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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의 아버지 케빈 라이언스

2019.07.08GQ

케빈 라이언스가 그린 몬스터들은 무섭도록 장난스럽고 유쾌하다. 말하자면 케빈 라이언스처럼.

지금 어디에 있나? 브룩클린 레드훅에 있는 스튜디오다.

주위를 둘러보면 뭐가 있나? 미완성 작품들과 산더미처럼 쌓인 스케치 더미가 보이고, 다 읽지 못한 책들도 수북하다. 그리고 나는 거대한 LP 컬렉션에 둘러싸여 있다.

케빈 라이언스라는 사람이 과연 한 명일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아티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타이포그래퍼. 이 가운데 자신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직업은 뭐라 생각하나? 누가 뭐라 해도 난 그래픽 디자이너다. 그래픽 디자인 교육을 받았고 이 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어떤 작업을 하든 그래픽 디자인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선 굵기, 구성, 균형, 색을 중요하게 본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내가 느슨하게 그리는 몬스터 캐릭터에도 디자인적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번에 작업한 <GQ> 커버도 그렇겠지? 예전에 잡지 만드는 일도 했으니 개인적으로 커버 작업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출판물을 정말 사랑한다! 책과 잡지는 내게 최고다. 특히 잡지의 형태와 디자인이 너무 좋다. 십 대 때는 복사기를 이용해 진(Zine) 형태의 독립 잡지를 만들었다. 요즘도 진을 만든다. 예전에는 <토키온 Tokion>, <아키팁 Arkitip>, <로다운 Lodown> <몬스터 칠드런 Monster Children> 등 여러 잡지와 일했다. 특히 <토키온>에서 일했던 시절이 기억에 남는다. 스트리트 아트가 걸음마 단계였던 때라 그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재미가 있었다.

몬스터 캐릭터는 당신의 분신과도 같다. 그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몬스터들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하면서 성격과 캐릭터가 여러 번 바뀌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결국 나다. 표정, 감정, 행동 모두 나를 100퍼센트 투영했다. 나는 몬스터를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말하고 싶은 걸 표출하곤 한다. 초창기의 몬스터 캐릭터는 욕을 하며 스트리트 웨어와 스니커 신에 등장했다. 엿이나 먹으라고 소리 지르고 수위가 높은 힙합 가사를 내뱉었다. 그땐 공격적이면서 약간 정신 나간 존재들이었는데, 내가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말들을 대신 해주었다. 현재 몬스터들은 공격성이 줄었고 좀 더 즐기며 사는 데 열중한다. 여전히 뭔가 못마땅해하는 녀석도 있지만 대부분 시끄럽고 정신없고 힘이 넘친다. 지금의 나와 많이 닮았다.

알다시피 <GQ> 7월호의 키워드는 ‘홀리데이(Holiday)’다. 커버 작업을 하면서 떠올린 스토리는? 몬스터들은 어떻게 휴가를 보내나? 녀석들은 언제든 뛰어놀 준비가 되어 있다. 여름과 스케이트보드, 서핑, 해변을 사랑한다. 당일치기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축구와 달리기를 열심히 한다. 그래서 야외 활동과 여름이 너무 좋다. <GQ> 표지의 몬스터들도 먹고 마시고 낮잠 자며, 파티를 벌이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며 신나게 여름을 보낸다. 뭐가 됐든 좋아라 할 거다.

몬스터 캐릭터들의 탄생 비화가 재미있다. 점심을 먹지 않으려는 딸을 위해 도시락 가방에 몬스터들을 그리고 “먹지 않으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와 같은 대사들을 넣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몬스터들이 세상에 뭔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나? 오늘날 몬스터들이 사람들에게 지니는 의미를 생각하면 무척 기쁘다. 거리의 벽부터 티셔츠, 스니커즈, 과자, 굿즈 상품까지 빠짐없이 존재하고 계속해서 퍼져나가는 중이다. 게다가 몬스터 캐릭터는 누구나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다. 녀석들은 스니커 헤드나 잘 나가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생김새, 스타일, 피부색,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가간다. 나도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 공개적인 자리에서 몬스터 그리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미소를 짓거나, 벽에 그려진 몬스터들 중에서 자신과 닮은 녀석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내 그림과 함께 셀피를 찍는다. 마치 몬스터들과 가족사진을 찍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몬스터들은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된다.

