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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이온 킹] 제작의 비밀

2019.07.22GQ

영화 <라이온 킹>을 만들기 위해 존 패브로는 사바나와 밀림으로 향하지 않았다. 가상현실 속으로 들어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도널드 글로버가 못 하는 게 있을까? 좌중을 웃게 만들고 음악, 각본, 제작, 연기에 능한 그가 <라이온 킹>의 주인공 심바 역에 낙점됐다.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라이온 킹>의 가상현실 세트 속으로 들어선 존 패브로와 스태프들.

소형 컨트롤러로 가상 장비를 제어 중인 촬영 감독 칼렙 디샤넬.

배우들의 동작을 일일이 촬영하는 모습. 왼쪽부터 하이에나 센지 역의 플로렌스 카숨바와 패브로 감독, 하이에나 아지지 역의 에릭 안드레, 어린 심바에 캐스팅된 JD 맥크레리.

심바의 친구이자 노래를 부르는 멧돼지 품바에게 유쾌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세스 로건.

마블 팬들에게 존 패브로는 해피 호건이다.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최근 개봉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까지 지난 10년 동안 그는 토니 스타크의 절친이자 비서인 해피 호건 역을 연기했다. 할리우드 업계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패브로는 스타 감독으로 통한다. 가장 확실한 크리스마스 시즌용 영화인 <엘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시초 격인 <아이언맨>, 동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성공적으로 실사화한 <정글북>이 그의 비전과 지휘 속에서 탄생했다. 존 패브로라는 이름이 환기하는 캐릭터는 더 있다. 1990년대 중반을 풍미한 시트콤 <프렌즈>를 지켜본 2천6백만 명의 시청자에게 패브로는 피트 베커였다. 그게 누구냐고? 패브로가 6편의 에피소드에 걸쳐 연기한 IT 사업가이자 모니카의 남자친구인 피트 베커 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로 돈방석에 앉은 베커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캐릭터였다. 영화 <라이온 킹> 프로젝트를 이끈 파브로의 모습에서 그가 연기한 베커가 떠올랐다.

<라이온 킹>은 1994년 개봉해 메가 히트를 기록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했다. <신데렐라>, <정글북>, <미녀와 야수>, <덤보>, <알라딘>을 잇는 디즈니 라이브 액션 프로젝트다. 줄거리는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 삼촌의 계략으로 밀림의 왕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어린 사자 심바가 왕좌를 다시 찾는 여정이다. <라이온 킹>의 영화 버전에는 도널드 글로버가 주인공 심바 역을, 추이텔 에지오포가 악당 캐릭터 스카를 연기한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의 목소리 역에는 애니메이션과 동일하게 제임스 얼 존스가 캐스팅됐다.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멧돼지인 품바 역에는 세스 로건이, 캐스팅 라인업 공개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비욘세는 심바의 옛 친구 날라 역을 맡았다. ‘밤비가 햄릿을 만난 듯한 플롯’의 원작 애니메이션은 개봉 당시 전 세계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25년 전에 세운 그 기록은 깨졌지만 북미 전체 관람가의 역대 흥행 1위 자리는 지금까지도 <라이온 킹>의 차지다.
영화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작년 11월 공개된 티저 예고편은 하루 만에 전 세계 2억 2천4백만 뷰를 기록했다. 이는 <겨울왕국>, <미녀와 야수>를 제치고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 영화를 통틀어 24시간 기준 최고 조회 수였다. <라이온 킹>의 예고편은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감과 생생함은 CGI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경이로운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장면들은 완전히 새로운 제작 방법을 통해 구현됐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라이온 킹>은 전적으로 가상현실(VR) 안에서 촬영됐다.

