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명랑한 에르메스의 2019 봄여름 컬렉션

2019.05.25GQ

에르메스 맨즈 유니버스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이 만드는 모든 것에는 고유한 표식과 유쾌한 은유가 있다.

런던 외곽의 탁 트인 공간에 어떤 날 저녁, 아주 생소한 건물이 나타났다. 원래는 우편물 사무소였던 크고 낡은 빌딩은 에르메스의 지휘로 현대적이고 비밀스러우며 엉뚱하고 낯선 곳으로 변했고, 이 곳에서 스탭 인 투 더 프레임 Step in to the Frame 의 모든 일이 벌어졌다. 먼저 2019 봄여름 에르메스 남성복 컬렉션. 별다른 장식 없이 산뜻하고 단순하게 꾸민 런웨이에 늘 그렇듯 조금 다른 모델들이 등장했다. 에르메스 남성복 쇼의 모델들은 전형적인 대신 특징적이고 상징적이다. 크고 마르고 잘생기고 엇비슷한 분위기인 ‘규격화된’ 모델보다는 각자의 캐릭터를 지닌 모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작거나 나이 들었거나 약간 퉁퉁해도 그 옷의 진짜 주인처럼 보인다. 그래서 쇼는 더 현실적이고 친근하며, 끝난 후에도 허망하지 않다. 이번엔 뮤지션, 무용수 등의 런던 유명인들이 모델들 사이사이에 나와 에르메스 쇼 특유의 분위기가 더 짙었다. 새로운 계절을 위한 에르메스 남성복의 전체적인 무드는 유연하고 느슨했다. 어떤 룩이든 꽉 끼고 딱 붙는 것 없이 몸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고 선선하게 나부꼈다. 풀색 양가죽 수트, 연회색 조거 팬츠, 스웨이드 블루종, 넉넉한 윈드브레이커 등은 좋은 소재를 과감하게 쓴 덕에 필연적으로 고급스러워 보였고, 클래식의 딱딱한 공식에서 벗어난 브로큰 수트들은 수트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성글게 짠 브이넥 니트와 크림색 보트넥 니트, 몽크넥 캐시미어 니트는 휴양지로 떠날 때 서둘러 챙기고 싶었고, 라임색과 오렌지색의 청량한 옷들은 더 젊고 경쾌해진 에르메스 룩을 위한 귀여운 힌트였다. 쇼가 끝난 후 네온사인을 따라 긴 터널로 들어갔다. 터널 반대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상상이나 꿈 속에서 봤을 그래픽 월드.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 혹은 천재 괴짜 과학자의 집? 어떤 걸 생각해도 상관 없지만 가능하면 아주 즐거운 쪽이 맞겠다.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 현실의 어둡고 곤란한 것들은 전부 잊을 수 있으니까. 볼 건 많지만 우선은 예쁜 것들부터. 잡지 가판대에는 커스텀 스카프 패턴의 만화책이 진열되어 있는데 무척 정교할 뿐 아니라 페이지마다 여백이 있어 뭔가 적어보기에도 좋다. 게다가 부스 안으로 들어가면 스타일리스트들이 스카프 스타일링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에르메스 타이의 패턴을 닮은 별자리가 생생하게 다가오고, 테일러메이드 바에서 해체된 블루종과 수트의 아름다운 조각을 만지면 불현듯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비밀스러운 누군가와 통화를 하게 된다. 어부들이 들고 있는 낚싯대에는 에르메스의 최신 모자들이 걸려있고, 그 모자를 쓰면 순간의 모습이 바로 찍힌다. 공간을 어슬렁거리다 데미안 쿠이퍼스와 필리페 자르딩이 그려주는 초상을 받는 기분은 또 어떻고. 곳곳의 팝업 레스토랑에선 샬롯 튀김을 곁들인 스테이크와 빈티지가 좋은 와인의 우아한 페어를 아주 명랑한 방식으로 선보인다. 도저히 떠나고 싶지 않은, 영원히 머물고 싶은 천진하고 행복한 공간은 그곳을 경험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온통 불태우고, 단 하룻밤만 존재한 후 완벽히 사라졌다.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Chris Moore, Matteo Montan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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