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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C 정찬성 "자만하는 순간 멈추게 돼요"

2019.07.25GQ

정찬성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정상의 자리가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다.

오버핏 재킷, 팬츠, 슬리브리스, 모두 오디너리 피플. 뱀피부츠, 앤더슨 벨.

블랙 PVC 롱 후드 재킷, 유저.

베이지 수트, 드레익스. 슈즈, 컨버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헤나토 모이카노를 58초 만에 쓰러뜨렸다. 경기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나? 정말 많이 봤다. 경기가 끝나고 2주가 지났는데 500번 정도 본 것 같다. 해외 중계까지 다 찾아봤다.

58초 동안 얼마나 원하는 대로 경기가 풀렸나? 카운터 펀치는 준비된 전략이었다. 언제 쓸지가 관건이었다. 모이카노는 뒤로 빠져서 경기를 운영하는 스타일인데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거리를 재며 들어오더라. 그래서 재빨리 시도했다. 이번 경기는 의도한 대로 다 됐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승리의 감흥도 크겠다. 준비한 기술로 이기면 느낌이 다르긴 하다. 이번 승리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은 느낌이다. 2년 전 데니스 버뮤데즈를 쓰러뜨린 어퍼컷도 준비했던 거다.

시합을 준비하면서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나? 물론이다. 전략을 짜고 몸에 밸 정도로 연습을 하면서도 ‘이게 통할까?’하는 의심을 떨쳐내기 힘들다. 하지만 경기를 하면 할수록 확률이 높아진다. 그게 경험인 것 같다.

만약 경기가 더 길어졌다면 어땠을까? 어떤 전략을 구사하려고 했나? 3라운드는 버틸 만한데 5라운드까지 가면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다. 상대도 지치게끔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준비한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임기응변이 중요한데 그것도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전 경기들에 비해 세리머니가 차분했다. 담담한 듯 보이는 표정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 감정적으로 너무 업되지 않으려고 했다. 어쨌든 모이카노는 나보다 랭킹이 높고 다들 그의 승리를 예상하는 분위기였다. 이기고 나서 너무 좋아하거나 들뜬 모습을 하면 내가 우연히 이긴 것처럼 비춰질 것 같았다. 실력으로 이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무덤덤하게 행동했다.

처음부터 이기는 경기라고 확신했다는 말로 들린다. 내가 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경기도 마찬가지다. 그 정도로 준비를 열심히 했다.

이번 승리로 확실하게 얻은 것은 무엇인가? 시합을 앞두고 한 달 먼저 미국에 가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너무 만족스러웠는데, 그런 노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승리로 증명된 것 같다.

미국 훈련 방식은 확실히 무엇이 다른가? 일단 각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있다. 영양학, 훈련 방법 등에서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쨌든 미국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이 챔피언이 된다. 배워야 한다면 챔피언이 있는 미국에서 배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남들과 똑같다고 여기고 더 다르게 훈련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특별해’, ‘내 타격 기술은 세계 최고야’라고 자만하지 않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후배들에게도 자만하지 말라고 늘 강조한다. ‘상대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도 똑같이 생각한다’라고 가정하고 더 많은 운동을 하고 다르게 생각을 해야 한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자부하는 순간 멈춰버리게 된다.

이러다 내가 죽겠다 싶은 훈련은 뭔가? 모든 훈련이 힘들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체력 운동. 최대한 몸을 힘들게 하다 보니 근육통에 시달린다.

전문가들이 정찬성의 장점으로 체력을 꼽는데도? 그것도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상대도 똑같이 5라운드를 준비하고 올라오고, 똑같이 힘드니까 내가 더 훈련을 해야 한다. 자신감은 훈련량에 비례한다. 훈련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두려움도 커진다.

넘지 못할 상대를 넘어선 경험도 있나? 같은 체급의 선수 중에서 넘지 못할 상대는 없다. 그런 생각이 든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이번 승리로 세계 랭킹을 12위에서 6위로 끌어올렸다. 경기 직후 다음 상대에 대한 질문에 “내 위 아무나”라고 했는데 그 생각은 변함이 없나? 전에는 상대의 랭킹이 나한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중요한 입장이 됐다.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됐다. 지금은 한 경기라도 빨리 타이틀전에 가까워지고 싶다.