프라이드 록, 코끼리 무덤, 주술사 원숭이인 라피키의 바오바브나무 등 원작의 주요 공간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하지만 실제 세트에서 촬영하지 않았다. 영화 속 배경들은 애니메이터의 컴퓨터 속에 존재한다. 제작팀은 영화 제작용 게임 엔진 내에 디지털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360도 가상현실 세트를 만들었다. 스튜디오 어디에도 카메라와 조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패브로와 스태프들은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 세트 안에서 돌아다니며 온갖 툴을 조작해 촬영 작업을 했다. 예를 들어 어린 심바가 코뿔새 자주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찍는다고 해보자. 심바의 얼굴에 햇살이 의도한 대로 비춰지지 않는다면 시각효과 감독은 툴을 사용해 빛의 강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

지금껏 SF 영화의 한 장면을 설명한 게 아니다. <라이온 킹>의 스태프들이 ‘볼륨(Volume)’이라 부르는 공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볼륨에는 세트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구조물이나 소품조차 없다. 텅 빈 공간에서 일부 스태프들은 카메라 크기만 한 뷰파인더를 쥐고 있다. 적외선 신호기를 장착한 뷰파인더는 3D 센서를 추적해 가상현실 세트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변환해서 보여준다.

VR 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 안에 들어간 촬영팀은 피사체의 움직임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위치를 파악한다. 그러고는 손에 쥔 컨트롤러로 가상의 촬영 장비를 체스 말처럼 원하는 곳에 이동시킨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볼륨,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대기 중인 테크니션은 뷰파인더를 움직여 가상현실의 장면을 촬영한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 카메라에 포착된 움직임을 다시 촬영하는 것이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제임스 카메론은 모션 캡처 수트를 착용한 배우들을 촬영하는 획기적인 기술을 <아바타>에 도입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나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에서는 가상현실을 설계한 후 그 안에서 리허설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 패브로는 가상현실을 새로운 매체로 변모시켰다. 이제 관객들은 VR 헤드셋이 없어도 그가 가상현실로 구현해낸 액션, 판타지, 드라마, 코미디, 로맨스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게 됐다.

오리지널 <라이온 킹>이 개봉된 1994년 무렵, 할리우드 작가들은 가상현실 기술의 등장에 환호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을 영화화한 <폭로>는 가상현실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기업을 배경으로 극이 전개됐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코드명 J>와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한 <스트레인지 데이즈>는 가상현실 기술을 다룬 사이버 펑크 장르였다. 인기 시트콤 에서는 가상현실 스타트업에 투자한 주인공들이 가상현실 안에서 유명인들을 만나는 에피소드를 다루기도 했다. 이 외에도 SF 소설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사이키델릭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됐다. 하지만 정작 가상현실 기술은 일상 깊숙이 자리 잡지 못했다. VR 장비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데다 재생 속도는 느렸다. 게다가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한동안 붐을 일으켰던 가상현실의 인기는 사그러들었다.

대중의 레이더에서 멀어진 가상현실 기술은 의외의 분야에서 잠재력을 터뜨렸다. 1995년 <LA 타임스>가 “가상현실 기술은 부동산, 건축, 의학 영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라고 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오락 매체로 인식됐던 가상현실 기술의 산업적 가치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스마트폰의 등장은 초소형 디스플레이와 센서 산업의 부흥을 이끌었다. 오큘러스를 비롯해 발 빠른 제조사들은 마침내 소비자용 VR 기기가 필요한 시대가 왔음을 확신했다. 21세기에 이르러 가상현실 기술은 제2의 생명을 얻었다. 이 같은 시장 흐름에 맞춰 360도로 영상이 펼쳐지는 VR 영화관이 등장했다. 관객들은 더 이상 평면 형태의 스크린에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관객들의 발길은 참신한 기술의 향연보다 재미를 담보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강하게 이끌렸다.

