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 페이와 피비 윌러 브리지의 대담 | 지큐 코리아 (GQ Korea)

티나 페이와 피비 윌러 브리지의 대담

2019-07-29T17:07:23+00:00 |interview|

피비 월러-브리지는 각본부터 제작, 주연까지 활약한 <플리백> 시즌 2와 단숨에 명작 반열에 올려놓은 <킬링 이브> 시즌 2까지, 유리 천장을 깨고 자신의 재능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앞으로는? 본드 시리즈의 차기작 대본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삐딱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기로 영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피비 월러-브리지를 인터뷰하는 데 미국의 정신적 쌍둥이 티나 페이만 한 적임자가 있을까?

슬리브리스 톱, MSGM.

드레스, 구두, 모두 지방시.

셔츠, 팬츠, 장갑, 모두 샤넬.

슬리브리스 톱, MSGM. 선글라스, 프라다.

재킷, 스커트, 모두 트레 by 나탈리 라타베시. 브라톱, 마르니. 선글라스, 프라다.

재킷, 리뎀션. 브라톱, 월포드. 팬츠, 스텔라 매카트니.

점프 수트, 살바토레 페라가모. 재킷, 리뎀션. 슈즈, 처치스.

Tina Fey 이하 TF 자, 시작해볼게요. 피비 월러-브리지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나요? Phoebe Waller-Bridge 이하 PWB 시끄럽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농담을 좋아하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아이요. 부모님께는 악몽이었겠죠.

TF 학교에 가는 걸 좋아했나요? PWB 학교는 좋아했어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매일 친구들을 만나는 거잖아요. 숙제는 좋아하지 않았지만요.

TF 어떤 동네에서 자랐어요? PWB 런던에서 자랐어요. 센트럴 선 종점 쪽인데 정말이지 아름다운 지역이에요. 길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모두들 숨기는 것 없는 분위기였어요. 사랑스러운 곳이죠.

TF 누군가를 처음으로 웃게 한 게 언제인지 기억하나요? PWB 기억나요! 저는 제 방에 있었고 엄마 친구분들이 놀러오셨어요. 그날 손님들이 오기 전에 다 같이 슈퍼맨에 대한 얘기를 했었고, 갑자기 제 머릿속에 슈퍼맨에 대한 농담이 떠오른 거예요.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였는데 “농담이 생각났으니까 당장 엄마한테 들려줘야지”라고 마음먹은 기억이 나네요.

TF 다른 사람이 같은 농담을 해버리기 전에 말이죠? PWB 맞아요. 다른 사람이 먼저 해버리기 전에 말이에요! 빨리 엄마한테 슈퍼맨 농담을 얘기해줘야지!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엄마, 내가 농담 하나 해줄게”라고 했고 어머니는 “그래 해봐”라고 하셨죠. 모두가 조용히 제 농담을 들어야 했어요. 사실 딱히 재미있는 농담도 아니었거든요.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슈퍼맨이 뭔가를 필요로 한다는 얘기였어요. 슈퍼맨은 벨트가 필요하고, 사실은 엄청 뚱뚱해서 벨트가 몸을 잡아준다, 뭐 이런 얘기였어요.

TF 그건 어떤 의미로는…. PWB 나이가 들면 공감할 수 있는 얘기죠!

TF 그리고 그게 바로 픽사 애니메이션의 미스터 인크레더블이군요? PWB 일종의 초기 버전이죠.

TF 픽사에서 인정할 정도라면 뭐. 자라면서 주로 어떤 TV 프로그램을 봤어요? PWB 미국 드라마 엄청 봤죠.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가 인기였는데, 제가 빠져서 봤던 건 <앱솔루틀리 패뷸러스>예요. 제 삶을 변화시킨 중요한 TV 프로였죠.

TF 그거 진짜 재미있죠. PWB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하지? 이게 진짜란 말이야…?’라고 생각했어요.

TF 게다가 딱히 유익하거나 교훈이라 할 내용도 없었어요. 아이를 불구로 만든 여성의 얘기잖아요. PWB 바로 그거예요! 하루 종일 취해 있기나 하고 말이에요. 다들 각자가 원하는 대로 굴기만 했어요. 그 전까진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세상이 뭐라 하건 관심 없다는 식의 출연자들이 꽤나 매력적이었어요. 그 여성들이야말로 그 시절의 영웅들이었죠.