스트리트 문화에 대한 애정은 어디에서 기반하나? 어렸을 때부터 스트리트 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림을 그리고 스포츠에 매달려 지냈으며, 스니커즈 디자인도 꾸준하게 했다. 스니커즈에 완전히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나이키가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였는데 나이키 스니커즈를 몇백 켤레쯤 모았다. 그리고 초창기 힙합도 열심히 들었다. 힙합 스타일의 스포츠웨어 때문에 음악에도 끌렸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직접 티셔츠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티셔츠 일러스트가 그라피티처럼 유행하기 시작했다. 티셔츠가 새로운 형식의 캔버스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뉴욕에 머무르면서 스트리트 웨어를 디자인한 경험은 내 삶과 커리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처음 일을 시작한 1990년대 초반과 현재의 스트리트 문화를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일단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개념이 엄청 바뀌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거에는 이름을 알리고 인기를 얻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친구들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제품을 만든다는 의미가 강했다. 특정 지역에서만 통하는 농담, 자신이 사는 동네나 도시에 관한 레퍼런스를 주로 사용했다. 과거에는 티셔츠를 만든다고 하면 제작에 3개월, 가게에 입고하기까지 또 3개월이 걸렸다. 요즘은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등장해 순식간에 유명해진다. 오프라인 스토어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스트리트 웨어는 여러 면에서 음악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누구나 만들 수 있다. 역효과라면 아무래도 그저 그런 제품들이 넘쳐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스트리트 문화 중에서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져 안타깝거나 그리운 게 있을까? 슬프다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진정성이랄까, 진실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긴 한다. 스트리트 문화는 상당히 작은 규모로 긴밀하게 돌아가는 공동체였다. 그렇다고 해서 배타적인 건 아니었다. 누구든 노력하면 그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유행처럼 쓰이는 ‘리미티드-에디션’ 개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극단적 결핍 상태를 유발한다. 뉴욕이나 LA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하입비스트 Hypebeast’나 ‘하이스노바이어티 Highsnobiety’에 올라오는 제품 대부분을 구경도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제품에 대한 가치를 키우려는 시도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왜 브레인데드 카모 척테일러를 5천 켤레 정도 만들지 않나? 요즘은 메이저 브랜드에서 내놓은 물건이 판매가 시작되기도 전에 품절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인기를 얻어 품절될 수도 있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소량만 만들었기 때문이라면 문제가 된다. 누구나 갖고 싶게 잘 만든 제품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게 몇 개가 만들어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카우스가 유니클로와 협업한 제품만 봐도 알 수 있다. 원하면 누구나 카우스 티셔츠를 살 수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다간 스트리트 웨어는 배타성과 부족한 수량 때문에 스스로를 망치게 될 거다.

