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연애에서는 1군에 간신히 붙어 있는 백업 선수다.

연애 관계가 끈끈하다는 걸 느끼고, 그러면서 행복을 경험하는 순간은 상대가 내 타이밍을 속이려 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나에 대한 그녀의 변화구 구사율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과거의 그녀는 걷는 게 힘들어도 애써 힘들지 않다고 우겼다가 결국 폭발해버렸다. 배고파도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가 정말 그런 줄 알았던 나 때문에 또 폭발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구종은 투 피치 투수처럼 간결하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그러고, 피곤하면 피곤하다 그러고, 싫으면 싫다고 말한다. 나의 타석당 삼진율이 적어진 것도 상대 투수의 구종이 단순해지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이 쉬워진 덕분이다. 다시 말하면 연애에서 안타나 홈런은 실력도 아니고, 운도 아니다. 어느 한쪽이 치열한 경기에 대한 의지를 놓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었다”는 SK 와이번스 시절의 이상훈 투수처럼 누군가는 타석과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와 그녀는 같이 앉아 야구를 보는 쪽이다.

연애는 스포츠와 다르지만 좋은 연애가 관계의 지속과 그로 인한 행복감을 느끼는 거라면, 다른 성격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상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능하다. <조해연의 우리말 야구용어 풀이>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변수에 대한 대처 훈련이 아닌, “선수로 하여금 최상의 컨디션일 때 여러 상태를 회상해내도록 해서, 그때에 가까운 상태를 다시 실현시키는 훈련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연애에서도 서로가 가장 아름다웠고 즐거웠던 시간을 상상한다면, 지속적인 관계가 더 수월할지 모른다. 나와 그녀는 지난 10년의 시간 덕분에 그런 순간도 꽤 많아졌다. 나와 그녀도 처음 만났던 날과 처음 고백한 날부터 그 사이 힘들고 아파했던 시간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그러고 보면 나와 그녀가 해온 이미지 트레이닝은 서로의 구종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의 찬란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응원하는 LG 트윈스의 팬들이 아직도 1990년대의 ‘신바람 야구’를 추억하는 동시에 쌍욕을 하며 오늘의 야구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글 / 강병진(<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에디터
    김영재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