TF 맞아요. 그리고 미국에서는 MTV가 <더 영 원스>를 방영하기도 했어요. <더 영 원스>도 뭔가 상당히…. PWB 제정신이 아니었죠.

TF 정신이 완전히 나갔죠. PWB 그렇죠. <블랙애더>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기이하게 유머러스했죠. 역사상 최고의 농담은 <블랙애더>의 “달링”인 것 같아요. 이름이 달링인 것 자체가 웃겨요. 주요 캐릭터 인 대위의 이름이 달링이잖아요. 진지한 얘기를 할 때마다 “기분이 어떻소, 달링?”, 이런 식이니까요. 몇 년이 지나도 볼 때마다 웃겨 죽겠더라고요. 그나저나 티나도 영국 TV 프로그램을 많이 봤나요?

TF 당연하죠. 영국 코미디가 미국보다 당연히 낫다고 생각했어요. PWB 영국 코미디가 더 재미있다는 속설 같은 게 있는데 항상 그런 건 아니거든요.

TF 연기학교에 다니던 시절 본인을 배우 혹은 작가로서 한정해서 여긴 적이 있나요? 코미디가 주된 관심사였나요? PWB 코미디가 가장 재미있는 장르란 생각은 늘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연기자가 제 평생의 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국립 청소년 극장에서 <벅시 말론>을 봤던 기억이 나요. 제가 여덟 살이었을 때, 또래 배우들이 잔뜩 나와 <벅시 말론>을 공연했는데,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줬죠.

TF 모두 배우가 되기를 바라며 시작하지 않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재미있을 것 같잖아요. PWB 게다가 눈에 보이는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TF 어떤 배역이 주어졌는데 굉장히 매력적이기까지 해요. 이왕이면 대사에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피비는 어때요? 자신의 대사를 직접 쓰는 걸 선호하나요? PWB 굉장히 본능적으로 이뤄져요. 연극 <플리백>의 경우, 당시 그 작품을 하고 싶어 한 건 저밖에 없었고 내 대사를 쓰겠다는 사람도 저뿐이었어요. 대사 한 줄 한 줄에 확신이 있어야 했죠. 제 안의 배우와 제 안의 작가가 서로를 시험하고 자극했거든요. 대본에서 “이 대사는 전혀 기대되지 않는걸”이라거나 “이 대사는 빨리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보이는 때가 와요. 스스로에게 던진 도전은 대사 하나하나 전부 즐길 수 있는 대본을 쓰자는 거였어요. 하지만 <킬링 이브>의 경우 제가 스스로 출연진에서 빠졌죠. 저를 출연시키는 방향의 얘기가 있기는 했지만….

TF 애초에 피비가 출연하는 방향의 기획이었나요? PWB 맞아요. 하지만 캐릭터들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들이 굳어진 상태였고, 결국 제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없게 되었죠. 일단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자, 오히려 굉장한 해방감과 흥분감이 들었어요. 이제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자는 식으로요.

TF 본인이 출연하지 않는 장편을 제작해본 적 있나요? PWB 없어요. 단편 연극은 해봤지만요. 제가 소속됐던 극단과 소규모 단편 연극을 몇 편 만든 적이 있고, 졸업 작품용 대본 작성을 의뢰한 연기학교도 있었죠. 그 작업도 즐거웠어요. 타인이 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을 보는 특별한 쾌감이 있더군요.

TF 적나라한 표현이지만, 남이 쓴 작품을 연기하는 것은 마치 클리토리스 자극을 통해 도달하는 오르가즘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직접 작품을 쓴다는 것은…. PWB 삽입이라는 뜻인가요?

TF 그보다 좀 더 뒤? PWB 그럼 즉흥 연기는….