다시 <라이온 킹>의 촬영장으로 돌아오자. 2018년 2월, LA 인근에 위치한 별 특징 없는 건물에서 영화계의 새 흐름이 베일을 벗었다. 볼륨 공간에서 만난 패브로는 “우리의 힘찬 날갯짓을 볼 수 있을 거다”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영화에 캐스팅된 배우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그들이 목소리 연기를 하는 동안 여러 대의 카메라가 표정과 움직임을 꼼꼼하게 캡처했다. 그 장면들은 애니메이터들이 동물 캐릭터들을 만드는 작업에서 레퍼런스로 쓰일 예정이었다. 이윽고 카메라가 빠지고 VR 헤드셋을 착용한 스태프들이 가상현실 세트 속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심바와 스카 그리고 심바의 어머니인 사라비와 하이에나 무리가 대치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쏟아내는 장면이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긍심을 되찾은 심바가 스카와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볼륨 공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촬영 장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찍은 장면은 두 번씩 재생됐다. 한 번은 촬영하면서, 또 한 번은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 장면은 완벽해 보이지 않았다. 배경은 허술했고 동물 캐릭터들은 정해진 동선을 일정한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후반작업을 거치면서 미완성의 동물들은 대초원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생동감 있는 표정을 갖게 된다. 그런데 촬영 중간에 문제가 생겼다. 사라비가 형을 죽인 스카를 비난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촬영감독인 칼렙 디샤넬이 “쓰리, 투, 원. 고!”를 외칠 때마다 하이에나 무리가 스테디캠을 가로막았다. 촬영은 속개됐지만 패브로와 디샤넬은 다시 머리를 감쌌다.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다. 가상의 하이에나 한 마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사라비를 가렸다. 가상현실 촬영 중에 종종 일어나는 버그였다.

<혹성탈출> 시리즈처럼 모션 캡처 수트를 입은 배우들을 촬영하는 작업이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이에나 역을 맡은 배우가 카메라 밖으로 물러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가상현실 안에서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촬영 전에 애니메이션팀은 미리 동물들의 동선을 정교하게 설계해둔다. 요주의 하이에나는 잘못이 없었다. 입력된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스테디캠의 시야를 방해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를 보다 지친 패브로가 중얼거렸다. “엑스트라가 문제라니까.”
가상현실 촬영의 장점은 즉각적인 유연성이다. 시각효과 감독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라비와 스카를 한 장면에 담고 있는 가상 카메라의 툴을 이용해 하이에나에 가려진 그 둘을 다른 동물들보다 더 커 보이도록 조정했다. 그 결과 캐릭터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전체 화면은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골칫거리였던 하이에나의 존재감은 축소됐다. 어차피 어색한 부분은 후반작업으로 보완하면 될 일이다. 패브로는 이게 바로 <라이온 킹>을 만드는 일반적인 작업 공정이라고 설명했다.

완벽한 CGI 기술을 선보인 마블 시리즈와 <정글북>을 연출한 경험을 통해 그는 실사 영화 기법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과 한계를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완벽하게 보완하고 제어하는 작업에 숙달했다.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한 촬영도 수정을 거쳐 완벽한 장면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물론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다. 그보다 효율적인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고로움이 쌓이고 쌓여 진짜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장면을 얻을 수 있다.”

패브로는 <라이온 킹>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진짜 영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디즈니 마케팅팀과 마찬가지로 그는 새로운 형태의 프로젝트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패브로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라이온 킹>은 가상현실 같지 않으면서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잘 뜯어보면 인간적인 노동이 엿보이는 영화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이를 함축할 수 있는 기술적인 단어가 있으면 좋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침내 <라이온 킹>을 완성했지만 새로운 숙제가 주어진 듯했다. 그가 고심해서 내놓을 단어가 무엇이든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상황에서 패브로는 가상현실 기술로 놀라운 몰입감과 현실성을 지닌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영화계에 뛰어들기 전 패브로는 뉴욕 퀸즈의 한 극장에서 안내원으로 일했다. 그 시절부터 그는 최첨단 기술에 푹 빠져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영화를 만드는 상상을 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꿈은 현실이 됐다. <라이온 킹>을 완성한 패브로는 디즈니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선보일 <스타워즈>의 스핀오프 드라마 <만달로리안>에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도 <라이온 킹>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상현실 기술은 영화계에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이십세기 폭스사는 비주얼 특수 효과 연구소에 가상 제작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10년 전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 제작에 사용한 가상 기술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 시설이다. 한편 <아바타> 후속 편들을 동시에 촬영하고 있는 카메론은 스태프들과 매일 가상현실 속을 드나들고 있다. 이런 추세를 비춰보면 불과 몇 년 뒤에는 VR 헤드셋 사용이 줄어들고 가상현실 안에서 촬영한 장면을 실시간 영상으로 변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 무한한 가능성을 앞두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계의 혁명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뗐다.

    에디터
    Peter Ru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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