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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오 "불안하기 때문에 즐거워요"

2019.08.26GQ

유태오가 긴 시간 차근차근 단련했을 몸을 풀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여줄지 아직 모르지만 그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이 많아졌다.

애니멀 패턴 송치 재킷, 김서룡 옴므. 포켓 팬츠, 발리. 슬리브리스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브라운 패치 시어링 재킷, 폴로 랄프 로렌, 화이트 티셔츠, 코스. 데님 팬츠, 아페쎄. 레이스업 부츠, 토즈.

나일론 재킷, 프라다. 버건디 점프 슈트, YCH. 부츠, 보테가 베네타.

터틀넥 니트 톱, 부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 나일론 팬츠, 펜디. 풀페이스 헬멧, 벨 at 라이드앤롤. F850GS 바이크는 BMW 모토라드.

롱 파카, 쇼츠, 모두 펜디. 풀페이스 헬멧, 벨 at 라이드앤롤.

새틴 보머 재킷, 김서룡 옴므. 페이즐리 셔츠, 포츠 브이. 와이드 팬츠, 메종 키츠네. 부츠, 보테가 베네타.

아까 촬영할 때 “이렇게 해볼게요”라고 하더니 혼자서 바이크 위치를 옮기고 그 위에 길게 누웠잖아요. 리허설을 열 번쯤 한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그렇게 쉬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곳에선 대부분 스쿠터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데 그 위에 누워 쉬거나 헬멧을 베고 낮잠을 자기도 해요.

베트남에는 무슨 일로 갔어요? 4년 전 베트남 영화에 캐스팅됐어요. 원래 8회 차 촬영이었는데 6주 동안 잡혀 있었어요. 시간이 나면 호텔에서 스쿠터를 빌려 타고 맛집을 캐러 다녔죠.

작년에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레토>로 주목을 받았는데 1년 사이 뭐가 달라졌나요? 큰 기대는 안 했어요. 운이 좋으면 오디션 요청이 더 들어오겠지, 이 정도였어요. 3년 전부터 큰 작품은 아니지만 매년 한 번씩 주인공 역할을 맡았어요. 앞으로 1년에 두 작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말도 안 되게 바빠졌어요. 최근 영화 하나를 마무리했고, 다음 달에 촬영이 끝나는 영화가 있어요. 드라마도 대기 중이에요.

커리어의 기승전결에서 어떤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연기에 대한 진솔함과 열정은 충분히 증명했다고 봐요. 올해는 실습의 시간이라 여기고 있어요. 독일 교포 출신의 배우로서 한국인 역할을 잘 연기할 수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받고 싶었어요. 최대한 많은 역할을 소화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인지도를 높이는 게 당장의 목표예요.

빨라진 리듬에 잘 적응했어요? 저도 결과를 봐야 뭐라 말할 수 있는데 공개된 작품은 <아스달 연대기>뿐이에요. 전에는 15년을 버티면서 제 나름의 철학이 맞는 건지 안 맞는지 알 수 없었어요. 남들에겐 제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잖아요. 조금씩 반응이 오면서 갈고 닦았던 것들에 확신이 생기고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고 불안해요. 갑자기 대중의 관심 밖으로 사라질 수 있으니까.

왜 불안하죠? 전혀 즐겁지 않나요? 불안하기 때문에 즐거워요. 그런 불안과 고민이야말로 아티스트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긴 무명 생활을 통해 인생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계획보단 꿈을 좇고 있어요.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단위로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반짝 반응이 좋아졌다고 해서 크게 만족스럽거나 하진 않아요.

듣고 보니 이해가 가요. 그렇지만 <아스달 연대기>를 통해 <레토>와 유태오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자신을 각인시켰어요. 드라마의 혹평 속에서 확실한 인정을 받았고요. 이래도 만족스럽지 않다고요? 긍정적인 반응들에 대해선 감사해요. 하지만 개인적인 만족도를 이야기하면 큰 감흥은 없어요. 왜냐면 아무리 칭찬을 들어도 제가 부족했던 부분을 알고 있거든요. 유태오라는 배우를 가장 먼저 비판하는 사람은 바로 저예요. <아스달 연대기>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넘어갔구나, 하는 장면들이 있어요. 저만 아는 거죠. 거기서 점수가 깎여요.

못마땅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강인한 캐릭터의 라가즈는 유태오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금껏 저와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 경험은 없어요. 라가즈도 그렇고요. 제가 가진 감수성 범위 안에서 나왔어요.

그런가요? 신중하고 섬세한 도회적인 남자처럼 보이는데. 친한 사람들에겐 스위트하고 털털한 사람으로 통해요. 하지만 적어도 저만큼은 자유분방하고 야성적인 기질도 있다고 느껴요.
그 정도의 깡은 갖고 있어요. 남들은 몰라주지만.

무작정 떠난 뉴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오디션을 보러 다닌 것도,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와서 일을 시작한 것도 그 깡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아니요. 그건 한국에 와서 많은 경험을 통해 생겼어요. 그 전에는 상황에 따라 선택하고 움직였던 것 같아요.