TF 즉흥 연기는 절정 없는 애무랄까요. <킬링 이브>는 출연진이 정해지기 전에 써놓은 분량이 얼마나 됐나요? PWB 첫 에피소드 몇 편 정도예요. 첫 회는 확실히 쓴 상태였고, 아마 그 후 두세 에피소드 정도? 그러다가 출연진이 정해지고 모든 게 명확해졌죠. 그런 거 있잖아요. 배역을 맡을 인물이 정해지는 순간 생각의 초점이 맞춰지면서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고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 말이에요. 그것들이 대본에 생명력을 불어넣죠. <킬링 이브>의 경우 저는 이브에게 감정을 더 이입했어요. 저라는 사람이 단편적으로 이브 안에 담겨 있었거든요. 그렇게 제 모습의 조각들을 갖고 대본을 써 내려갔는데, 배우 샌드라 오와 이브에 대해 처음으로 얘기를 나눈 날 이브라는 캐릭터를 제 손에서 놓아줄 수 있었어요. 샌드라는 맡겨진 캐릭터를 순식간에 이해하고 교감하더군요.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네요”라고 하더니 이브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저는 그걸 다 받아 적을 수밖에 없었죠. “맞아요, 그게 그녀가 내세우는 기준이죠. 그게 핵심이이에요”라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극중 암살자인 빌라넬의 경우 캐릭터를 이해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동시에 여섯 명의 상이한 인격을 지녀야 했거든요.

TF 악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한 미치광이로 그리는 건 너무 쉬운 방법일 거예요. 하지만 빌라넬은 특별한 매력이 있죠. PWB 정말 그렇죠. 빌라넬 안의 숨겨진 따뜻한 면을 찾는 것, 그러니까 냉혹한 캐릭터 안에서 말랑한 면을 찾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관객이 전혀 기대하지 않을 것 같은 요소를 찾아내는 거죠. 게다가 조디 코머는…, 말할 것도 없죠. 샌드라 때와 마찬가지로 조디와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이었어요. 우리는 빌라넬에게 유머감각을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끌어냈어요. 모든 것에서 유머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거예요. 상대에게 유머감각이 있다는 사실과 그게 어떤 종류의 유머인지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킬링 이브>의 등장인물 간 역학관계 중 하나는 피오나 쇼가 연기한 캐롤린과 관련된 것이에요. 저는 MI6 러시아 데스크를 이끄는 캐롤린에게 유머감각이 없다는 설정을 부여했거든요. 그녀는 유머감각도 없고 이브의 유머감각에는 더더욱 공감하지 못하죠. 그리고 이게 재미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은 한 명은 농담을 던지는데 상대방은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등장인물이 서로에게 웃음을 주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그려냈죠.

TF 완전히 이해해요. 저는 실생활에서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나 가치관을 확인하기 위해 항상 유머를 사용하거든요. 상대가 어떤 부분에서 웃음을 터뜨리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죠. 그렇지 않나요? PWB 맞아요. 근데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그런 생각부터 한다고요?

TF 그렇죠. 뭐랄까, “넌 대체 뭐니?” 같은 거예요. PWB 그다음엔 상대를 먼저 시험해봐야 해요. 왜냐하면 저는 실생활에서 농담을 던진다는 것은 가장 위험한 행위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농담을 한다는 건 매번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거예요. 그게 사회적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는 리스크를 극단까지 짊어지는 거죠. 전 국민을 상대로 농담을 던지는 거니까.

TF 그렇죠. PWB 파티 같은 데서 누군가 농담을 살짝 던지려 하는 걸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빨리 해봐!”라는 심정이죠. 농담 직전과 직후의 순간에는 굉장히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성질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농담을 한다는 게 인간적으로 느껴져요. 하지만 등장인물의 대사를 쓰는 것은 좀 달라요. 캐릭터가 재미있는지, 또는 특정 순간이 재미있는지를 항상 따지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캐릭터들과 조화롭게 녹아드는 게 더 중요하죠. 그래야 캐릭터가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거든요.

TF 코미디언의 경우, 그에게 농담을 한다는 건 섹스 중독자와 잠자리를 가지려는 것과 비슷하죠. 웬만해서는 만족시키기 힘들어요. 정교하고 다층적인 농담을 구사해야 하죠. <플리백>을 만들 때는 어땠어요? <플리백>은 섹스 중독에 관한 거잖아요. 그런데 <플리백>의 경우 본인이 제작한 시리즈니까 갈등이 발생할 일도 없었죠? PWB 맞아요. 그럴 일이 없었죠. 저는 코미디에 섹스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에요. 특히 섹스라는 게 조롱과 농담의 대상이 되는 게 못마땅했죠. “진짜 웃긴다. 걔(남성)가 너랑 자고 싶대!” 또는 “진짜 웃긴다! 걔(남성)가 너랑 자기 싫대!”라는 식으로 말이에요. 코미디에서 여성 캐릭터를 두고 저 여자와는 자고 싶네 마네 하는 건 사실상 그 캐릭터를 끝내버리는 거나 다름없어요.