당신의 아이콘은 누구인가? 내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둘 있다. 키스 해링과 짐 헨슨.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들이 내 작업에도 극명히 드러난다. 먼저 키스 해링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추구한 ‘모두를 위한 예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자신의 작품을 어린아이부터 록 스타까지 모두와 나눴고, 나처럼 공개적으로 그림 그리는 걸 즐겼다. 게다가 키스 해링은 스트리트 문화의 선구자였다. 뉴욕의 소호에 ‘팝 숍’을 열어 자기 작품을 대중적인 아이템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갤러리에 작품이 전시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20달러짜리 티셔츠와 모자, 스케이트보드에 자신의 예술을 도배한 거다. 키스 해링은 시대를 굉장히 앞서간 예술가이기도 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는데 팝 숍이 있던 자리에서 다섯 집 건넌 곳에 10년 뒤 슈프림 매장이 생겼다. 키스 해링은 이미 그 동네의 가치를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머펫 쇼’를 만든 짐 헨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나는 머펫을 말도 안 되게 좋아했다. 내 유년기 시절을 지배했고, 머펫 때문에 시각예술을 전공하고 캐릭터를 만드는 길로 들어서게 됐다. 단순히 머펫이나 ‘세서미 스트리트’ 캐릭터의 디자인에 반한 건 아니다. 내가 매료된 것은 캐릭터 그 자체다. 그들이 가진 성격과 행동에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지금도 웃음이 필요하면 예전의 머펫 쇼를 보곤 한다. 짐 헨슨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뭔가를 만들고 싶어 했다고 했다. 나도 내 몬스터들로 그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였나? 살면서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하나를 고른다면 콜레트와의 인연이다. 2008년 콜레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사라 아델만이 콜레트에서 주최한 단체전에 나를 초청했다. 몬스터들을 미술계에 처음 선보이는 자리였다. 이 전시를 계기로 콜레트가 문을 닫기 전까지 상품 제작과 디자인, 쇼윈도 디스플레이, 파티 기획 등 많은 작업을 함께했다. 다시 생각해도 환상적인 경험들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참여한 협업 중 단연 최고다.

필라델피아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작품들을 선보였나?디자인 업계에서 아트 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사실 쉽지 않았다.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디자이너들의 사례를 많이 접하긴 했어도 내 경우는 달랐다. 이전 작업들을 복사해서 갤러리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전시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아티스트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도 않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작업을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콘셉트와 주제가 확실하게 정해져야 작업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 첫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초창기의 스카와 락스테디 음악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다음, 회화와 실크스크린에 손으로 그린 타이포그래피를 조합해 레게의 역사를 그래픽적으로 조망하는 작품들을 전시에 선보였다.

한국에서도 곧 몬스터들을 만나볼 수 있다. 두타몰의 큐레이팅 스토어 DT275와 협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작업인가? 대형 공간을 통째로 맡아 인스톨레이션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런 작업은 처음이다. 그래서 나도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하지 못한다. 하하. 하지만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엄청나게 크고 재미있고 화려하며 몬스터들로 가득 찬 난장판을 기대해도 좋다. <GQ> 표지를 장식한 몬스터 크루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몬스터가 프린트된 티셔츠와 모자, 양말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몬스터를 만나면 기쁘다. 몬스터들은 나보다 훨씬 유명하다.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작년에는 일본에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었다.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데 다들 스탠스에서 제작한 몬스터 양말을 신고 있더라. 진짜 대단했다.

옷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이템은? 평소 입는 스타일은 정해져 있다. 네이비색 티셔츠와 반바지 또는 긴 바지를 주로 입는다. 구입하는 브랜드도 몇 안 된다. 카키 USA, 칼하트 WIP, 블루썬 NYC 정도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더블탭스. 스니커즈와 모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모자는 대부분 슈프림이다.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네이비 블루 색상의 1995년형 랜드로버 카운티 LWB.

인스타그램(@klyonsnatborn)을 보면 당신은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같다. 딱 몬스터 캐릭터 같다. 지치는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으면 된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매일 달리고, 음악을 듣고, 음반을 모으고, 책을 읽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달리기에 큰 재능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만약 그 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본 적 있나?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까? 달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지금은 러닝이 인기를 끌고 러닝 클럽에서 젊은 아티스트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뉴욕에서 운동 삼아 거리를 뛰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만약 달리기를 계속했다면 어디까지 갔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말한 대로 올림픽 출전을 꿈꿨던 건 사실이다. 고등학생 때 미국에서 실력이 출중한 선수 중 하나였다. 코치님들과도 종종 국가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괜찮은 대학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미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꿈에선 멀어졌다. 물론 후회는 없다. 옳은 선택을 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즐겁게 달리고 있다.

지금 당신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은? 두 딸이다. 이 아이들 덕분에 몬스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말은? “부탁한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미안해요.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처럼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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