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읽기 좋은 책 15 | 지큐 코리아 (GQ Korea)

여름에 읽기 좋은 책 15

2019-07-19T16:31:36+00:00 |book|

볕에 바싹 말린 리넨 같고, 장맛비에 젖은 흰 발 같은 문장들.

밤은 부드러워
스콧 피츠제럴드
딕은 해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햇볕에 탄 로즈마리의 황갈색 얼굴을 하얀 가루분이 살짝 덮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 키스할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얼굴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깨끗하고 밝은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전등을 끄면서 나이 많은 웨이터는 자신과 대화를 계속했다. 물론 불빛도 중요하지만 깨끗하고 아늑해야 해. 음악은 필요 없어. 그래, 정말로 음악은 필요 없지. 이런 시간에 열려 있는 곳은 바밖에 없지만 너는 바 앞에서 품위를 지키며 서 있을 수 없지. 도대체 그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일까? 그건 두려움도 공포도 아니야.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허무라는 거지. 모든 것이 허무일 뿐, 필요한 것은 밝은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야.

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메리 리드라는 이름을 가진 해적이 있었다. 그녀는 한 차례, 해적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품위 있게 하기 위해선 먼저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참 시절 그녀의 애인들 중 하나가 한 싸움패와 싸우다 상처를 입자 메리는 결투를 신청했고, 카리브해 제도의 오랜 전통에 따라 양손을 이용한 결투 방식으로 싸웠다. 왼손에는 묵직하고 작은 총, 오른손에는 충성스러운 검. 총은 실패했지만, 칼은 충직한 애인처럼 활약했다. 1702년 그녀의 대담무쌍한 경력은 산티아고 데 라 베가의 교수대에서 종말을 고했다.

하워드 필립스
‘금단의 저택’, 러브크래프트.
깊은 밤중에 혼자 거기 있으려니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잠든 사람 옆에 깨어 있는 건 혼자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함께 있지만 실은 함께가 아닌 것이다. 삼촌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무거운 숨소리가 세찬 빗소리와 뒤섞였고, 이따금 어딘가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신경을 긁었다.

우스운 사랑들
‘영원한 욕망의 황금사과’, 밀란 쿤데라.
마르틴은 몸을 살짝 적시기만 하고는 물기를 털고 나왔다. 그는 넋을 잃고 무언가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르틴은 우리한테서 등을 돌리고 있는 한 아가씨의 건강한 몸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꼼짝하지 않고 연못 물을 보고 있었다. “저기 좀 봐.” 마르틴이 말했다.

미지의 걸작
‘영생의 묘약’, 오노레 드 발자크.
타오르는 눈은 돈 후안에게 달려들고 싶은 것 같았다. 비난하고 책망하고 위협하는 것 같았고, 소리 지르고 물어뜯는 것 같았다. 모든 뜨거운 감정이 그 안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부드러운 애원이었고, 왕의 분노였으며, 사형수를 위해 은총을 구하는 여인의 사랑이었다. 또 사형대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가 던지는 시선이었다. 한 조각의 생명 안에 너무 많은 생명이 번쩍였기 때문에, 돈 후안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감히 그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였지만, 벽걸이 융단에서도 그 눈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태양은 가득히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이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만약 갑자기 보트에 이변이 생긴다면, 둘 다 해안으로 돌아갈 가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도 전혀 없다. 디키는 안개 낀 기다란 갑을 향해 오른쪽으로 키를 당겼다. 여기서 톰이 디키를 때리거나, 덤벼들거나, 키스를 하거나, 바다에 집어 던지거나, 이런 원거리에서는 아무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톰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옷 아래가 뜨거워지고,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조르바는 해변의 조약돌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닷물이 찰랑대는 곳에 이르자 어둠이 그를 삼켰다. 그 뒤로 조르바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외따로 세워진 분수는 부동의 상태로 굳어진 듯, 창백한 깃털 같은 물줄기에서 떨어지는 미세한 물보라만이 미풍에 흔들렸다. 18세기는 선의 우아함을 순화했지만, 물의 분출 양식을 결정하며 그 삶을 정지한 듯했다. 꼭대기에 쌓이는 습한 구름마저 그 시대의 성격을 간직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고대 궁전의 석재처럼 계획된 도안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물줄기를 뿜어대며, 건축가의 오래된 명령에 따르기를 원하면서도 정확히 따를 수 없어 명령을 어기는, 그 수없이 산산이 부서지며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멀리서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솟아오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별의 능력
‘검은 해변’ 중, 김행숙.
투시불가능한 피부에 대하여
너는 어떤 가능성으로 도달하는가
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

검은 피부처럼
너의 영원한 누드처럼

어떤 악의도 없다면?
너는 무슨 뜻인가
이 고요함과 아름다움은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영양, 뜻밖의 사랑’ 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페르시아 수천의 말들은 광장에서
네 이마의 달과 함께 잠들었다,
내가 나흘 밤, 눈도 시샘할 네
하얀 허리를 안은 동안에.

너의 눈길은 석고와 재스민 사이
씨앗이 담긴 한 줄기 창백한 가지였다.
나는 내 흉부를 뒤졌다, 상아로 된
영원을 뜻하는 글자를 네게 주려고.

밤의 종말
프랑수아 모리아크
살짝 화장을 했을 뿐이지만, 테레즈는 거울에 비친 발그레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아마도 샴페인을 조금 마셔서 그럴 것이다. 가슴을 죄어오던 절망감이 느슨해지는 것은 늘 사소한 신체적 이유 때문이다. 하룻밤 푹 잤다든지, 포도주 한잔을 마셨다든지…. 절망은 떠나간 척 했지만 겨우 몇 발자국 간 것뿐이다.

아르헨티나 단편집
‘물건들’, 실비나 오캄포.
카밀라 에르스키의 스무 번째 생일에 누군가 루비 장미가 박힌 금팔찌를 선물했다. 그녀는 팔찌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극장에 가거나 대향연에 참석할 때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착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밀라 에르스키는 팔찌를 잃어버렸을 때 상실의 고통을 가족과 공유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아무리 값진 물건이라 할지라도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람, 카나리아, 개만 소중하게 여겼다. 나는 그녀가 성녀 루한상이 새겨진 금메달이 달린 은목걸이를 잃어버렸을 때 평생 단 한 번 울었다고 믿는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깨어 있음에 관하여’, 존 버거.
수영장 이용객들은 평등한 익명성을 공유한다. 신발도, 계급을 알리는 표지도 없이, 그저 각자 입은 수영복뿐이다. 지나치다 다른 사람을 우연히 건드리면 사과를 한다. 이곳에서는 조직화된 무언가에 세뇌돼 있을 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무한한 잔인함을, 그러니까 수영장 레인에서 스무 바퀴째 몸을 뒤집으면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딕
옛날 어니의 가족은 <뉴욕타임스> 서해안 판을 구독했다. 어릴 적에 집 어귀의 우편함을 열고 신문을 가져오곤 했다. 어니의 집은 살구나무와 깔끔한 단층집들이 늘어선 거리에 있었다. 그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이 잔디밭이었다. 비료를 실은 외바퀴 손수레, 새로 뿌릴 잔디 씨앗, 전지가위, 초봄에 설치하는 철망 울타리…. 그리고 긴 여름 내내 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돌아가는 스프링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