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참을 수 없는 취향 전쟁

2019.06.14GQ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취향’이란 것이 존재한다. 애인의 이런 취향까지 사랑해야 하나?

아트 시네마 vs 블록버스터
나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도는, 여기저기 뜯어져서 솜 뭉치가 보이는 오래된 의자가 놓인 작은 극장을 좋아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레오 까락스와 짐 자무시를 우상으로 여기며 자라왔기에 고집있게 예술 영화를 틀어주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웃는 모습이 선해서 맘에 들었던 그와는 정말 잘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을 하며 비극이 시작됐다. 그는 내게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신나게 설명해주며 팝콘과 콜라가 세트로 구성된 티켓을 예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채플린>과 <숏컷>이다. <아이언맨>이 아니라. 나에게 휴 잭맨은 우디 앨런의 <스쿠프>다. 게다가 나는 영화 보면서 팝콘 씹는 소리를 가장 싫어한다. 무려 3시간을 팝콘과 함께 마블 세계에 쓸 자신이 없어 그와의 영화 데이트는 끝내 불발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안혜정(방송 작가)

미니멀리즘 vs 맥시멀리즘
어쩌다보니 최소한의 의복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흰색, 검정색,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기본으로 겨울엔 스웨터와 코트를 입고, 가을엔 얇은 재킷 한 두벌.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거나 메시지가 적힌 것도 싫어서 최대한 ‘무지’로만 골랐다. 학창 시절 하복과 동복을 입던 경험을 살려 몇벌 안되는 옷을 교복처럼 입는 내게, 그는 ‘멋부리는 걸 좋아하지만 소탈한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명품 브랜드 로고로 칠갑한 셔츠, 역시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무슨 목화 솜 같은 것이 달려 있는 뮬(슬리퍼 아닌가?), 푸대 자루 같아 보이는 큼직한 청바지 옆 면에도 로고가 덕지덕지였다. 막상 얼굴 보고 대화를 하면 그런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만큼 재미있긴 했는데, 만나자마자 첫 몇 분의 ‘기함’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멀어지고야 말았다.
박영주(공예 디자이너)

노포 vs 미슐랭
우리는 ‘먹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더욱 가까워졌다. 문제는 ‘먹는 것’에 엄청난 취향의 간극이 존재했다는 것. 나는 을지로를 비롯한 종로의 오래된 노포가 ‘힙’해지기 전부터 꾸준히 탐구를 해왔다. 서울을 벗어나 수원이나 인천 등에도 ‘출장’을 가는 수고를 감수하며 노포 탐방을 했다.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나에겐 공간에 담긴 역사와 동네의 바이브까지가 ‘맛집’을 가르는 기준이다. 반면 그는 미슐랭 별을 엄청나게 신뢰했다. 유명 셰프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프리젠테이션을 선 보이는지, 식기는 무얼 쓰고 매장 인테리어의 특징은 무엇인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디서 뭐 먹지?”에서 시작되는 토론은 손석희가 중재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과열되기 십상이었다. 각자 밥을 먹고 공원에서 만나 산책을 하지 않는 한 데이트가 쉽사리 유지가 되지 않아 만남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조은우(회사원)

멜론 vs 스포티파이
나는 ‘내 취향은 남달라’라는 취향을 싫어한다. 대중적인 것은 그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악 산업에 종사한다는 그 남자는 대화하기에 참 재밌는 사람이었다. 호불호가 확실해서, 왜 호이고 왜 불호인지를 듣는 거 자체가 흥미로웠다. 다만 한가지, 음악에 있어 너무 ‘선민의식’을 깔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 최대 걸림돌이었다. 마치 멜론 실시간 차트 듣는 사람은 취향도, 개성도 없는 무지몽매한 대중이라는 듯이. 굳이 한국에서 서비스 되지도 않아 VPN을 깔고 우회해야하는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멜론을 짓밟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먼저 대중을 알아야 음악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사람들이 볼빨간 사춘기를 좋아하고 다비치 노래를 듣는지, 마음을 열고 들어보란 말이다. 격렬한 언쟁 끝에 우리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효정(브랜드 마케터)

아날로그 vs 디지털
아무리 뉴트로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유행의 한 줄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뼛속까지 레트로, 아니 아날로그 그 자체를 표방했다. 가방에는 보조 배터리나 휴대폰 충전 케이블이 아니라 노트와 펜이 굴러다닌다. LP 모으는 걸 좋아하고 특히 1960-70년대 한국 사이키델릭 음악에 심취해있다. 언젠가는 사진을 찍어준다면서 코닥 일회용 카메라를 가져와 플래시를 팡팡 터뜨리기도 했다. 처음엔 그저 신기했다. 나는 일단 애플의 충성도 높은 ‘호갱’으로서 어지간한 신제품은 죄다 구입하고, 전자기기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 더 호기심이 일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무슨 사진을 보내면 MMS로 넘어가는 그의 구형 폴더폰 앞에선 좀 갸우뚱 했다. 인스타그램과 카톡 안 하는 것까진 뭐 이해는 할 수 있는데, 너무 철저하게 아날로그라 이쯤 되면 이거 컨셉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한번 고개를 내민 의구심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뭘 해도 ‘컨셉질’로 보였으니까. 세상의 흐름에 너무 역행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과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안세미(일러스트레이터)

    에디터
    글/ 서동현(프리랜스 에디터)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