영향력도 한층 커졌다. 모이카노와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다음 경기는 한국에서”라고 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UFC가 오는 12월 부산에서 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나도 신기했다. 찔렀는데 바로 진행됐으니까.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었다. 만약 원하는 상대가 부산 대회에 오지 않는다면 나도 출전할 이유가 없다. 한국에서 경기를 뛰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내가 원하는 상대가 아니라면 남 좋은 일만 하고 싶지 않다. 현재 UFC와 협상 중이다. 조건이 맞아야 한다.

어렸을 때 내성적이고 몸이 약해 이모 손에 합기도장으로 끌려가 운동을 처음 접했고, 그 뒤로 지는 걸 모르고 계속 이기다 보니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들었다. 지금 위치에 서기까지 의지와 노력, 천부적인 재능 중 무엇이 가장 컸나? 신체적으로 타고났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그러면 내 노력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그 대신 운동을 할수록 마인드는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지치지 않는 정신 말이다. 시합은 25분이지만 운동은 15년 가까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왔다. 이 정도 시간을 버텼으니 타고났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누구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커리어의 승부처나 전환점은 언제인가? 경기에서 패배했을 때다. 조제 알도와의 타이틀전에서 졌을 때도 그렇고 마지막 1초를 남기고 야이르 로드리게스에게 KO패를 당하고 난 뒤에도 부족한 점을 찾고 그걸 채우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완성 단계로 가고 있다.

첫 패배는 어떤 경기였나? 일본의 센고쿠 대회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봤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그전까지 싸우기만 하면 이겼는데 한번 지고 나니까 너무 아프더라. 그때부터 질 것 같은 두려움에 시합을 즐기지 못한다.

가장 뜨거웠던 승리는? 군복무를 마치고 처음 치른 복귀전에서 3년 6개월 만에 이겼다. 그 경기는 무조건 잡고 싶었다. 다들 정찬성은 끝났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번 승리도 그때처럼 의미가 크다. 6년 전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실패했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나? 운동은 비즈니스다.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 미국에서 훈련을 하려면 그만큼 돈이 든다. 한국에서는 큰 기업들이 테니스, 축구, 야구에 후원을 하지만 이종격투기에는 아직이다. 나도 후원사가 하나도 없다. 파이트 머니로 훈련을 하고 비용을 충당한다. 다행이라면 파이트 머니의 액수가 전보다 커졌다는 것이다. 챔피언이 되면 기업의 후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 운동만 열심히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은퇴 시점을 5년 뒤로 잡았는데 다급하거나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나? 서른 일고여덟이 넘어가면 운동은 무리일 것 같다. 보통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그 나이가 되면 은퇴를 한다. 마음은 급하지 않다. 5년이란 시간은 되게 길다. 한 경기씩,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고 한다. 이제 타이틀전까지 한 발짝 남은 것처럼 느껴진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하면 된다. 예전에는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 부상을 당하고 군 복무를 할 땐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챔피언이 되려고 발악도 해보고 근처까지도 가보고 놓쳐도 보니까 오히려 지금은 담담하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얼마 전 조지 마스비달이 경기 시작 5초 만에 니킥으로 KO 승리를 거두면서 UFC 최단시간 경기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면서 2011년 마크 호미닉을 7초 만에 꺾은 기록이 해당 부문 3위로 밀려났다. 1위가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솔직히 아쉽긴 하다.

그래도 여전히 돋보이는 기록들을 보유하고 있다. ‘UFC 최초의 트위스터 서브미션승’ ‘ESPN 올해의 경기’ ‘한국인 선수 최초의 UFC 타이틀전’. 이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무엇인가? 다 소중하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레오나르도 가르시아와의 시합에서 트위스터로 거둔 승리. UFC에서 이 기술로 이긴 선수는 지금까지 나 말고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경기 이후 트위스터를 쓰지 못하고 있다. 방어하기 쉬운 기술인데 나 때문에 많이 알려지면서 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판정 승부도 없다. 승패에 상관없이 화끈한 경기로 전 세계 격투기 팬에게 인기가 높은데 선수로서 어떤 경기가 가장 볼 만하다고 느끼나? 치열한 싸움 안에 전략과 기술, 냉정함이 있어야 한다.

    에디터
    김영재
    포토그래퍼
    곽기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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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현 at Mizangwon by Tae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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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애 at Mizangwon by Tae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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