TF 그렇죠. 오로지 두 가지의 선택지만 부여하는 거죠. PWB <앱솔루틀리 패뷸러스> 같은 작품을 제외한다면 그 당시에는 딱 그 두 가지의 선택지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앱솔루틀리 패뷸러스>의 작가들과 출연진은 “이제 그런 식으로 안 할 거야. 이제부터는 우리가 괴물이 될 거야…”라고 나섰던 거죠.

TF 그러고는 이드리스 엘바에게 남성 창부 역을 맡기죠. 극중에서 여성들이 너무 취한 나머지 이드리스 엘바를 불러놓고도 결국 섹스에 성공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해요. PWB 대놓고 웃기네요.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암울했겠죠. 하하하. 그 시절에 대본을 읽으면서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상황을 인지하고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배역을 따는 게 절실했죠. 게다가 성차별적인 대본을 받아도 그게 차별적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아요. 당시는 그런 게 당연하게 여겨졌으니까.

TF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하는 것 자체를 그만두게 되죠. PWB 맞아요. 당시엔 아무도 그게 문제라는 걸 몰랐어요. 작가나 제작자들도요.

TF 지금이라면 절대 안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간절히 원해서 했던 배역이 있나요? 대체 그걸 왜 했지 싶은? PWB 제가 처음으로 맡은 배역이 딱 그거예요. 코믹한 섹스 장면이었는데, 나체로 수염을 단 채 남자를 스팽킹하며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라고 명령하는 거였어요. 상대에게 소변까지 봐야 했죠.
TF 이걸 무대 위에서 했다고요? PWB 설마요! TV 프로그램이었어요. 지금도 볼 수 있어요. <하우 낫 투 리브 유어 라이프>라는 프로인데 제목이 많은 걸 말해주죠. 하지만 굉장히 성공한 프로였고, 같이 일한 사람들도 좋았어요. 물론 대본을 읽으면서 속으로는 “그럼 그렇지. 섹스 장면이 당연히 들어가야지. 왜 아니겠어. 요즘 같은 때라면 <오만과 편견>을 찍더라도 섹스가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했죠.

TF 맞아요. PWB 그때 제시카 네펫을 알게 되었죠. 제시카는 <드리프터즈>의 작가이자 저와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인데, 코미디도 굉장히 잘 써요. 제가 티나 페이와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완전히 흥분했죠. 저흰 <하우 낫 투 리브 유어 라이프>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둘 다 속옷차림이 됐죠. 그 상태로 보통의 여성 동료들처럼 평범하게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는데, 별안간 문이 열리며 판다 몇 마리가 들어오더니 남자들이 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섹시한 속옷만 걸친 채 누워 있고요. 그게 저희가 처음으로 맡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일종의 기준 같은 게 되었어요. 그게 기본이었던 거죠. 프로그램 자체는 재미있었어요. 고상하고 변태적인 여성인지 뭔지에 관한 거였어요. 하지만 촬영을 마친 뒤 ‘매번 이런 것만 하고 싶지는 않은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본을 제가 직접 써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자각한 상태가 아닌 이상 말이죠.

TF 어떤 때는 “이건 내 작품이니까 연출 방식도 내가 정할 수 있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요? PWB 엄청 중요하죠. 촬영을 어떻게 할 것이며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정하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여성과 성을 다루는 거라면 특히요. <플리백>의 첫 시리즈가 공개되었을 때 언론의 반응은 “TV 역사상 가장 추접하고 노출이 과하며 적나라한 프로그램”이라는 식이었어요. 제가 나체로 등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제 입장은 “맨살이 드러나는 장면은 없는데?”였죠. 저는 제 항문에 대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에요. 어쩌면 그게 사람들에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게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적나라했던 건 실제 행위가 아닌 대사였어요.