어떤 종류의 경험요?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정체성을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기로 마음먹었어요.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정체성을 갖고, 무슨 생각을 하며 자랐을지 느껴보고 싶었어요. 엄청 외롭고 공허했지만 악착같이 버텼어요. 그 답을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죠.

단단히 준비한 느낌이 들어요. 절박하고 긴 시간을 버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 대가로 무엇을 얻었나요? 감수성이 풍부해졌어요. 제약의 한계 속에서 의외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예를 들어 두 벽으로 차단된 공간 안에서 뭔가를 표현하라고 하면 평범하지 않은, 창의적인 게 나올 확률이 커요. 자유롭지 못하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할 수 있었어요.

배우로서 엄청난 이득이죠? 그럼요. 배우는 경험치가 풍부해야 해요. 화가에 비유하면 여러 색을 갖고 있어야 더 섬세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어요. 팔레트에 색을 채우듯 다양한 경험의 감수성을 쌓아야 하는데 사람마다 팔레트의 넓이는 달라요. 다행히 감수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범위가 타고나게 큰 편이에요.

어렸을 때는 어땠나요? 부모님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였어요. 집안 분위기에 노동자 계층 특유의 투박함이 있었죠. 돌아보면 감수성에 대한 욕구가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중경삼림> 같은 영화를 좋아했고 사색을 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산보를 즐기기도 했고요. 독일은 자연이 가까이 있어 걷기에 좋았어요.

서울에선 어디로 산책을 나가나요? 남산요. 항상 남산에 가서 운동을 해요. 일이 바쁜 것 말고는 일상은 전과 똑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진 않아요.

10대 시절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만큼 농구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들었어요. 기본적으로 운동을 좋아해요. 그걸 떠나 배우는 당연히 자기 몸을 관리해야 해요. 연기 수업에서 몸이 굳어 있으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뻣뻣하게 서 있는 연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 감수성의 팔레트뿐만 아니라 몸의 팔레트도 유연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어요. 며칠 전 국립극단에서 진행하는 무료 클래스가 있어서 신청하기도 했어요. 몸의 움직임에 대해 가르쳐주는 수업인데 뽑혔으면 좋겠어요.

드라마 <배가본드>에서 용병 역할을 맡았죠? 액션 연기는 어땠어요? 한번 해보니까 더 강하고, 더 다양한 액션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과연 어떤 장면까지 소화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최초’라는 수식어에 욕심을 갖는 편인데 한국판 ‘미션 임파서블’ 같은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바이크에 올라탄 모습을 보니까 잘 어울리긴 할 것 같아요. 대형 상업영화의 주인공이 최종 목표는 아니겠죠? 그럼요. 하지만 왔다 갔다 해요. 정말 좋은 상업영화에 캐스팅되고 싶으면서, 작가주의적이라고 일컫는 작품에 끌리기도 해요. 크리스찬 베일이나 브래드 피트처럼 메인 스트림의 주연부터 작은 영화까지 자유롭게 오가고 싶어요. 근데 이건 나중에 고민해야 할 문제예요.

더 올라가기 위해 갈고 닦는 한 방이 있다면요? 특별히 그런 건 없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거나 계획을 갖고 행동하진 않아요. 그보다 저를 만족시키는 재미와 호기심을 좇는 편이에요. 왜 그럴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어요. 그렇게 배운 게 연기에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겠죠. 하지만 재미가 없는데 일부러 뭔가를 하려고 하진 않아요.

알 것 같아요. 요즘 열중하고 있는 건 뭔가요? 건축 자료 조사를 하고 있어요. 자세히는 포스트 모더니즘, 더 들어가면 브루탈리즘이라고 해서 거대한 콘크리트로 지은 차갑고 육중한 느낌의 건축 양식에 관심이 있어요. 또 요리를 즐겨 하는데 샤퀴테리에 빠져 있어요. 흑돼지로 소시지를 만들면 어떨까, 손이 많이 가는데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식은 없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해보고 있어요. 사진 보실래요?

그럴듯한데요. 이렇게 와인 냉장고 안에 숙성시키고 있어요. 여기 보이는 치즈도 직접 만들었어요. 플레이팅에는 소질이 없어요. 다큐멘터리도 많이 봐요. 진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면 굉장히 따분하고 지루할 거예요. 결국 다큐멘터리에도 연출이 더해질 수밖에 없어요. 연출자가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편집하는지 호기심을 갖고 유심히 보고 있어요.

지금 좀 신나 보여요. 유태오라는 사람은 즐겁게 산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감이 살아 있다는 게 무척 감사해요. 맛이 궁금하면 먹어보고, 보고 싶으면 보고, 듣고 싶으면 들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유태오에게 궁금한 거라든가. 글쎄요. 뭔가 물어본다면 “네가 그렇게 잘났냐?”

뭐라 대답할 건가요? 너 때문에 내가 잘났다.

무슨 뜻이에요? 너란 존재가 나를 인정해주기 때문에 내가 잘날 수 있다, 그런 의미예요.

    에디터
    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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