TF <플리백>에서 피비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순간이 짜릿해요. 새로운 코미디 기술을 발명한 것도 아닌데 신선하게 다가오더군요. 연극 <플리백>에서도 그렇게 했나요? 어떻게 카메라를 향해 얘기할 생각을 하게 됐어요? PWB 무대 위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관객과의 관계이기 때문이에요. 시청자들에게 스탠드업 같은 이야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가차 없는 농담들을 던지고, 주인공이 나온 이유는 오로지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모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끝에 가서는 시청자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주인공이 털어놓은 비밀을 알게 된 시청자들이 주인공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주인공이 시청자들에게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내 인생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재미있었나요?”라는 질문을 던져요. 바로 이게 반전이었고 그래서 시청자와의 관계가 정말 중요했어요. 극 초반에 암울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내 인생에 들어와 봐. 섹시하고 재미있어! 진짜 재미있을 거야. 맹세해!”라고 우선 끌어들이죠. 모든 건 주인공의 재량이고, 편집을 통해 시청자들과의 관계를 끊어나가는 식이에요.

TF 그렇군요. PWB 모든 게 주인공의 의도에서 비롯된 거라는 생각이 항상 있었어요. 그러다 주인공이 스토리와 주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촬영이 느슨해지죠. 카메라가 주인공이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래 주인공 근처를 알짱대는 거예요. 누군가로부터 같이 어울리자는 제의를 받았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오른 상황과 비슷해요. 상대방이 “우리는 ‘절친’이야!”라고 선언해버리는 그런 상황. 그래서 조금 지나칠 정도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상대가 “사실 이렇게 관계를 맺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됐어”라고 나오는 거죠. <플리백> 시리즈가 끝나는 방식이 딱 그래요. 주인공이 시청자들과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진 것 같아 발을 빼요. 제가 지금껏 겪은 상황들을 TV에 옮겨놓은 것 같았죠.

TF TV로 이식하는 과정은 자연스러웠나요? 무대와 TV의 문법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피비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낼지 확실히 아는 상태에서 <플리백>을 찍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PWB 여전히 배워나가는 중이긴 했지만 본능적으로 확신을 갖고 들어간 게 한두 개 있어요. “이 장면은 핸드헬드로 찍으면 안 돼”라거나 “여기서는 화면이 흔들리지 않아야 해” 같은 것들요. 주인공이 술에 취한 장면에서 카메라까지 취한 것처럼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카메라는 냉정하게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해서 시청자가 볼 때 화면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죠. 이 정도예요.

TF <킬링 이브>의 경우 촬영과 대본작업을 동시에 했나요? PWB 맞아요.

TF 좋은 방법 같아요. 보면서 배우는 게 있잖아요. PWB 그렇죠. 조디의 연기를 보며 빌라넬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어요. 그가 유머를 더 많이 보일수록 어떤 방향으로든 끌고 가도 되겠다는 믿음이 확고해졌거든요. 그러던 중 빌라넬에게 ‘스웨거’가 생긴 거예요. 네다섯 번째 에피소드쯤이었는데, 전 “갑자기 저게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라며 의아해했죠. 알고 보니 빌라넬이 조국 러시아로 돌아간 게 계기였어요. 거들먹거리고 으스대는 성격이 거기서 생겨났던 거죠. 시즌 말미 에피소드를 쓸 때 그런 점을 많이 참고했어요. 티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퀸카로 살아남는 법> 제작 당시, 제작사에서 티나에게 대본 초안을 전부 맡겼죠?

TF 사실이에요. PWB 그래놓고 최종본은 다른 작가들을 영입해 2주 만에 작업을 끝내버리는 문화가 미국에 있더군요. 그런 경우 본인이 쓴 대본을 되돌려주나요?

TF 가끔은요.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거예요. 하지만 맞는 말이에요. 그런 관습이 있죠. 많은 애착을 갖고 쓴 대본을 다른 작가에게 넘겨버리거나 아니면 멋대로 바꿔버리거나 하는 일들요. 적어도 스튜디오 제작 체제 하에서는 그래요. 작가실에서 일해본 적 있나요? 피비가 직접 작가실을 꾸린다면 진짜 멋질 것 같아요. PWB 최근엔 작가실을 만드는 방향으로 조금씩 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저와 굉장히 가까운 동료인 <킬링 이브>의 스토리 프로듀서 제니 로빈스와 <플리백> 첫 시즌을 만든 비키 존스와는 모든 얘기를 다 해요. 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 텐데, 저는 모든 걸 다 말로 해야 해요. 짐 싸들고 동굴에 틀어박혀 쓰기만 하는 건 불가능한 사람이죠. 방이나 사무실은 없지만 그들과 얘기하는 게 나름의 작가실이라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언젠가 작가실을 경험해보고 싶긴 해요. 하지만 <플리백> 감독의 해리 브래드비어나 저나 일종의 무질서적 질서를 따르는 편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TF 한 번에 한 프로젝트만 하는 걸 선호해요? 아니면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병행하나요? PWB 지난 5년 동안은 두 개의 TV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했고, 힘들다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한 가지 프로젝트에 집중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가 하면 하던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될지도 걱정하죠. 티나는 하던 걸 멈추는 게 어렵지 않나요?

TF 저는 하던 걸 멈추는 데 굉장히 능숙해졌어요. TV 프로그램 <30 록>을 했었잖아요. 정신이 나간 상태로 7년을 보냈죠. PWB 정말 그랬을 것 같아요.

TF 매주 70~80시간 들여서 에피소드를 1년에 22개나 만들었죠. 게다가 당시에 전 육아까지 해야 했어요. 어떻게 그걸 다 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지금의 피비와 비슷한 나이였고 지금보다 힘이 넘쳐서 가능했던 게 아닐지. PWB 세상에! 그 긴 시간 동안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

TF 여름부터 대본 작업을 시작하는데, 8월 말에 촬영에 들어가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에피소드를 끝내두려 했어요. 촬영이 시작되면 촬영장에 있다가 대본 작업 상황을 보러 작가실로 가곤 했죠. 밤이 되면 작가들이 종일 쓴 대본을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고, 다 같이 안 자고 작업했죠. 22개는 많아도 너무 많은 분량이에요. PWB 어느 시점에선 ‘이젠 나도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하게 되지는 않나요?

TF <30 록>은 제가 너무나 아꼈던 작품이라 그러진 않았어요. ‘내 손을 어느 정도 떠나도 상관없어’라는 마음이 드는 작품들도 있기는 하죠. 하지만 육체와 정신이 그토록 치열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것 같아요. <플리백>과 <킬링 이브>는 둘 다 대본에 페미니즘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는데, 본인이 실제로도 모범적인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나요? PWB 그렇죠. 어떤 의미로는 <플리백>의 주인공이 제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주인공은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러워하며 본인이 나쁜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하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죠. 주인공의 그런 모습이 제가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느끼는 바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아요. 연극을 위한 각본을 쓰며 여성을 그리는 것, 특히 여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여성의 일반적인 모습” 같은 식의 얘기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죠. 구체적인 스토리를 가진 디테일한 여성상을 보여주고 싶고, 사람들이 공감해줬으면 좋겠어요. TV판 <플리백>은 물론이고 연극 <플리백>과 <킬링 이브>의 각본과 캐릭터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저의 생각과 기대를 나타내는 방식이고, 저는 그 작업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중이죠. 제 작품들 덕분에 사람들이 제게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스럽기도 해요. 여성들이 제게 다가와 그런 주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뿌듯해요. 남성일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여성들이죠.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 페미니즘에 관한 대화를 시도할 때, 거기에 클릭베이트 같은 느낌의 ‘핫 버튼’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특정 방향으로 저를 유도하기 위한 함정 같은 건데요. 그런 사람들은 제가 논란의 소지가 될 말을 해주길 바라죠. 제가 업계 다른 여성들의 롤 모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미끼 같은 거예요. 언론은 끊임없이 절 여성의 적으로 만들고 싶어 하죠. 완벽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요. 지금 시대에 많은 사람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싸우고 있어요. 적어도 이 업계에서는 그래요. 그리고 중요한 건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거지 아젠다만 쏟아 붓는다고 될 건 아니에요.

TF 덤으로 따라오는 유명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PWB 방금 얘기한 게 유명해지는 것의 무서운 부분일 테지만, 나름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에겐 제가 갑자기 일종의 2차원 인물이 되어버리기도 하죠. 가장 기분 좋은 건 누군가 저한테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냥 그렇게 간결하게 말해주는 것.

TF 그렇죠. “TV에 나오는 분이시죠?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가 아니라 제 작품을 언급해줄 때가 좋아요. 프로그램은 본 적도 없으면서 사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지 아닌지를 직감적으로 느끼죠. PWB 봤고 안 봤고의 차이가 확실하죠. “그런데 당신…, 누구죠?”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지하철에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치 “내가 다 보고 있어”라는 식이죠.

TF 그냥 신경을 꺼버려야 해요. PWB 바로 그거예요! 사실 누가 나를 알아봐주는 건 좋은 거잖아요. 저는 <왕좌의 게임> 같은 초대형 시리즈에 나오는 배우인 것도 아니라서 길 가는 사람들이 무작정 제게 달려드는 일도 없거든요. 그저 저한테 와서 제 연극의 어떤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을 건네는 수준이니까요. 프로듀서인 제 친구 비키는 “지하철 끝에 앉은 저 사람이 널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라고 말해주곤 해요. 절 지켜주려는 비키의 마음은 고맙지만, 어쩌면 제가 입은 코트가 마음에 들어서 쳐다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플리백>의 팬들도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누군가 “플리백!”이라고 외치는 정도죠.

TF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야 루돌프가 저라고 착각하더군요. PWB 저랑 제시카 네펫이 딱 그런 상황이에요. 제시카가 <더 인비트위너스>에 출연했는데 어째서인지 보도자료에는 죄다 제 사진이 실렸거든요. 마치 제가 그 영화에 나온 것 같았어요. 그리고 침대 위에서 속옷차림으로 하는 장면에서도 저희가 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TF 그렇다니까요. 방금 말한 건 구글에 검색해보죠. 피비는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에도 출연했죠? 축하해요! 1970년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이가 간직하는 일생의 꿈을 이뤘네요. PWB 맞아요! 누구나 <스타워즈> 시리즈를 한 번쯤은 찍어봐야 해요.

TF 어땠어요? 파인우드 스튜디오에서 비밀리에 촬영했나요? 아무한테도 얘기 못 하고? PWB 그렇죠.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어마어마한 덮개 같은 걸 씌워주는데, 그게 엄청 웃겼어요. 전 로봇 의상을 착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밑으로 로봇 다리가 삐져나온 게 다 보였거든요. 덜컹덜컹. “여기 보세요. 이번 영화에서는 제가 로맨스를 담당합니다!”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죠. 스튜디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모두가 <스타워즈> 시리즈를 만든다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어요. 전부터 <스타워즈>를 해왔던 사람들조차 말이죠. “크리처 제작실을 구경시켜 드릴게요!”라며 저를 제작실로 데리고 간 이들도 크리처를 만들 수 있게 되어서 엄청 흥분한 상태였죠. 카메라 바깥에서도 신경질적일 정도의 에너지가 넘쳐흘렀어요. “우리 이거 진짜로 하는 거야!” 같은 분위기예요. 처음 밀레니엄 팔콘에 탑승했을 땐 정말 멋졌어요. 아래에서 버튼을 조작하면 선체가 움직이면서 “우와”하게 돼요. 게다가 선내에 스크린이 설치된 게 처음이라 다들 또 엄청 흥분했죠. 보통은 그린 스크린을 걸어놓고 우주를 항해하는 상상만 했거든요. 이번엔 상상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어요. 버튼을 누르고 우주선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눈앞의 우주가 펼쳐져요. 하이퍼스페이스에 진입했을 때가 기억나요. 최고였어요.

TF <스타워즈> 매니아들의 숭배를 받게 될 텐데 기분이 이상하지는 않아요? PWB 이상하죠.

TF 피비가 등장하는 서브레딧은 당연히 벌써 생겼죠? 피비가 연기한 로봇이 등장하는 팬픽도 있겠고. PWB 랜도 칼리시안 역의 도널드 글러버와 같이 기자회견을 할 때 극중 우리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받았어요. 순수한 질문들이었죠. “새로운 커플의 로맨스에 대한 반응이 어떨까요?” 같은 질문들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얘기를 하다 보니 겉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갔고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 애를 쓰던 와중에 결국 도널드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내용에 대한 갈증은 인터넷이 해소해줄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말았죠. 팬픽 같은 게 만들어진다면 보고 싶네요. 좋은 작품이 나오길 빌어요. 하하하. 결국 로봇은 우주선에 설치되어 선체의 일부가 되었지만, 어떻게 보자면 도널드의 입장에서는 접촉할 게 더 많아진 셈이기도 하니까요.

TF 저도 기대할게요. 오늘 대화, 너무 즐거웠어요. <플리백>은 이제 끝인가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뭔가요? PWB <플리백>은 두 번째 시즌으로 끝났어요. 확실히 끝난 거예요. 그리고 지금 준비 중인 기획이 있어요. 몰래 쓸 거예요. 하하하. 그리고 또 한 번 깜짝 놀라게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